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 부산

부산 출판문화의 어제와 오늘




최영철 / 시인, 부산지역 월간지「현장」편집장

부산에 등록된 출판사는 현재 280여 개에 이른다. 전국의 출판사가 7,000여 개인 것에 비하면 20%를 조금 웃도는 수치이다. 또 서울 대 지방의 비율이 대략 반반씩인 것에 비추어 보면 서울을 제외한 전체 지방 출판사의 10%에도 못 미친다. 그나마도 등록만하고 출판 행위를 아예 하지 않는 출판사가 서울보다 지방이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수치조차 믿을 것이 못된다. 문화의 서울 편중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제2도시로서 상당히 열악한 형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부산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있을 것이다. 부산 바닥에서 부산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번 사람들이 뭔가 의미있는 일에 돈을 풀 줄 알았다면, 그리고 부산에서 나온 책이 좀 못나고 딱딱한 내용이더라도 한 번 더 살펴봐주는 시민 의식이 있었다면 이보다는 좀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항상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우리나라 책만을 사보라는 강요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부산 시민이라고 부산의 책만을 특별 대우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다. 오히려 독자에게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책을 안 사 볼 권리가 있다.

역시 문제는 부산의 출판사들에게로 돌아온다. 최소한의 자본이며, 인력, 기획 방향 등의 선결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은 채 등록부터 해놓고 보자는 식이 태반이다. 또 인쇄업을 원활히 하기 위한 보조장치 쯤으로 출판 등록을 해 놓은 곳도 많다. 출판사 대표 스스로가 자신을 출판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정은 서울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진짜」보다 「가짜」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출판계 역시 지방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설움이 있고 의욕만으로는 넘지 못할 벽이 있다. 필자, 제작 시스템, 정보, 독자층, 유통망, 전문인력 등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심지어 지방 출판사의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총판이나 서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다. 앞서 활동했던 출판사들이 워낙 용두사미 꼴로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록 출판사 250여개 손꼽는 출판사는 극소수

부산 출판계를 놓고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는 주로 앞의 열악한 여건만을 강조해 왔다. 출판계 내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척박한 지방 문화」에 은폐되어 왔다. 심지어 『부산 독자들은 부산에서 나온 책이라면 무조건 사 보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얼마나 답답하면 이런 극언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을까마는 이같은 생각이 독자들을 설득하는 데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그만큼 부산 책들이 형편없다.』는 것을 역으로 일반에 홍보하는 꼴이 된다. 어느 할 일 없는 독자가 책을 고를 때, 판권에 나오 있는 출판사 소재지를 보고 사고 말고를 결정하겠는가?

일단 제작비를 확보해 놓고 들어가는 자비 형태가 아니라 전력투구로 개발한 기획물에 승부를 걸어 보고 난 뒤, 또는 판매에 필요한 광고와 영업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적도 없이, 가혹하게 표현한다면 “공짜로 얻은” 원고로 책을 꾸며 서점에 던져 놓았을 뿐인 상태에서 애향심에만 호소한다는 것은 앞 뒤 순서가 바뀐 주장이다.

이것이 대략 80년대 부산 출판계의 분위기였다. 겨우 사무실 한 칸을 마련해 지역 문인들의 자비 출판과 교지서부터 명함에 이르는 잡다한 인쇄물을 대행하는 것으로 푼돈을 벌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대부분의 운영 형태였다. 개중에 「시로」와 「부산문예사」(현 지평) 같은 출판사가 고질적인 제작대행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그 당시 몇 차례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전국적인 시장망을 갖추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기획물이 안는 모험보다는 장기적 전략으로, 여건의 성숙, 경험과 자본의 축적을 기대하며 자비 출판 쪽으로 원상복귀하는 제자리걸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출판사는 곧 인쇄소라는 등식을 깨고 제대로 꾸며진 단행본 출판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또 부산지역 중심이기는 해도 서점 영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두 출판사는 부산 출판계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부산에서 손꼽는 출판사는 「시로」「지평」과 더불어 「빛남」과 「해성」이 있다. 280여 개에 이르는 부산의 등록된 출판사 중에서 손꼽을 만한 출판사가 다섯 손가락 안에도 못 미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이들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는 새로운 바람은 부산 출판계의 서광을 보는 듯하다.

「빛남」은 최근 들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출판사다. 부산 출판계에서는 최초로 지난해 김종 시집 「아내라는 이름으로」에 대해 100만원의 선 인세를 지급했는데 이것은 아마 부산의 출판사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것이 제2도시 부산 출판계의 현실이다. 「빛남」은 그 뒤를 이어 정민기 시집 「비가 오면 그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를 이만 부 넘게 찍었다. 상업 출판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늘 고민하는 「빛남」의 자세는 최초의 프로다움이라고 평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다소 수그러졌지만 한 때는 월 수금액이 서울의 중급 출판사와 어깨를 겨눌 정도였다. 이렇게 생긴 여유로 부산의 시인 작가들 작품집을 다수 기획 출판하기도 했다.

「지평」은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문학 전공 교수들 덕분에 부산의 출판사 중에서 가장 방향성이 있어 보인다.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발간도 그러하지만 「지평신서」와 「지평문학이론총서」등이 지방 출판사답지 않은 무게와 일관성을 갖게 한다. 그러나 잠재된 여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장을 겨냥한 승부수가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

「시로」와 「해성」은 시집을 주종으로 젊은 경영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시로」의 업적은 80년대 초 부산 출판계에서는 처음으로 윤진상 창작집「하얀불꽃」을 기획 출판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출판사로서는 경이롭게 200종에 달하는 발간 실적을 올렸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거의가 동료 문인들의 책을 실비로 제작해 준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들끼리 대물림하여 10여년을 버텨오고 있어 끈질긴 생명력과 오기를 느끼게 한다.

부산 출판인협회 창립, 시의 적절한 대응 기대

대충 살펴 본대로 부산의 출판사들은 그 성향이 시집 위주로 문학류에 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출판사 경영이 소자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필진 역시 문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전국적인 출판사가 출현하려면 우선 자비 출판은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콧대높은 경영 방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아쉬운대로 운영 경비를 충당해 주는 자비 출판에 기대다 보면 자립을 위한 어떤 도전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정기간 그 줏대를 뒷받침해 줄 자본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최근 또 부산 출판계는 앞서의 네 출판사가 주축이 되고 「전망」「광야」「모아」「국제」「한나라」등이 합세하여 부산 출판인협회 창립을 서두르고 있다. 부산 출판계의 단합과 교류를 위한 모임이 전무했던 실정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내년 「책의 해」를 앞두고 대표성을 띠는 협의체가 절실하던 차에 시의적절한 움직임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이 기구를 중심으로 부산 출판계의 발전을 위한 여러 청사진이 제시되었으면 한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부산 독자들을 고무시키기 위한 신간안내, 서평정보지의 발간이나 저자와의 대화, 독서 캠페인 등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부의 체질개선을 위해 공동 출자에 의한 출판금고 설립과 유통 영업기구의 개설도 고려할 만 하다. 그리고 내년 책의 해에는 부산 출판계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세미나와 부산 책 전시회 등도 이들에 의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