新世代 作家들의 장편소설
김경수 / 문학평론가, 서강대 강사
최근의 우리 소설계를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으로 젊은 작가들의 장편이 왕성하게 쓰여지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젊은 작가들의 이러한 왕성한 필력의 과시는 그 윗세대 중진작가들의 공백과, 또한 상품으로서의 소설에 눈뜨기 시작한 출판시장이 젊은 작가들의 장편전재라는 이름으로 경쟁적으로 장편소설 쓰기를 부추겼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현상이라고 해도, 이들의 부지런한 글쓰기는 외견상으로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이들 젊은 작가들이 천착해 들어간 소설세계가 내적으로 성숙된 작품이며, 또한 진정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작품들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필자로서는 선뜻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오히려 필자로서는 이들 젊은 작가들이 자신이 사정도 돌아보지 않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성급하게 장편의 길로 뛰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의심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급조·과장이 쉬운 성장·관념소설이 주류
당장 기억에 떠오르는 대로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가깝게는 표절시비에 휩싸였던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포함해서 박상우의 「시인 마태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주인석의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그리고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등등의 작품이 기억에 남고, 더 나아가서는 조금 시간적 터울이 지기는 하지만 장석주의 「낯선 별의 청춘」을 위시해서, 「문예중앙」에서 지속적으로 지면을 할애했던 구효서, 엄창석, 이승우, 하창수, 채영주 등의 장편들도 최근의 젊은 작가들의 장편 붐을 이루는 주요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들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그리고 그 주제적 접근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접근법과 다양성을 보이고 있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필자가 보기에 이들 젊은 작가들의 장편소설들은 크게 보아서 이른바 성장소설 계통에 드는 작품들과 그리고 관념적 사회분석의 시선에 입각해서 우회적 또는 직접적으로, 한 사회의 축도를 나름대로 진단하고 추정해 들어간 관념 소설로 이대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자의 경우에는 장석주의 소설과 하창수 박일문의 소설, 그리고 박상우의 「시인 마태오」등과 주인석의 최근작인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등이 대표적인 예로 꼽힐 수가 있을 것이며, 후자의 예로는 구효서의 작품과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 그리고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등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소설들이 그렇게 분류될 수 있다고 해서 이들이 그 해당 범주에 적합한 예들이라거나 혹은 그러한 장르 범주의 의미를 확장할 만큼의 의미있는 이종(異種)적인 변이양상들을 드러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는, 이들 소설들이 핍진성이라는 환상에 의지해서 시간적 변화에 따른 인물의 삶의 변화를 담기에 적합한 공준된 소설장르인 성장소설의 틀과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현실세계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에 의지해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면모를 과시하기에 적합한 관념소설의 형태를 취한 것이 신중한 소설적 탐색의 결과라기보다는 급조된 이야깃거리 발굴의 차원에서 빚어진 과장된 작가적 면모의 과시욕의 산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80년대’라는 特需, 성장소설 범람원인
구체적으로 성장소설의 면모를 지닌 작품들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른바 성장소설은 한 주인공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 결국은 의미있는 성숙을 거쳐 그 사회로 안정되게 편입하거나 혹은 올바른 세계인식에 이르는 전 과정을 그려내는 소설의 하위장르로 이야기된다.
최근까지 간행된 젊은 작가들의 장편의 경우 상당수의 작품들이 이와 같은 성장소설의 범주에서 논의되는데, 물론 이들이 성장의 고비에서 직면했던 세계로서의 80년대 사회가 유례없이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겪게끔 한 문제적인 사회였다는 점에서, 이제 그 암흑과도 같은 시대적 터널의 끝에서 자신들의 성장의 시대적 문맥을 문제삼는 작업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작업일 수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성장은 「이미 마련된」하나의 이야기들로 준비된다. 이들의 소설은 너무도 뻔하게 당대의 폭압적 정치상황과 왜곡된 사회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선에서 자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들이 소설 속에서 드러내는 세계가 언어적으로 구축된 허구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실제 그대로의 집합적 개념으로서의 사회로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장 소설이 생존의 다큐멘터리가 아닌 한 문제적인 인물을 둘러싼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변형된 환경으로서, 그리고 인물과의 관계에서 상호 연맥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 성장소설계통의 소설들은 오히려 단순히 회고적이거나 낭만적 회상을 주조로 한 분위기소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된다.
벅찬 주제, 안이한 대결, 관념소설류의 맹점
주제적 접근상 이러한 소설들과 대척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소설들이 일종의 담화로서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소설들이다.
이승우의 일련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가시나무 그늘」과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가 이런 소설의 단적인 예들이다.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소설가가 사회과학적 해부의 시선을 던져 사회의 제반 모순된 구조를 이루는 힘들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사회적 자료로서 간주되어왔던 소설 고유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역시 주안점은 사회를 보는 관념적 시선이 결코 선점된 관념이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소설이 궁극적으로 인간학인 이상, 사회 속에서 한 인물의 행위를 통제하고 제약을 가하는 사회적 힘들과 그 부조리한 영향관계에 대한 탐구 또한 언어적 형상의 과정을 통해서 찾아져야 하는 다소 새로운 시각에서의 탐구여야지 다른 사회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쉽게 환원될 성질의 관념으로 생경하게 남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최소한 관념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들은 이런 당위의 구속으로 인해, 아무리 자체로 리얼리스틱한 재현을 표방한다고 해도 이미 자체 안에 모종의 상상적 해석의 공간을 담을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는 이청준의 소설이 직접 증거하고 있는 바다. 그의 소설은 관념을 추구하되 그것이 소설시학적으로 검증된 결과라는 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관념적 도해의 접근법은 작가 스스로 엄정한 분석의 시선을 견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소설의 깊이의 측면과 진지성이라는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그 정당한 값을 매겨주어야 할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소재상의 무게와 그 접근상에 있어서의 작가적 담화의 진지함이 소설의 깊이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날것 그대로의 사회적 자료와 분석의 태도로는 소설과 접맥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경우 작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과정 및 그 결과로서의 단언을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소설적 진실로 확립해야 하는 부담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젊은 작가들의 이러한 작업에서 그런 벅찬 주제와의 대결의식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압구정동으로 대표되는 부황에 빠진 90년대식 삶의 현실에 대한 답변으로, 책임회피적인 테러리즘을 지식인으로서의 마지막 행동 가능성으로 제시한 이순원의 작업이 그 안이한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장편을 통해 추구해야 할 소설적 가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작업일 뿐이다.
장편소설은 분명 부르조아시대의 서사시
장편소설을 부르조아시대의 서사시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중·단편과는 달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그 험난한 질문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그 장르적 본질에 대한 탐색이 뒤따르지 않는 한 젊은 작가들의 장편에의 도전은 언제까지나 시기상조의 불발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당대의 현실로부터 뽑아내야 할 자신의 플롯의 힘, 그리고 담화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급조된 장편 선호의 세태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더욱이 지금처럼 암중모색이 필요한 시대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