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난장이…」이후 문학인식과 포스트 모던




김윤식 /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1. 「난장이…」이후의 문학인식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창 논의되기 시작할 즈음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느냐는 질문을 나는 여러번 받은 바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축이냐 아니면 반대하는 축이냐, 또 그 이유를 대보라는 것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데올로기의 편가르기를 강요하는 것과 너무도 흡사하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적어도 작가 이청준이 창출해낸 전짓불아래서의 질문을 기억하고 있는 문학주의 쪽에서 볼 땐 이러한 질문형식이란 매우 비문학적이자 정치적일 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내게 던져진 것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주 엉뚱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한국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현대시 사상」1989.3)을 쓴바 있는 나로서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표명한 터인데도 저러한 질문이 던져짐이란 새삼 무엇을 가리킴일까. 글의 불투명함 탓이 아니었겠는가. 발표된 글의 애매모호함이란, 글쓴이의 주제에 대한 태도의 불투명함에 많건적건 관련되는 것으로 일단 볼 수 있는만큼 그 책임이 내게서 말미암았다 할 수도 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도 않았는데, 정정호 교수의 그 글에 대한 판독이 그것이라 할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문학」(글, 1991)에 졸고가 실려 있고, 편자 정정호 교수가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지 않겠는가. 『이승훈 교수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시켜 우리문학의 역사적 특성을 새롭게 해명한 이 분야의 최초의 글이라 평가를 받은 글인 「한국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직 본격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학작품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결론짓고, 그러나 앞의 제사에서와 같이 앞으로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예견하고 있다.』라고.

내가 그 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다만 현상을 분석, 설명했을 뿐 어느 쪽에 편든 것이 아니었다.

실상 포스트모던스런 징후를 자각적이든 아니든 간에 내가 오래전부터 여러 글에서 논의하였음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물론 내가 표나게 내세운 것이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었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70년대 문학 전체를 폭파하고도 남을 폭약이 장진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두고 『안락한 일상 속에 잠자온 우리에게 가열한 충격이다.』(김병익)라 지적한다든가, 『네오 리얼리즘의 몽타주 수법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신선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염무응)라고 지적함에 나도 동의할 수 있다.

이들 비평가의 작품평가의 시선이 「그 왜소하고 병신스런 모습을 통해 광포한 산업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허구와 병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꿈과 자유에의 열망을 보여 줌」에, 또는 「비상하게 날카로운 촉수로 소외계층과 공장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우리 노동 현실의 심층을 해부했음」에 놓여 있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시선에 일면으로는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70년대가 지나면 조만간 노동현실이 급속히 변할 것이며, 우리의 산업시대의 사회가 겪는 허구와 병리의 폭로도 빛바래질 성질의 것이기에, 이런 시선에 기대는 한 이 작품은 한갓 시대 정신의 반영이거나 고발수준에 멈추고 말 우려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이 훌륭한 작품을 한층 견고하게 또 지속적으로 문제작품이게끔 하는 시선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말을 바꾸면, 노동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이 한갓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평가·해석되고 말지 모른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작품을 이데올로기의 수준(시대정신의 반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작품에 대한 어떤 시선도 그 시선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일종이기에 이 함정을 회피할 수가 없다할지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거나 지연시킬 방도가 없는 것일까.

2. 괴델의 불확정이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람이라면 12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첫 하옥이 「뫼비우스의 띠」이고, 끝에서 두번째가 「클라인씨의 병」임에 주목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이 수학교사와 학생간의 교과내용(세계인식)에 대한 문답으로 시작되어, 그것으로 끝나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까. 「난장이가…」라는 작품은 실상 교육소설의 일종이었던 것. 이 경우 교육소설이란 설명이 없을 수 없다. 학교라는 특수집단속의 폭력을 비롯한 이런저런 사건이라든가 성장기의 갈등이라든가, 교사와 학생간의 인정담 따위를 다루는 소설은 기왕에 수없이 있어 왔기에 새삼 이런 명칭이 필요치 않으리라. 「에밀」(루소)모양 인간성 개발에 주력하는 목적 소설도 이미 수 없이 있어 왔다.

이런 것에 비해 「난장이…」는 단연 구분되는데, 「교과내용」에 대한 비판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음에 이 구분점이 관련되어 있다. 교과내용자체에 대한 논의(비판)이며, 그 논의가 오직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짐이란 썩 별난 경우이다. 교과내용자체에 대한 비판이란, 구체적으로는, 현행교육자체의 비판에 해당되는 것인만큼 인식론적 전환에 많건적건 알게 모르게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교과내용이란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은 크게는 국가이념, 작게는 지배층의 이념의 표현이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비판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감행한 것이 「난쟁이…」가 지닌 폭발력의 원천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뫼비우스의 띠」(Möbius' Band)와 「클라이인의 병」(Klein's Pot)이 그것.

「뫼비우스의 띠」란 직사각형 종이를 접어 원통형 만들 때 생기는 현상을 가리킴이다. 직사각형에서 안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원통의 경우로 변질될 땐 바깥이 되어버리기, 또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엄연히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믿지 않겠는가.

「클라인의 병」이란 것도, 조금 복잡하고, 다만 상상속에서만 가능하지만 어김없이 증명될 수 있다는 점(이는 따로 화폐의 원리 설명이지만)에서 안과 바깥의 구별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일종의 환각인지도 모를 일. 그럼에도 안과 바깥이라는 이항대립적 사고가 우리생활을 지배하고 있음 자체도 일종의 환각이자 허구가 아닌가.

가장 확실하다는 수학에서 이 점이 증명된 셈이다. 어찌 안과 바깥뿐이랴. 선과 악, 현상과 본질, 정의와 부정, 빈과 부, 상부와 하부, 더러움과 깨끗함의 경우도 허구이자 환각의 일종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플라톤이래 지금껏 버티어온 이성중심주의(이른바 형이상학)가 이처럼 일종의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다름 아닌 수학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의 병」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서면, 수학계에서의 힐버트의 형식주의의 대두로 요약되고, 마침내 괴델의 불확정성 원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 1931)에 이르게 된 바 있다. 어떤 공리도 그 공리체계 내에서는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것. 가령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장이라고 한 크레타인이 말했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패라독스가 그것. 이런 자기언급적(Self-referental)인 진술에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골목에 닿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랄까 시선의 전환을 두고 「클라인의 병」이라든가 「뫼비우스의 띠」라 했을 때, 이는 그동안 인류가 전개해 온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비판에 해당되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작가 조씨는 이를 매우 확대 내지 축소시켜 수학(과학)을 윤리문제로 한정하고 만다.

수학선생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별 수가 없어서 수학과목을 내놓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윤리를 맡으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 제군도 잘 아다시피 윤리는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원리이다. 제군이 결정자라면 수학을 못 가르쳤다고 책임을 물은 사람에게 윤리를 떠맡길 수 있겠는가.』(문학과 비평사, P.325)라고. 수학교사를 윤리교사로 바꾸겠다는 어떤 제도 혹 이데올로기의 강요가 수학자체를 없애겠다는 의도이겠는데, 이러한 파악방법은 흑백논리(이항대립)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전면수용으로 치달은 결과일 수도 있다.

불확정이론이란 형이상학의 전면부정이 아니라 그것에 틈(의심의 영역)이 생겼다는 것의 지적에 불과한 것이다. 안과 바깥의 구분 불가능성이지 그것 자체의 부정은 아닌 까닭이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의 병」으로 표상되는 세계관 오직 자기언급적(공리체계내)인 인식의 틀에서만, 참·거짓의 결정불가능에 놓임을 가리킴에 지나지 않는만큼, 선악, 빈부, 안·바깥의 이분법의 전면부정을 가리킴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과제를 70년대 노동현실의 심층에로 국한시켜 적용함이란 그만큼 첨예함을 드러내었음과 동시에 적용범위의 제한과 아울러 그 조급성의 드러내었음이라 말할 수 없을까.

수학선생을 윤리선생으로 바꾸겠다는 이데롤로기가 뜻하는 것은 수학을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다. 수학이 안고 있는 확정성의 작은 틈을 없애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흡사 수학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일종의 오해라고 볼 수는 없을까. 그가 애써 부정, 고발하고자 하는 그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자칫하면 스스로 행사하고 있는 꼴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비판에 견디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소외계층과 공장근로자의 세계(난장이와 앉은뱅이)에서 해방시켜, 형이상학자체에의 비판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 곧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의 완성에로 연결해놓는 일이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한국적 현실에 문제를 국한시킨다면 그만큼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결과에 닿지 않을 수 없다. 「난장이…」이 지닌 시대정신의 한계의 빠른 노출이 일종의 안타까움이었음은 이를 가리킴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난장이…」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제일 강렬하게 품었던 작품이었음이 판명된다.

이러한 내 지적은 이 작품의 수법상의 특징인 과거와 현재의 중첩, 환상적 분위기 조성, 시점의 빈번한 이동 등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수법의 차원이 아닌, 세계인식의 문제였던 것이며 이러한 시선 변경의 지적이 막바로 포스트모던한 상황을 가리킴은 아니지만, 시선 변경이 후기자본주의의 성격에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던한 상황의 승인에 가까운 것이라 할만했다.

3. 유적 본질과 노동개념의 국면

80년대 말기 우리의 지적 풍토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풍조가 크게 유행한 이유는 어디서 말미암았을까. 이 물음은 그것의 리얼리티를 문제삼아서 해답을 이끌어내야 함을 암시한다. 우리의 GNP가 5천불에 턱걸이를 하고 있었고, 후진국에서 겨우 중진에로의 진입단계였지만, 우리 사회의 일부가 이미 후기산업사회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정보사회에도 한 발 들여놓았다고 볼 것이다. 자본제 시스템의 논리나 생리상 이러한 사태의 진행 속도와 그 전면성은 실로 가공할만한 형편에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속도라든가 논리가 막바로 그것의 리얼리티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리얼리티를 가져다 준 계기란 따로 있었는데, 동구 및 소련 해체현상이 그것.

「뫼비우스의 띠」라든가 「클라인의 병」나아가 괴델의 불확저이론이 어째서 포스트모던한 인식비판인가를 설명함에 있어, 매우 불투명하다면 그것은 이에 대한 내 공부의 부족함에 있겠지만, 이러한 인식비판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리얼리티이다.

그 리얼리티란 실상 외부에서 오는 것. 서유럽에서도 그러했겠지만 특히 아시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경화된 결정론이라든가 당파적 윤리주의의 측면을 상대화함에서 그 리얼리티가 확보되었던 것. 이러한 지적이 우리에게 특히 유효한데, 이는 소련, 동구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가로놓여 있음에 관련된다. 북한도 해체될 것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방식은 이중적이다. 해체되기를 원하는 심리적 동기가 포스트모던한 인식의 리얼리티의 근거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해체되어야 한다와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모순의식이 그 리얼리티의 실체라면, 여기에 또 포스트모던한 상황의 한국적 표정이 깃들여 있다고 볼 것이다. 철학적 두뇌(이성에 기반을 둔 논객들)들이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결정불가능한 상태랄까 냉담한 대신, 번역수준의 논객들의 해설이 무성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상황이란, 사회(구조)와 인간(개인)이 적대관계에 있느냐 조화관계에 있느냐의 문제로 요약될 수도 있다.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회를 이성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사상이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이성적 정신이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면, 인간의 이성 사용을 자연의 인식과 인간의 내적 정신에 한정함에서 벗어나, 그것의 사용을 사회에까지 넓힌다. 이성적인 사회관찰의 사상이 일찌기 없었던 것은 아니나, 헤겔의 경우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관찰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말해진다. 곧, 사람은 살아있다고 해서 저절로 사회적 존재로 되지 않으며 그의 사회적 자각에 이르름에는 노동과 교양을 매개로 해서이다.

노동이란 자기의 삶이 반드시 타인과의 협조로만 가능함을 그에게 가르친다. 교양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된다. 헤겔이 묘사한 이상적인 사회상이란 시민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유스런 욕망을 어떻게 조정해 갈 것인가에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족, 시민 사회, 민족국가라는 그의 단계적 고찰이 이를 잘 말해준다. 먼저 인간은 가족 관계를 맺는다. 이를 통해 타인에 대한 자연스런 윤리성(인륜)을 몸에 익힌다. 시민사회 속에는 자유경쟁에 의한 욕망의 분출이 인륜을 파괴해 버린다. 이를 조정하는 것이 민족국가 이념이다. 이를 두고 지양된 인륜이라 불렀던 것. 이러한 지양된 인륜으로서의 인간의 사회적 본질이, 알게 모르게 사회적 역할 관계를 인간존재의 의미인양 인식되기에 이르게 되고 만다. 곧 인간의 가치가 그의 사회적 역할에 있는 것처럼, 전도된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본말전도 현상이 생각의 오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이 가져온 하나의 필연적인 전도라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가 직관한 것이 바로 이 급소였다. 마르크스의 견해란 이렇게 요약될 수 없을까. 이 사회에서 인간이 노동과 교양을 적절히 쌓으면 누구나 인륜을 사회해 갈 수 있다고 헤겔이 말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현실을 보라. 민족국가의 이념에 의한 정치적 국가의 완성은 서민사회의 측정의 논리를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보증하고 완성해나가고 있지 않겠는가. 근대국가란 헤겔이 예상하는 것 모양 개인적 욕망의 조정을 결코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유적 본질(인류)과 개인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본질(시민으로서의 본질)을 영원히 분리하고자 가늠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자본론」이 그 해답이다. 곧 근대국가가 부(자본·화폐)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속의 노동이란 개인과 사회의 대립 갈등의 조정물이 아니라, 단지 소비된 욕망의 수량의 표현에 불과하다. 노동은 자본, 화폐의 원리에 의해 소외되는 것. 이때문에 노동을 아무리 쌓아도 인간은 자본가이든 노동자이든 자기의 인륜(유적 본질)을 표현할 수도 심화시킬 수도 없다. 인간의 노동이란 이로써 노동력 상품이 되어 임금과 자본으로 전화된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의 수량이고 화폐를 증식코자 하는 수단이고 또한 권력(지배권) 그 자체가 된다.

이처럼 헤겔을 흡수하여, 극복한 마르크스는 노동력 상품의 정밀한 분석에 멈추지 않고 이러한 현상을 가져오는 원인 제거 곧 사회변혁운동에로 나아갔는데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운동이, 근대국가 곧 제국주의 시대의 욕망의 분출 앞에 막강한 리얼리티를 획득했음은 세계사가 보여준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형편은 어떠한가. 근대 사상의 꼭지점에 놓였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좌절된 마당이 아닌가. 대체 이것은 무엇을 가리킴일까. 두가지 점이 지적될 수 있다. 현재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사회적 모순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그 하나. 마르크스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이, 이상으로 삼았던 유적 본질의 해방을 가져오지 못하였음이 그 다른 하나. 그러니까 그 이상상에 문제가 있었다.

앞에서 나는 계속 포스트모던한 상황의 리얼리티 획득이 어디서 연유했는가를 물었다. 장대한 마르크스주의 사상 및 그 운동의 붕괴에서 그 리얼리티가 얻어졌음을 지금껏 살펴 온 터이다. 말을 바꾸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서 있는 자리란, 마르크스의 가설 위에서만 가능하고 그 가설에서만 그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논증한 가설이 옳은 한도에서, 데리다를 비롯하여 나온 이런 저런 포스트모던한 현대 사상은, 논리적으로 옳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마르크스주의의 전망을 부정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논리를 전제로 함으로써 가능할 따름이다. 모든 생산개념의 종언을 떠들며 상징교환과 죽음을 내세운 보드리야르의 논리나, 들뢰즈의 논리가 그러한 전형적 사례가 아닐까. 자본제 사회란 불멸인 까닭에 인간은 그 시스템 내부에서는 절망적이어서 죽음과 대치될 뿐이라든가, 광기로써 대응될 뿐이라는, 이들의 허무주의에의 귀결은 너무나 당연하다. 개인과 사회란 영원히 적대관계라는 것, 이를 넘어서는 길이 죽음(보드리야르)이나 광기(들뢰즈)밖에 없다는 이 도저한 비관주의와 허무의식이 펼쳐진다. 시선의 변경이 불가피한 것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이다.

마르크스가 자본·화폐의 원리를 인간으로부터 유적 본질(자연스런 인간 윤리)을 영영 박탈하는 하나의 조직(구조)이라 본 것은 그 시대의 현실속에서는 전혀 리얼(참)한 것이었으리라. 그 시대엔 과연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본·화폐의 원리가 영속적인 인간관계의 소외상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자본·화폐의 자율적 운동이 인간의 관계적 본질을 시민사회적 욕망의 도구로 전화시킨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에는 틀림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귀결되는 마르크스주의 전망(유토피아)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터이다. 이 전망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현실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잉여가치를 한 국가 내에서 통제해도 유적 본질이 실현될 조짐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적 본질의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일까. 여기에 인류사의 역설이 읽혀진다.

곧, 자본·화폐의 원리가 인간의 관계본질을 해친다고 하지만 이에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절망적이라 할 수 있을까. 들뢰즈나 보드리야르 모양 자본제가 원리적으로 사회 일반의 최종적 경제체계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관계 본질을 되찾고 그 사회구조에 손을 댈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헤겔·마르크스의 가설에서 벗어나는 시선변경이 요망됨은 이 때문이다.

4.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그 대응방식의 변주들

시선변경이란 무엇에 대한 변경인가. 일목요연한 해답이 주어진다. 헤겔·마르크스가 기대고 있는 바탕에서 벗어나기가 그것. 곧, 이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가 그것. 이성이라는 불변의 구조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 이를 최초로 정립한 철학자로 플라톤을 꼽는다. 기독교란 이 이성을 신으로 대치시켰을 따름. 데카르트, 헤겔(자기의식→이성→정신) 마르크스가 선 자리는 바로 이성(형이상학)이란 이름의 불변하는 구조물 위에서였다.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난 것이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등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커다란 시선변경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것은 언어의 자의성으로 요약된다. 기의와 기표가, 어떤 언어(랑그) 체계속에서는 결정되어 있어 필연적이나, 본질적으로는 자의적이라는 이 사상은 사물의 질서란 인간이 언어에 의해 만들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하나의 시선변경을 가져왔다. 이것이 악명 높은 관계론이라 불린 새로운 인식의 틀이다.

객관적인 사물의 질서가 먼저 있고 그것을 언어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행위가 그물처럼 끊임없이 질서를 창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그 그물을 바꾸어 가고 있다는 이러한 소쉬르의 생각을 두고 구조주의라 불렀다. 곧 이러한 인식의 틀이 언어학에 멈추지 않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로, 라깡의 정신분석에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로, 푸코에 의한 고고학에로 펼쳐져 나왔음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그들의 기본적 특질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1)관계론. 사물의 실체를 직접 묻지 않고 사회나 문화나 역사따위를 그 관계의 있음의 방식에서 찾아내는 방법으로 묻는 것.

(2)공식론적 분석. 사회나 문화의 상태를 그 성립이나 기원에서 묻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총체적 체계성으로써 포착하고자 하는 것.

(3)구조론. 명확하게 눈에 보이고, 인간에 의식되는 제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의 구조에 주목하여 그것을 포착하려는 것.

(4)형식화.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의 방법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요소를 철저하게 형식화하여 거기서 관게의 다발을 포착하는 것.

이러한 구조주의를 두고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상대화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로운 구조를 등장시킨 점. 마르크스주의가 이성중심주의라는 견고한 불변의 구조물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를 비판하고 거부하기 위한 사상으로 등장한 구조주의 역시, 인간에게 불변의 「어떤 구조」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지 않은가.

레비·스트로스가 내세운 이항대립적 사고란 인간에겐 의식되지 않는 관계성이라는 구조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무의식이라는 공통된 구조물이 있다는 것도 이 문맥에서 동일하다.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를 통해 그는 인류에겐, 그러한 보편적 구조를 보고 있었다.

어떤 보편적 구조(이성)가 있다는 헤겔·마르크스를 거부,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구조주의란 단지 새로운 구조를 하나 더 첨가한 결과를 낳았다. 개인과 사회 사이에 어떤 구조물(노동)을 놓아 그 조정항을 삼으려는 것과 구조주의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어떠할까. 구조주의적 발상은 이른바 의식된 인간의 동기와 사회제도 사이에 무의식의 「구조」라는 중간항의 도입이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사회의 대립에서 의식 쪽을 통해 사회개혁에로 나아가는 경우와는 달리, 의식 쪽 보다는 무의식 속의 커다란 구조를 포착하고 그것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주의의 난점은 금방 드러난다. 무의식 속의 구조를 무슨 수로 변경할 수 있느냐가 그것.

니체, 데리다의 시선변경이 획기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이다. 구조주의란 단지 마르크스주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객관(구주)의 인식을 보여주었을 뿐이라 비판한 후기구조주의(해체주의)가 볼만한 것은 구조주의가 행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불철저함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반인간중심주의, 반서구중심주의, 반이성중심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후기 구조주의 요점은 니체의 사상에서 잘 드러난다. 당초 어떤 객관적 인식이나 보편적 인식이 없다는 것. 곧 어떤 관점도 객관적이 아니며, 특정의 시점에서 찾아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거칠게 말하면 어떤 인식의 활동도 진리라든가 객관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힐리즘의 근원이 여기서 말미암는다. 그의 이 니힐리즘 극복방식이 권력에의 의지임을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비교적 뚜렷한 사상가로 등장한 데리다는 어떠한가. 그가 말하는 특이한 방법론을 두고 탈구축(디콘스럭션)이라 부르는데 이는 어떤 사상가의 텍스트에서 일의적인 의미만을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있는, 그와 대립되는 것 같은 하나의 의미성을 찾아내고 후자에 의해 전자를 상대화하는 방법이다. 유명한 「차연」개념은 이러한 방식에 의거한 것. 그가 행한 탈구축의 중요성이 훗설현상학과 소쉬르언어학의 비판에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훗설현상학이란 헤겔에 이어지는 형이상학 이념의 현대판이라하여 비판되었고 소쉬르언어학은 차연 개념으로 비판되었다.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놀이」개념일 터이다. 가령 누군가가 「저 하늘은 푸르다」고 말한다. 이 발화는 어떤 의미로는 특정의 그 누군가가 느낄 하늘의 푸르름의 표현이다.

그러나 「저 하늘은 푸르다」라고 씌어진 말은 실상은 주체의 죽음이 진행된 형국이다. 이 말이 벌써 특정한 인간의 특정한 감정의 재현(현전)임을 중지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기술의 배열로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의미되는 것」의 부재는 놀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이 부재는 놀이의 무제한화이어서 곧 존재론, 신학과 형이상학의 동요에 해당된다』(「그라마토론지에 대해」)라고 그가 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수학에서 1930년대 초에 이미 증명된 바 있는 괴델의 불확정성이론을 새삼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곧, 넓은 뜻의 근거의 상실개념(주체의 죽음)이란 근거가 있되, 그 참·거짓의 결정불가능과 얼마나 떨어진 생각일까라는 느낌이 그것.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비로소 우리는 「난장이…」에서 오늘날의 신진작가들의 작품 사이의 거리를 조금은 잴 수 있을 것이다.

5. 포스트모던한 상황과 3가지 글쓰기

「난장이…」이 「뫼비우스의 띠」「클라인의 병」으로 표상되었음이란 모두 괴델의 불확정성이론에 직접 간접으로 연결된다. 이 이론이 근거(구조, 이성, 논리, 객관)자체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고자 한 것과는 적어도 무관하다고 볼 것이다. 다만 그 근거가 지닌 가려진 양면성 때문에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없을까.

그러나 이러한 불확정성이론의 배경에 형이상학(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잠복되어 있었다. 어떤 형식적 체계도 그것이 무모순인 한 불완전하다는 것, 또는 어떤 형식체계가 일관성이 있다해도 그 증명은 그 체계 속에서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은 데리다의 생각과 지척에 있다. 니체보다는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사물의 근거 없음을 교묘히 주장한 데리다의 이론은 근거(근원, 기원)에 대한 전면부정이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의심함이라는 점에서 괴델의 불확정이론과 분리시켜 논의하기 어렵다.

「난장이…」이후의 우리문학이란 어떠한가. 이 물음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마르크스사상의 붕괴이후의 우리문학의 상황을 묻는 일에도 연결된다. 여기서 아이러니칼함이란, 마르크스주의의 붕괴가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리얼리티를 부여했음에 관련된다. 그 리얼리티를 3가지 범주로 정리해 볼 수 없을까.

(A)무의식의 언어층과 후기구조주의가 갖는 리얼리티

인간이 언어적 동물임은 소쉬르 이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이 말을 가졌다는 바는 이 사실이 동물과 구별되며, 이 말이 만들어낸 의식의 과잉때문에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운명지어진 존재다. 동물적 본능도식에 틈이 생긴 원인이 이것이었다. 이 과잉에서 빚어진 삶의 에너지가 생물학적으로 분절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이것이 걷잡을 수 없는 인간욕망의 정체이다. 인간의 스스로 만들어낸 이 과잉(혼란)을 언어화(이미지화)하는 질서발생의 장소란 어디이며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쉽사리 무의식의 언어층을 생각해낼 수 있다.

인간은 모두가 무의식의 공통된 구조물을 갖고 프로이트·라깡의 사상이 그것. 소쉬르가 제기하고 야콥슨이 정식화한, 언어의 연사관계와 연합관계 곧 유사성(메타포)과 인접성(메토니미)이 표층적 언어의 도식이라면, 심층에서의 이러한 두 관계는 어떻게 될까. 심층에서는 이 두 관계가 서로 중복되거나 섞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의미발생의 장면이 벌어지는 장소가 거기일 터이다. 광기의 언어와 예술의 언어가 이 장면에서는 동일한 발생근거를 갖는다. 이 둘이 어떻게 분화되어지는가에 대한 연구는 프로이트이래 널리 알려져 있는 승화개념으로 설명된다.

요컨대, 글쓰기의 기원을 묻는 일은 이러한 시선변경을 필요로 한다. 크리스테바의 업조션이론도 결국 이러한 심층의 범주에서 글쓰기의 기원을 찾는 방식의 하나가 아닐 것인가.

신인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의 등장이 흔쾌한 것은 그것이 글쓰기의 기원을 묻고 있음에 자각적이라는 사실에서 말미암는다. 경마장이란 무엇인가. 말이 섹스를 의미한다든가 경마장이 자본제 사회의 욕망의 상징이라 보는 것은 피상적 관찰이리라. 경마장이란 한 인간의 심층에 있는 글쓰기(의미 발생)의 기원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광기와 혼란에서 질서를 부여받는 장소에 다름아니다. 존재와 언어의 타협이랄까 에로스적 관계에 다름 아닌 것. 이 점을 뺀다면 「경마장…」은 조금도 낯설거나 이상하지 않고, 따라서 정상적 고전적 독법이 가능할 따름이다.

5년만에 귀국한 한 인문과학도의 눈에 한국현실이 비현실로 보이었을때 비로소 글쓰기의 기원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났던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의 불가능성이란 저 심층이 의미창출의 장면에 다름 아니었던 것. 중요한 점이 이것에 있는 만큼, 꼼꼼한 묘사(대구의 자기 아버지 집의 기물묘사 따위)라든가 같은 장면의 되풀이라든가 『X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고 했다』식의 보고(정보)용의 언어용법 따위란 한갓 장식음에 지나지 않는 것. 이로써 이 작품의 새로움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글을 써야하되, 어떤 현실적 이유도 없을 때, 이러한 경마장이라는 근거 창출없이 어찌 가능할 것인가. 사회변혁의 글쓰기 자기실존(외로움)을 위한 글쓰기 따위의 범주와는 다른 글쓰기의 이유설정이 한 신진작가에 의해 비로소 솟아올랐을 때 놀란 것은 한국문학의 관습쪽이었다. 「경마장…」의 출현이 신선했음은 그것이 자족적인 글쓰기였던 까닭이며, 그것이 모든 그동안의 목적성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불쾌함의 일종이기도 하였다.

(B)기호론 수준의 글쓰기 범주의 등장.

텍스트의 쾌락으로 정의된 바르트의 이론은 이미 구문에 속할 터이나, 소비사회에 있어, 원전의 무의미성에 대한 인식은 널리 퍼져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텍스트의 쾌락은 엄격한 자기통제에 의한 것이어서 허무주의에로 치닫지 않았다. 이에 비할 때, 생산개념의 종언을 선언한 보드리야르에 이르면 모든 것이 허구로 돌변하는 듯한 느낌이다.

복제예술의 시대를 지적한 것은 30년대의 벤야민이었으며 이를 80년대 소비사회에 적용한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기호체계의 닫힌 원으로 본다. 모든 것이 기호적 원환 속에서 전개되는 만큼 흡사 거울로 된 방속에 있는 형국이 벌어진다. 무한한 반사운동의 되풀이가 그것. 이러한 거울의 방속에서의 사람과 사물의 무한한 반사를 그는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 부르고 이 과정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통틀어 시뮬라클(Simulacres)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서로 비추기 때문에 진짜와 복사의 구별이란 없다. 결국 모든 것이 복사의 복사이며 만물이 끝내 완전한 시뮬라클이다. 생산이 끝났음이라 선언된 것은 이런 장면의 출현을 가리킴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드리야르식의 현상이 우리는 과연 부분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이런 현상이 근거의 상실 도한 결정 불가능성의 정리에 걸려 있음도 어느 정도 인정된다. 기호의 세계속에 둘러싸여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현상 속에서라면, 그 리얼리티가 어느 수준에서 부각되리라.

신진작가 하재봉의 「318W. 51st」(문예중앙, 1991. 겨울호)가 등장한 것은 이로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주민등록번호로만 말해지는 인간의 체계를 그려낸 신인 구병천의 「포유강 사람속」(문학정신, 1992. 신인상)도 그나름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620306-6894710이라는 사내와 620928-2486451 및 651209-2947302이라는 두 계집 사이에서 이런 저런 일이 벌어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요컨대, 기호로 된 방안에서 모든 것이 벌어지고 따라서 어떠한 의미의 생산개념도 스며들 틈이 없다. 기호의 제국 속에서 포로가 되며 오도가도 못하는 인간이란 스스로 기호의 일부가 됨으로써 어떤 쾌락을 얻는 것일까. 그 쾌락놀이는 자기소멸에까지 이어질 뿐이다. 「작가는 죽었다」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측면이란 「독자도 죽었다」가 아닐 수 있을까.

(C)모방에서 표절에 이르는 글쓰기의 한 유형.

「산문예술가는 남의 말들로 가득차 있는 세계 속에서 진전하며 그 말들 가운데 자기를 찾는다」(바흐찐, 「도스토예프스키시학」, 정음사, (김근식 역))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한 언어공동체의 어떤 구성원이라도 그가 발견하게 되는 말들은, 남의 평가와 원망의 방향에서 벗어나 있는 언어학적인 중성적 말이 아니라 남의 목소리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러한 말들이라는 뜻으로 위의 글이 읽혀진다. 곧 그가 말하는 문맥속에 있는 어떤 말도 이미 남의 해석의 자국이 남아있는 다른 하나의 문맥에서 유래한 점이다.

이러한 지적이 원론적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곧 언어를 사용하는 한 이러한 덫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포박되는 것이다. 만일 예외가 있다면, 크리스테바적인 업조션의 장면 또는 심층에서 벌어지는 연사적인 것과 연합적인 것의 중복에서 생겨나는 창조적 의미단위뿐일 터이다.

산문예술에서 사용하는 모든 말들엔 타인의 흔적(목소리가 묻은)이 찍혀있다함은 의미전달을 겨냥하는 어떤 글쓰기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나마나한 지적이 아닐 수 없는데도 굳이 이런 지적이 나온 이유란 무엇일까. 간단 명료하다. 어떤 작가도 다른 작가의 이미 존재하는 작품에 「따라서」 또는 「반대해서」글을 쓰기 때문. 어떤 작가도 펜을 잡을 땐 「누구의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글쓰기가 얼마나 자각적 의도적이냐에 있다.

가령 짜깁기로 일관한 경우는 어떠할까. 짜깁기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미층이 형성될 수도 있으리라. 기호놀이에서 오는 쾌락이 거기 꿈틀거릴 것이고, 이를 두고 순수한 기호놀이라 부를 것이다. 한편, 작가의 의도적인 짜깁기도 있을 수 있으리라. 표절의 시비가 벌어지는 장면에 닿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기호놀이는 일종의 음모랄까 전략의 범주에 드는 것이리라.

「내가 누구인지…」(이인화, 1991)라든가 「살아남아…」(박일문, 1992)을 위의 어느 문맥에서 판독하느냐에 관해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울지는 모르나(저널리즘 수준에서 여러 논의가 이미 있었던 모양이나) 요컨대 이러한 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논의자체가 리얼리티를 갖고 있음에 있다.

6. 세계인식 - 창조개념과 모방개념

만일 어떤 특정작가의 세계인식의 모방을 문제삼을 경우엔 사정이 썩 달라진다. 세계 인식의 과제란 반영론(기호의 반영이든 현실의 그것이든)과는 구별되는 영역인 까닭이다.

(가)『엘레베타의 도아가 잠기는 슛하는 콤프렛샤의 소리를 등뒤에서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아파트의 복도를 도아를 향해 16보 걸었다. 눈을 감은 채 정확히 16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양을 찾는 모험」)

(나)『나는 이런 인간의 존재이유를 테마로 하여 짧은 소설을 쓰고자 한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나는 인간의 레종·데뜨르에 대해 생각해 왔고 덕분에 기묘한 성벽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못배기는 버릇이 그것. 약 8개월간 나는 그 충동에 쫓겼다(…)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969년의 8월 15일에서 다음해 4월 3일까지 나는 358회의 강의에 출석했고 54회의 섹스를 했고 6,921개비의 담배를 피운 것으로 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그대는 20세 무렵 무엇을 했나?」』

「여자에 빠져 있었지」

「그녀는 어찌되었나?」

「헤어졌지」』(「1973년의 핀볼」)

16보라는 숫자의 정확성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루키에 있어서는 16보라는 전혀 임의인 숫자이다. 사건의 임의성의 감각이 이로써 부여된다. 쌍자의 자매의 이름이 208과 209임도 같은 감각의 표현이다. 많은 작가들이 날짜를 생략함으로써 작품에 일반성이랄까 보편성을 부여코자 했다면 하루키의 경우는 이와 썩 다르다. 특정한 날짜 속에 작품을 배치하기가 그것.

이러한 일이 역사적 의식의 드러냄이 아니라 그것의 없앰을 겨냥한 전략이었음이 판명된다. 말하자면 4.19라든가, 1980년 5월 또는 6.29라는 날짜란 그에게는 전혀 사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세계란 임의의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가의 생각인 까닭이다.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여러가지 세계의 일이나 현상·사건·존재 등을 편의점으로 생각하는 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내가 편의적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물론 그러한 경향도 없지는 않으나, 편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정통적인 해석보다는 그 사물의 본질의 이해에 한층 가까워지는 것 같은 경우가 세상에는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이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한 편의적인 시점에서 사물 바라보기를 작심하고 있다. 세계란 실로 다양한, 분명히 말해 무한한 가능성을 머금고 성립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능한 선택은 세계를 구성하는 개개인에게 어느 정도 맡겨진 형국이다. 세계란 응축된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커피 테이블이다.』(「세계의 끝장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SF에서 말하는 가능세계론과 같은 것이 아닐까. 세계란 어떤 공리체계로 이루어진 만큼 다른 공리체계를 선택한다면 별세계가 가능하다는 것. 유클리드기하학이 정당하다면 비유클리드기하학도 정당하다는 것. 이는 수학에서 일찌기 증명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유클리드기하학의 제5공리인 평행선은 교차하지 않는다는 공리체계가 우주공간에서는 성립될 수도 있다. 「기하학의 기초」(1899)에서 수학자 힐버트가 설파한 논리 곧, 기하학에서는 사용된 용어가 점·선·면 등이지만 그것들이 공리들을 만족하는 것들이기만 하면 맥주, 컵, 의자 또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과 흡사하다. 형식주의의 창시자 힐버트의 논점은 커피 테이블로서도 기하학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M.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박세희 역) 어떤 공리를 선택하면 유클리드기하학이 되고, 다른 공리를 선택하면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된다. 유클리드기하학이 정당한 한 비유클리드기하학도 정당함이 증명되기에 그것은 그러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우리는 곧바로 괴델의 저 불확실성정리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곧 이 세계에 소속된 자기가 마치 외계인인양 초월론적으로 이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에 마주치게 되는, 그러한 패라독스가 그것.

하루키라는 작가가 이 역설 앞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문제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마도 그는 독아론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그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글쓰기의 방식이 세계인식에 대한 시선변경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인식에 대한 시선변경이 인식론적 전환에 속하는 만큼 그것의 부분적 모방이나 도입은 당초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것이다. 만일 인식론적 과제를 문제삼을진대, 그것에 대한 모방개념은 성립되기 어려울 터이다. 그것은 이미 모방개념이 아니라, 인식의 공유 개념에 해당된다. 이 공유개념을 두고 모방(표절)이냐 아니냐를 문제삼는 것은 다분히 그 문화풍토의 감각에 속하는 사항일 터이다. 이 감각의 촉수가 바로 리얼리티를 결정할 것이다.

7. 초월론적 시선을 향하며

그렇다면 리얼리티가 전부인가.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수용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당신이 강조하신 것처럼 나는 「글쓰기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또한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없다.』(「입장들」)라고 데리다가 잘라 말했을 때 물론 그는 주체가 지고의 고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주체란 없다는 뜻이었으리라. 그가 서 있는 곳은 아마도 초월적(Transcendent)이 아니라 초월론적(Transcendental)인 시각이었을 터이다.

『철학을 탈구축함이란 역사적 유래로써 구조화되어 있는 철학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가장 충실하고도 내재적으로 작업을 하는 한편, 철학에서는 이름지을 수도 없고 기술할 수도 없는 어떤 외부의 시각에 서서 이 철학적 개념의 역사가 어떤 이익에 매달려 억압을 감행하여 스스로를 역사이게끔 하는 동안에 은폐되거나 배제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에 있다.』(「입장들」)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그가 강조한 「외부의 시각」을 문제삼을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입장 일체를 스스로 깨부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보면 그는 니체와 닮아 있다. 니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을 비판하고, 그것이 인도·유럽 언어의 문법에서 말미암는다고 했다. 곧 주어가 없는 언어인 우랄·알타이어 언어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고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경우도 주어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주체가 소멸되는 경향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닐 뿐 아니라, 사고가 언어에 의해 규정되고 만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니체의 이러한 비판은, 단지 서양의 근대철학에 있어 자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 주체라는 개념이 실망은 문법 혹은 어떤 체계에 의해 규정되었음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초월론적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니체에 의한 주체의 비판은 칸트적인 의미의 비판이다. 그것은 주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가 어떤 구조에 있는가를 밝힘에 있었다. 또 이것은 정작 경험적 심리적 주체를 부정(괄호에 넣기)한 데카르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진실이란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또는 개인의 심리적 상황에서도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정리하고자한 방식이 초월론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르트모양 「작가는 죽었다」라는 표현이나, 나아가 각도를 달리 하여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체(독자)도 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는 어떤 해석에 대해 그것을 부정하고 다른 별개의 해석을 제시함이 아니라 그것에 대립할 수 있는 해석을 같은 텍스트에서 이끌어 냄으로써 그 결정불능성에 의해 어떤 해석도 성립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저 칸트의 형이상학의 비판에 흡사하지 않겠는가. 이는, 「세계는 시작이 있다」라는 명제를 두고, 그 반대명제를 증명함으로써 안티노미에 몰아넣고, 그러한 문제자체를 무효화시키는 논법이다. 이는 초월론적인 것이다. 이 초월론적인 것이 바로 데리다의 시각의 아닐 것인가.

소비사회가 포스트모던한 상황이라 할 때 과연 이러한 초월론적 시각에서도 그러한가. 이러한 질문은 자본제시스템을 불패의 제도로 쓴 보들리야르나, 그것을 최종적 사회조직의 단계로 보는 들뢰즈에 향해 던져질 수 없을까. 만일 자본제제도가 그러하다면, 그것을 향한 저항이란 죽음이라든가 광기로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이 현저한 비관적 허무주의란 과연 사실일까. 개인(유적 본질)과 사회(일반성)의 관계란 적대관계로 요지부동이며 그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까지 우리가 이르렀다면 시선의 변경이 요청될 것이다.

사회(타자)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서는 무엇보다 사회(세계)를 바꾸어야 하고 또 바꿀 수 있다는 생각(시선)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현실적(종래의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음은 어느 수준에서는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적 본질(인륜)이 달성될 수 있는 새로운 방도가 모색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철학이 당면한 과제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는 과제가 아닐 것인가.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개혁 의지가 이른바 니체가 말하는 「르상티망」에 뿌리를 두는 한, 순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유토피아라는 일정한 목표를 설정하는 한 그것은 새로운 억압 작용을 할뿐이다. 시선 변경이 요망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반란이나 혁명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의미하는 것은 사회라는 관념이, 본래적으로 미나 에로스 모양 인간에 있어 초월적인 욕망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아닐까라는 시선이 요망된다. 곧 사회라는 관념이란, 인간의 실존(절망과 고독에 의한 비연속성 속에 폐쇄된 인간)에 있어 기초가 될 수 있는 최후의 가능성으로 나타나는 타자와의 상호 이해에의 믿음이라는 것.

사회란, 인간의 실존을 극복할 수 있는 환각의 일종이라는 것. 죽음에 직면하는 모든 인간이 자기의 불연속성에 대한 극복 방식(공포)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사회」라는 시각. 이러한 시선 변경이 아직 미정형 상태라 할지라도 음미, 모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일 터이다. 포스트모던한 상황의 비판이나 초극에 대한 논의도 이 과제의 음미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