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그릇」 빚어야 할 책의 해
이중한 / 서울신문 논설위원·출판평론가
올해는 책의 해. 세계적으로 드문 문화이벤트의 하나이다.
시의적으로도 적절하다. 우선 소박한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주장해오던 〈책을 읽자〉라는 구호에 대해 〈책의 해〉는 피할 수 없이 구체적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 책을 말해왔는가를 깨닫게 하는 계기를 갖게 할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를 더 부연하자면, 문화적 활성화를 위해 공공도서관 업무를 문화부에 이관해 놓고서도 아직 어떤 진전의 근거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소나마 거센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버리던가, 아니면 굿판이라도 벌여 꽹과리라도 두들겨야 얼마쯤 깨어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 〈책의 해〉는 책의 재인식의 해이기 앞서 책에 대한 근본적 몽매함의 각성의 해가 되어야 할 당위가 있다. 그 각성의 시점으로서 적절한 때이다.
또 하나 이보다 더 적절함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변화 속에도 있다. 정보화사회라는 흐름은 우리에게서 그저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그럭저럭 서로 쳐다보며 지내는」 낯선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정보화사회란 이미 시작된 새로운 삶의 조건이다. 이 매체는 모든 기존매체의 수용방식과 유통방식을 바꾸고 있다. TV와 VCR을 주니까 사람들은 녹화하기를 귀찮아한다. 그러니까 이에 대해 G코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보화사회의 행동이다. 사람들이 G코드 녹화에 익숙해지면, TV는 프라임타임을 잃게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만을 보고 싶은 시간에 재편집할 수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들이 직접적으로 책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정보적 기능의 측면에서 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복사기나 팩시밀리들도 책의 유통에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책은 다시 가장 고전적·교양적 의미로서의 가치를 생각케 하는 계기에 있다. 책 자체로서 문화적 창조성을 가진 책들만이 인간의 삶 속에 존재의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책의 편안한 친구〉를 책의 해의 지향으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책의 새로운 위상은 무엇이 될 것인가가 지금 세계문화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책의 모습과 전망을 정리하고 되새겨보는 일은 세계적 프로그램일 수 있다. 이 또한 1993년이 적절한 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의의와 그 실현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책의 해〉에 있어서도 여전히 늘 하던 대로, 〈책을 읽자〉라는 말이나 최고, 이왕 나와있던 책이나 좀더 팔아보자라는 태도로 한 해를 보낸다면, 또 혹시 그렇게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당연히 어떤 의의도 만들어 질 수 없다.
책은 우리에게서 지금 너무 비실제적으로 있다. 게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이 말했었다. 「책은 이세상의 가장 위대한 기적 중의 하나이니, 그것은 무형의 것. 정신을 담기 위한 실질적인 그릇이다. 책은 인간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말들을 기억 할 때 지금 우리의 책들은 우리의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가 아니라 그 나라 타 매체에서 받은 조그만 정신마저 상처를 입히는 도구라고 말해 과언 아니다. 진지한 내용의 책이 없어서도 아니다. 진지하게 만들어 내지를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책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경건함을 파괴한다. 〈책을 읽어라〉고 하면서도 〈그 책은 읽지 말라〉고 해야 할 책이 너무 많다는 것이 바로 이 증거이다.
〈책을 잘 만들자〉라고 하면서 쉽게, 값싸게 만들어 던질 수밖에 없고, 이마저 잘 전달되는 통로를 갖고 있지도 않다. 열심히 오래 힘들여 만든 책일수록 만들자마자 창고로 밀려들어갔다가 파지장으로 팔려 간다. 이런 가치가 정신의 그릇일 수가 없다.
알폰스 쉬바이게르트(Alpons Schweiggert)는 너무 간결하며 명료한 책의 정의를 내린다. 「책은 가장 편안한 친구이다」. 이 한 구절에서도 우리 책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지금 어떤 책이 진실로 우리의 삶 속에서 「편안한 친구」인가. 역사의 끊임없는 소용돌이와 또 그 소용돌이 사이의 과도기 속에서 우리의 책은 너무 많이 과격한 친구이고 언성 높은 친구였다. 낮은 목소리 쪽에서는 또 일차원적 감상주의와 낭비적 상품주의 속에서 책은 마치 순간적으로 달기 만한 사탕 알 같은 친구로 더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 좀 진지한 책들은 힘들고 어렵기 만한 친구처럼 인지되는 단계에 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되니까「편안한 친구」로서의 책은 그 이미지 자체가 성립되질 않는다. 이 결핍증상을 그러나 또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이것이 더 큰 책의 장애 일수도 있다.
「정신을 담는 실질적인 그릇」이며 「편안한 친구」로서의 책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 곧 〈책의 해〉의 지향이 돼야 할지 모른다.
의미도 기준도 찾기 힘든 「교양」과 교양서 목록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근자에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이 「교양」이다. 대학에서만 「교양과목」이라는 말이 살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교양」을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다. 「교양서」라는 것 자체의 기준마저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교양서 목록이라는 것이 또 있기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저곳에서 주어 모은 남의 나라 고전들의 묶음을 뜻한다. 예컨대 70년대에 미국의 학교도서관에서 추방해 버린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가 우리에게서는 아직도 필독의 세계명작으로 청소년에게 권유된다. 그런가 하면 「노자(老子)」는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읽을 수 있는 판본은 한 권도 없다.
이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책이 누구의 것이든, 책의 목록 같은 것으로 누군가의 교양을 알 길이 없어졌다. 공자를 읽은 사람이 교양인일까,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을 요약본으로 읽은 사람 역시도 교양인일까. 「토지(土地)」는 읽었어야 하는 걸까. 「장길산(張吉山)」을 안 읽은 것이나 「무정(無情)」을 안 읽은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프랑스 사람도 이문열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안 읽어도 되는 걸까. 이런 것으로 교양지수를 추적해 간다면 몇 명이나 교양인이 되는 걸까. 이런 물음들이 우리에게서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자〉라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교양적 독서의 문제가 아니고 단지 수사학적인 표어적 요구인가. 이 물음 역시 누구도 반성해 보는 일은 극히 드문 형편이다. 그러나 교양이란 이러한 책읽기를 통해서 사상적 개념이나 인문학적 상징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비유나 은유로 의사소통이 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책읽기는 명백하며 현저하게 피폐돼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에 『교양교육과 문학교육에 연관된 조사보고』가 하나 있다. 대학의 문학교육을 맞고 있는 국어국문학회 회원 93명을 대상으로 했던 이 조사 설문에 이런 것이 있다.
〈시 교육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답변은 다음과 같다.
-운율과 비유를 이해하게 하기 어려움. 48%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어려움. 19%
-정치의식 등의 문학외적 관심을 배제시키기 어려움. l2 %
-고전시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기 어려움. 15%
〈소설교육에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또 다음과 같다.
-기법을 이해하게 하기 어려움. 34%
-주제를 이해하게 하기 어려움. 8%
-많이 읽게 하기 어려움. 31%
-고전소설에 흥미를 유도하기 어려움. 8%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읽기 능력이 없으며, 읽을 것을 통해 은유나 비유를 이끌어 낼 활용력이 없으며, 그럼에도 시의적 정치적 연관짓기에는 쉬운 상태로 있는 것이 우리의 독서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책의 가치와 효용의 재인식 세계 출판계 절실한 현안
그러나 읽기는 그리하여 책의 효용은 이런 것이 아니다. 무슨 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삶의 과정 속에 책을 반려자로 함으로써 보다 충실한 정신적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이로써 일상적 삶에서도 힘을 얻고 의지할 수 있는 것으로 됨으로써 책의 문화는 존중되는 것이다.
이러한 책의 문화는 지금 우리에게 깨어져 있다. 무슨 책이든 단지 책은 읽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리고 이 대부분의 책은 시간 죽이기로 쓰임에도 교양적 독서로 간주되고 있다.
이 무분별한 책읽기를 바르게 세움으로써, 지금 사라져서 없는 사회적 교양의 형태를 되살려 내는 일 역시 〈책의 해〉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 과연 읽어야 하고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 기준을 마련해 내는 일,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 적합한 책들을 또 어떻게 보다 잘 국민적으로 전달해 갈 수 있는가를 조직하는 일,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책의 가치를 되살리고 책이야말로 충실한 삶 만들기의 가장 좋은 친구임을 인식하는 일에 〈책의 해〉는 쓰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는 데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책의 가치와 효용의 재인식은 세계의 모든 책들에게도 현재 절실한 현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