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성작가의 서간체소설에 대하여
김경수 / 문학평론가, 서강대 강사
서간체 소설은 간단히 말해서 일상 생활에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편지 형식을 소설의 주된 이야기 방식으로 취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설을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 양식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초기 소설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설의 양식으로 논의되는데, 그 이유는 서간체 양식에 대해 작가와 독자 모두가 갖고 있는 선험적인 의사소통 회로의 안전성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편지라는 양식은 편지를 쓰는 이의 내밀한 자기고백, 그것도 그 신빙성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진실한 글쓰기라는 관습적인 묵계가 있는 탓에, 작가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별다른 소설적 기교를 쓰지 않고도 안전하게 건넬 수 있고, 또 최소한의 의사소통 상황을 보장받을 수 있는 다소 편리한 양식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서간체 양식은 서구의 경우는 루소의 「라 누벨 엘로이즈 La Nouvelle Heloise」가 그 장르의 대표적 작품으로 논의되어 지속적인 틀의 위상을 획득했는데, 이같은 사정은 우리의 문학사를 뒤돌아 보아도 그리 낯설지 않은 양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문학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초기 신문학시기의 춘원과 염상섭, 그리고 나도향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초기작품 활동에 있어서 이같은 서간체 양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작가들의 직접적 발언이 없어 그들이 서간체 양식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렵지만,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전혀 이질적인 문학양식을 마련해야 했던 초기 신문학기의 작가들이 서간체 양식의 문학관습적 이점을 감안했음직한 개연적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두 편의 서간체 소설 여성장르의 효용성 제기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학의 전개 과정이 그렇듯, 우리 소설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서간체 양식의 소설은 점차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 예로 우리는 기껏해야 이문열의 「타오르는 추억」이라든가 더 이른 시기의 박태순의 「작가지망」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 그밖에 별다른 예를 지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서간체 양식의 효용성의 문제와 직결된 것일텐데, 해서 우리는 오늘날 예외적인 경우에만, 그러니까 소설속에서 또다른 화자 시점이 요구되거나, 아니면 뜻하지 않은 정보를 개입시켜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해서 지금은 서간체라는 말 자체가 오히려 낯설게 들릴 만큼 그 양식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어 있는 형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신경숙과 이나미가 발표한 두 편의 소설은 예외적인 신선함을 던져준다. 그것은 이들 두 편의 소설이 모두 서간체 양식으로 쓰여진 소설이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여성화자가 자신의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고백, 혹은 그러한 관계에 놓여있는 여성화자들 자신의 정신적인 고백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여성장르로서의 서간체의 효용성의 문제를 함께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내용에 있어서 이 두 편의 소설들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성화자가 고향마을에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글인데, 그 과정에서 화자는 자신의 처지와, 그리고 어릴 때 잠시 자신의 어머니 자리로 들어왔다가 끝내는 물러가고 만 한 때의 의붓어미의 삶의 궤적을 더듬으며 그것과 자신의 삶의 현실을 같은 선상에서 살펴보는, 이른바 운명적이라고나 해야 할 삶의 양식을 그리고 있으며, 반면에 이나미의 「'향기'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불구인 여성소설가가 자신의 습작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평론가인 유부남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하지만 신경숙의 소설이 그러한 운명론적인 실존의 양상에 대한 연민과 이해불가능한 삶의 처지에 대한 의문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반해, 이나미의 작품은 주된 초점이 불구자인 여성화자의 긍정적 자기 확인의 과정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분위기와 주제상의 차이를 내보이고 있다.
서간체 특유의 장점 살려 소재상의 진부함 극복
하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편의 소설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두 편의 소설은 자칫하면 진부한 사랑이야기로 떨어질 수도 있는 미혼여성과 유부남의 사랑이라는 테마를 다루면서도 전혀 진부한 느낌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안심시킨다.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이 이들 소설들로 하여금, 그 소재상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주제상의 신선함을 획득하도록 해주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그 답으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서간체 양식만이 누리는 나름의 장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서간체 소설을 읽을 때 독자로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점을 화자의 시점과 일치시킴으로써, 화자가 전하는 이야기를 일단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입장에 놓여 그 진지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독서를 행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들 소설은 서간체 양식을 취하되, 실제로 화자가 편지를 쓰는 시간보다 월등한 시간적 비중과 의미를 갖는 오랜 시간의 삶의 흔적을 함께 담고 있고, 또 그것을 쓰고 있는 화자 자신이 이미 글을 현재의 시간대에서 과거의 시간대를 회고하고 현재화해서 그 의미를 숙고하는 자기분석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까닭에,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과 얽혀 있는 이야기 사건이라는 허구의 맥락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거리조절에 성공하고 있다. 이들 두 편의 소설은 서간체 양식을 빌어 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또 그러해서 직면하게 된 피치 못할 감정적 무화(無化)라는 단점을 적절히 보충한 경우라고 보이는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전달 방식으로 다소간 구시대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서간체 양식을 적절히 사용해 효용성을 높인 점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간체가사의 전통 살린 여성장르의 개척기대
뿐만 아니라 이 두 편의 소설은 화자도 그렇고 작가들도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전통적으로 여성 장르로 이야기되어 온 서간체 양식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조선조의 수많은 내간체 가사들이 보여주었듯, 그리고 공적인 문학 현장에서의 의사소통 매체는 아니었지만, 서간체 양식은 비교적 현재까지도 이어지면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장르였고 또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 요즘 페미니즘의 이론적 이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날로 높아감에도 여성장르로의 실제작업은 부진하다. 이런 점에서 이 두 편의 여성작가가 제기하는 여성경험의 표현양식으로서의 서간체 소설이라는 문제는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제 두 편 정도 발표된 현상을 토대로 최근의 여성문학이 관심가져야 할 문제라고 단정하는 것이 시기상조적인 발언이기는 하지만, 시각을 조금 넓혀보면, 우리는 작년 이맘때 쯤 발간된 박완서의 「저문날의 삽화」까지를 한데 묶어서 논의할 수가 있다. 비록 「저문날의 삽화」연작은 서간체는 아니지만, 그 작가 또한 여성작가이며, 그리고 독자와의 사이에 허구의 공간을 상정하고 그에 대한 축조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쓰기와 그리고 그로 인한 의사소통회로와는 다른 양식(삽화양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적어도 작가가 소설의 허구적 화자와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글쓰는 인물로서의 면모를 다소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이들 소설들은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삽화양식을 표방하고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며 자유롭게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박완서의 인물들이 그렇거니와, 신경숙과 이나미의 서간체 소설들 또한 일방적인 작가편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서간체 양식의 고유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게 화자 자신을 독자와의 직접적 만남과 대화의 자리를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경숙과 이나미의 두편의 소설은 여성 장르로서의 서간체라는 시각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내포작가(물론 이 말은 소설의 전체 내용을 이루는 편지의 원 필자를 의미한다)의 직접적 드러남이라는 각도에서 폭넓게 고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를 자신이 서간체 양식과 여성경험의 글쓰기의 관계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서간체가 다시금 여성장르로 부활하고 있다는 것은(물론 섣부른 판단인지도 모르지만), 그 문학적 성취도의 문제와는 별도로 점차 소설의 생존방식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하나의 의미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 이러한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설을 통해서 기존의 소설사의 흐름을 의미있게 유기적 틀로써의 장르에 대한 인식은, 요즘 같은 때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식이라는 생각을 이 두 편의 소설을 통해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