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춤의 해 하반기 알찬 수확들




김영태 / 시인, 무용평론가

'92 년에 우리는 손인영이라는 무용가 한 사람을 무대에서 관찰하게 된다. 손인영은 '91년 「우리 춤·1」을 소극장 무대에 올렸고, '92년 3월에 현대무용「어제, 그리고 오늘」, 6월에 「황사」를, 그리고 3년 예정으로 뉴욕대학원에서 공부하러 가기 전 「우리춤·2」를 마련했었다.

손인영이 「신동아」지 오늘의 무용가 난에, 한국일보 계획 미래의 무용가 선정난에 오른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말이 많은 세상이라 「손인영이 뭐길래?」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신동아」지는 한국일보 미래의 무용가난에 그가 오른건 그만큼 평론가 무용가를 위시한 선정위원들이 손인영의 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인영은 83년 신인 콩쿨 대상을 수상하고, 85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지만 국립무용단을 그만두기까지 5년간 빛을 보지 못했었다. 90년 난무 「틀벗기기」는 그래서 그의 진로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준다. 우리춤 보여주기(91년)는 새로운 손인영을 탄생시켰다.

「우리춤·2」(11월 2·3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손인영은 한영숙류 「승무」를 30여 분 춤추었다. 30여 분은 맛보기 승무하곤 다르다. 승무의 도전인 셈이다. 민속무 정수는 승무가 아닌가. 승무에는 멋과 품위와 기품이 있다. 한영숙류 승무는 후반에 가서 북가락(이매방류)이 융합된다. 손인영의 「승무」를 보면서 나는 대작다운 그리고 맛깔스러움과 보다 넉넉함을 체험한다. 「승무」속에는 손인영의 배움과 그 배움을 스스로 터득한 신명이 있다. 북가락을 융합시킨 것도 그의 배움의 터득일 듯 하다. 그러나 손인영의 「승무」는 도무지 흩어지지 않는 차가움과 의연함이, 북가락이 소구칠 때 마음의 허(虛)를 뎁히는 아주 넉넉한 반경이 넘쳤다.

「태평무」는 8분여의 춤. 손인영이 춤출 때 발디딤이 산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춤을 보면서 나는 이런 메모를 했었다. 「발디딤은 산보, 숨겨있는 화려함, 비가 지나가는 화사함」그리고 태평무 노오트를 본다. 「남치마작막 밑으로 내비치는 빠른 말놀림이 한 그루의 난처럼 현란하다」내가 산보(발디딤)와 만난 건 이건 이치와 흡사해 만족했다.

손인영은 우리춤 1·2를 마련하면서 「사계」에 손을 댄다. 「사계」중 「봄」(정지해·함정은)이 그 첫 번째 안타. 이 춤은 봄의 풍경화로 한영숙과 김수악의 춤사위를 안무자가 교접시켰다.

손인영의 「살풀이」를 보면서 나는 그가 춤에 입문한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보는 듯 하다. 흰 저고리 치마에 자주 고름은 대체 저 서럽디 서러운 지체의 정중동을 정한수 한 모금으로 풀고 달래기에 족하다. 팔의 곡선이나 뒷모습 때 수건을 허공에 던지는 저 미열의 나브작한 공기, 그 안의 서럽디 서러운 진동을.

「살풀이」의 쉼표는 춤 안에 작은 정거장을 마련한다. 초반에 그는 살을 다잡다가 푼다. 손 내리고 빈 허공에 드는 수건, 그 무심함 속에 자기 운명을 손인영은 죄다 풀다 감다 내쳐 놓아버리지 않았던가.

11월 3일 김수악의 장고, 구음으로 손맞잡은 손인영의 「전통굿거리」는 백미였다. 김수악에게 증손녀뻘인 손인영의 애띠였다. 김수악의 구부러진 등과 주름살, 입가의 세월을 견딘 미소는 뜨듯한 아랫목 같았다. 전통 굿거리는 김수악의 느린 구음과 옆에서 초치는 피리와 또 한 고개 넘어가는 장고가락 대문에 기방(妓房)이 아닌 무형문화재 손에 이끌려 나온 손인영이 마치 수양버들처럼 한껏 한 자리에서 육신의 실을 뽑아내는 듯 했다. 대가와 증손녀의 만남은 그래서 더없이 훈훈하고 사제지간의 정리를 떠나 굿거리「맛」에 흠씬 젖게 된다.

작품소화의 천부적 능력 姜秀珍의 발레

한민족 춤제전(11월 13·18 문예회관 대극장)때 강수진은 이반 카발라리와 2인무 두 작품을 보여주었다. 강수진이 출연하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본 것은 2년전 동경 무대였다. 그때 그는 쉬투트가르트 발레단 훠스트 솔로이스트였다. 세 명의 독무자 중에서 강수진은 주역 다음이었는데 92년에 그는 쉬투트가르트 발레단 주역으로 부상했다. 세계 6대 발레단중의 하나인 쉬투트가르트 발레단 주역이란 영광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발레사에서 최초의 쾌거이다. 그동안 김해식이 캐나다 발레단에서, 문훈숙이 워싱턴 발레단에서 솔로이스트를 맡은 적은 있다. 작년에 문훈숙이 레닌그라드에서 안드레 리에파 파트너가 된 것은 주역이지만 초청에 의해서였다.

강수진은 93년 1월 29일, 「로미오와 줄리엣」무대에 첫 주역으로 데뷔하는데 한민족 춤제전 때 2인무를 춘 파트너 이반 카발라리는 로미오 역을 맡을 이태리 출신 약관의 스타였다.

강수진은 11월 13일 이반과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 하이라이트를 춤추었다. 테크닉과 호흡면에서 더할나위 없는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강수진의 강점은 고전발레든 모던발레든 작품을 소화하는 천부적인 능력이었다.

1미터 68센티라면 한국여인의 표준 키보다는 큰 키인데 그의 지체가 발산하는 균형감은 이상적이었다. 특히 11월 14일 이반과 춤춘 2인무 「구름」은 유리 킬리안이 안무한 작품이다. 드뷔시 음악 「세 개의 야상곡」에 맞춘 이 작품은 구름이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상들을 몸짓으로 표현한다.

2인무중에서 두 번, 이반이 강수진을 리프트한 뒤 거꾸로 들린 지체를 한 손으로 이반이 천천히 하강시킨다. 그것은 흩어진 구름 조각이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중량을 초월한 테크닉이다.

킬리안의 안무가 신선한 것은 이런 상상력의 엷음과 느낌, 두 자체가 만날때에 더움과 서늘함, 가령 강수진이 앉은 자세에서 회전시키는 각선의 돌출, 또는 지체의 동떨어짐을 끌어당기는(아마도 구름 형상) 방향과 밀착, 그것이 킬리안의 감각적인 시요, 강수진과 이반 카발라리가 연기하는 독특한 개성이라 할 것이다. 93년 데뷔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존 크랑코 안무)은 전막이라 이런 두 지체의 앙상블을 요한다. 「구름」은 모던 발레로서 강수진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였다.

시적 긴장감과 악마적 도전 미나유의 춤세계

11월 15일 미나 유(유정옥)와 미하일 프러커 2인무 「타르 베이비즈」를 보았다. 이 작품은 미하일 프거커의 안무한 작품.

나무판으로 무대를 압축시킨 흑백과 백색의 대비(두 사람의 의상도 흑백이다) 내려온 사다리 사이 벌거벗긴 인형들, 미나 유가 작업하는 시멘트 구멍을 뚫는 공구, 어떤 암울함 속에 그러나 서로 핵심적 질문이나 대답 같은 것도 아닌 소리를 주고받기… 폭발적 충동적 2인무의 상승, 미나 유는 프러커의 팔에 걸려 3백 6십도 회전도 하고, 베니아 나무판 위로 몸을 거꾸로 솟구치기도 한다.

미나 유가 독일의 쾰른 현대무용단, 부퍼탈 댄스 씨어터에서 활약했으며 미하일 프거커가 유럽에서 촉망받는 신예로 알려졌듯이 두 사람의 2인무는 매우 연극적이고 첨단적이며 그 속에서 때로는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을 준다. 그것은 두 사람의 역량이 어떤 평면도 가만두지 않고 요철을 만드는 「시적 긴장감」「악마적 도전」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나 유의(검은 브래지어 간간히 비치는 상처받은 신선함) 독특한 강인함과 프거커의 광폭한 날샘은 「타르 베이비즈」(안무 노트에 의하면 남녀의 시각차?)의 주제가 「상실」임을 관객들이 체험케한다. 모래의 언덕에서 바람을 만나 그 바람이 우리살을 후려치며 파고드는, 지척간의 두 사람이 쏟아내는 숨결과 박동!

그것은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답다.

群舞의 서정 돋보인 「우수영의 圓舞」

광주에서 만난 초연 무대, 광주시립 무용단 박금자 안무 「우수영의 원무」는 역사물의 한계를 극복한 군무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명장 이순신의 주제가 어떻게 발레화될지 그것은 미지수였는데 2막 4장의 창작 발레는 그런 선입견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박금자는 이번 안무에서 발레의 드라마를 지양하고, 군무의 서정을 강조했다. 강강수월래는 여태까지 우리가 만난 민속춤이었다. 그러나 「우수영의 원무」1·2장, 한산도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36명의 원무는 3등분된 원무가 다시 발끝으로 감기며 풀리며 물결을, 고랑을 이루듯 장광이요, 처녀들이 뿜어내는 물의 고향의 서사시였다. 강강수월래 군무는 2막 달밤에서 흰옷을 입고 스카프를 걸친 정령들이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가(悲歌)」로 마무리된다.

1막의 춤 보행(步行)에 비해, 거북선이 등장하는 2막의 드라마가 비드라마적 요소를 상쇄해주었다. 박금자의 안무 감각은 왜적을 물리친 역사물속에 발레점경을 수놓는 작품이었다. 1막 신민경·유언이·박선희의 3인무, 서민대열의 선봉 문 영의 상큼한 솔로, 이순신으로 분장한 오금택·김유미의 듀엣이 그렇고, 2막에서 바이올린과 하프 2중주에 맞춘 신민경·오윤환의 사랑의 2인무는 압권이었다.

이순신의 아들로 등장해 아버지 유언대로 구국의 선두에 선 오윤환은 문영의 상대역이었던 박 일과 함께 이 무용단의 재목감들이고, 전막을 누비는 박선희의 눈부심은 그의 앞날을 지켜보게 한다.

「심청」이후 최동선의 발레 음악은 특히 현(絃) 파트가 출중했는데 파스텔조 색상의 로즈 의상도 군무의 서정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