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문학적 수용
전정구 / 전북대 교수·문학평론가
문화는 그 집단의 구성원이 지지하고 있는 가치, 그들이 준수하는 규범.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물질적·정신적 재화들로 구성된다.1) 산업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형태로 이행되고 있는 한국 현 단계의 사회상황을 특징적으로 포착하는 중요한 개념의 하나가 대중문화이고, 자유경쟁 사회를 기반으로 전개된 그것은 엘리트·고급 문화와 일정하게 거리를 둔 민중· 민속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단계의 민속·민중문화와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성격을 달리한다.
과거의 민속·민중문화는 상위계층의 고급·엘리트문화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으면서2) 동시에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둔 「밑으로부터 생성된 생산적 문화」였으나, 오늘날 우리의 대중문화는 조선시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정적 측면을 내포한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상업주의적 소비문화」의 성격이 짙다. 대량 소비시대에 관한 사회학적 성찰이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에선 잘 드러나 있듯이 대중문화는, 독점·다국적 기업가가 고용한 기술자에 의해 가공된 상품으로 대중 앞에 놓여진 상업성과 연관되어 왔다.
대중문화 비판이 고급문화 옹호일 수 없다
대중은 오로지 상품화된 그 문화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소비자에 불과하고 기업가·자본가에 의하여 장악된 대중문화는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이용·악용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시각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비판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오늘날 대중문화·대중오락이라고 불리는 것은 특정 지배집단이나 기업가에 의해서 환기되고 조작되고 암암리에 결정된 욕망이라고 말한다. 문화산업에 침윤된 대중문화는 이윤추구를 가능케 하는 소모성에 목적이 있거나, 특수한 사회상황에서는 용의주도한 정치적 조작의 그럴듯한 가면·구설이 되어 왔다. 서구·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상품판매의 주요한 전략으로 대중문화를 악용하거나, 구 소련이나 동구 혹은 북한 등 공산국가들이 그것을 대중교육·선동의 정치적 지배도구로 이용했던 것이 이러한 예이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론은 우리사회·문단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대중문화 부정관을 형성하는 선입견이 되어 왔고3) 그 근저에는 대중사회의 출현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기인가에 대한 실증 작업이 결여되어 있는 대중문화 비판론은 자칫하면 반대중적인 고급문화를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해 온 유한층, 대중이 사회공동체의 중심권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층의 거만한 엘리트의식의 발로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실체불명의 「대중」에 대한 두 가지의 평가기준을 마련해 왔고4) 비판론자들은 그 두 가지 평가기준의 나쁜 대중상을 대중문화에 그대로 대입하고 있다. 대중문화 비판론의 안티 테제로 나타난 옹호론은 대중사회의 출현을 오히려 「새로운 질서」에 의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파악한다.5)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의하여 최초로 사용된 문화산업(culture industry) 이라는 용어는 원래 대중문화(mass industry)라는 말을 대체한 것인 데6), 이들의 문화산업·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요체는 「문화산업이 자본주의의 지배를 영속화시키기 위해서 기술을 이용하고 이성을 도구화하고 문화적 표현을 상품화시키는 수단」을 비난하는 데 있다. 상품의 진열대 위에서 우리의 영혼을 발견하는 시대, 인류의 정신적 유산마저도 상업화되는 시대의 어두운·부정적인 대중문화상을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에서 콜레라로 비유하고 있다.
『무서운 콜레라가 모든 서구 사회에 창궐해 있지. 신문과 전파를 통해 토하듯 쏟아지는 대중문화라는 콜레라 말이네. 그것이 모든 것을 죽이고 또 모든 것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네. 언젠가는 우리 목까지 그 오물 같은 콜레라가 차 올라 우릴 질식시키고 말 걸세.』7)
미치너는 데블런 교수의 입을 빌려서 대중문화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콜레라의 창궐로 비유하면서, 그 불행한 통속성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조적 예술가가 해야할 일을 이야기한다. 정말 미치너의 진단대로 오늘날 대중문화는 콜레라에 비유될 만큼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병균에 불과한가 ? 오늘날의 대중은 「탈산업화 시대의 다국적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는 수동적 소비적 문화」에 탐닉된 어리석고 수동적이고 비속한 속물에 불과한가 ? 전자매체나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한 또 다른 형태의 상업화 전략을 담고 있는 오물덩어리가 대중문화인가 ? 그러니 미치너의 전제가 우리의 대중문화 현실진단에 적합한지 반문할 필요가 있다.
실증적 자료들은 미치너의 현실진단에 동의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사회의 강력한 표현매체인 TV에서 마련한 문학기획 시리즈의 실증적 대본들이 언제나 본격문학을 소외시키고 저질문학들을 취택해 오지는 않았다.8) 우리나라의 양대 TV사가 기획해 온 문학작품의 대본 목록들을 검토해 본 사람들은 「기업가의 왜곡된 정서와 가치를 주입시켜 대중 소외를 획책해 온 것」이 매스미디어 문화의 본질이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중문화와 저급문화를 동일시하는 비판적 시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바탕에는 실증적 조사나 현실적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대중문화를 저급문화와 동일시하는 무시·멸시의 태도, 즉 대중문화를 은근히 거부하는 엘리트주의적 문화관과 예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대중문화가 사람을 마취시키고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고급문화를 파괴시키기 때문에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비판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는 없다. 어쩌면 아직 우리는 진정한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왜 우리는 대중문화를 좋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대중문화에 저항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노동계급이나 중산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갖는 미적·도덕적 기준 때문에 대중문화의 대상에 저항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인되어야 한다.』9)
내용의 전파 범위와 대중적 인기의 정도에 따라 『햄릿』과 같은 고급문학이, 대중문화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디킨스나 채플린의 경우처럼 좋은 통속문학도 얼마든지 있다. 대중적 인기를 끌며 본격적인 문학·예술의 성취를 이룬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비롯하여, 백남준의 경우처럼 대중문화를 아방가르드 예술로 포용하는 비디오아트 등은 다원주의적 대중취향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 좋은 예에 속한다.
본격문학·예술의 대량소비 시대의 개막은 예술 감식안이 일부 특권층에 국한되었던 봉건시대의 종언과 맞물려 있고, 나아가 대중의 양면적 성격-역사의 주체이며 동시에 지배세력의 통제와 조작을 받는 역사의 객체-이 이제 점점 그 경계를 무너뜨려 가고 있음을 뜻한다. 오늘날의 시민대중은 지배세력의 조작대상으로서의 무력한 대중에서, 지배세력을 해체하는 힘있는 대중·시민상으로 맹목적 민주주의의 객체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시민상·대중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대중적 취향이 새로운 제품·문화의 발전을 가져오는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다. 이 땅의 시민대중들도 문화 민주주의를 이룩해 낼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보통교육의 확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 따라 문화의 자유스러운 향수범위가 확대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원리들이 자유로이 공존하는 시대의 개방된 대중문화시장은 문화계의 찬란한 후광이 될 것이다. 그 때, 책 음반 영화 미술복제품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신문 잡지가 대종을 이루는 대중문화산업은 문화의 산업화라는 의미가 퇴색되고, 산업의 문화화로 나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보수 지식인·문학인들은, 매스미디어와 컴퓨터가 인간의 생활세계를 또 하나의 권력에 「부적합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자산· 지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래세계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10)
오디오 북이나 컴퓨터 디스켓이 활자·책을 대신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전 시대의 소제와 주제를 붙잡고 시대의 변화에 항거하는 보수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진정 본격문화의 활로를 모색하는 길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의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인들은 그 역할을 포기하고 대중문화의 흐름을 비판하는 데만 주력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가 부르짖는 문학의 위기는 대부분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역행하는 반동의 자세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제 문학인은 대중문화에 의하여 문화적 통합현상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감각과 정서의 새 형태를 요구하는 현대 대중사회
대중예술·포플러아트 미학은 비판론자들이 우려하는 대로 예술성의 소멸이 아니라 예술의 기능이 변형되었을 뿐이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구역화 되는 시공수렴(time-space convergence)의 현상을 특성으로 하는 현대의 대중사회는 감각과 정서의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는 사회이지 왜곡된 가치가 만들어내는 인간정신의 황폐화를 반영하는 사회는 아니다. 선도적 미래예술은 창조된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감각과 정서를 형성해 주어야 한다.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1)에서 벤야민이 기술적인 복제·재생산 밑에 예술작품을 종속시킴으로써 예술의 아우라·광휘와 작별시켰던 의미는 바로 변화에 응전하는 자세이다. 오규원은 이미 예술·문학의 아우라와 작별을 고하고 기존 시학과 다른 감각의 시학을 찾아 나서고 있다.
시인도詩먹지 않고 밥먹고 살아요
시인도詩입지 않고 옷입고 살아요
시인도돈벌기 위해일도하고 출근도하고
돈없으면 라면먹어요
오해하고 싶더라도 제발 오해 말아요
-오규원 「시인 구보씨의 일일(詩人 久甫氏의 一日)」12)
「詩人 久甫氏의 一日」은 시의 형식과 내용에서 반엘리트주의 반권위주의 반교양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시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다. 일상적 삶이 시가 될 수 있고, 시인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한 그의 시 쓰기는, 독특한 창조력이나 특수한 능력의 소산이 아니라 시작 그 자체가 생활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시적 구조에서 「숭고의 개념을 희화화」하는 오규원의 시는 고상한 감격이 곧 예술·시가 되던 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시적 권위의 신성불가침한 위력이 산산조각이 난 시대의 시의 모습을 유하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협지의 패러디를 통하여 유하는 「무림일기」 연작에서 빠른 사건 전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독서의 만족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덧없이 흘러간 시대의 순간 순간을 날렵하게 「무림시대」로 희화화한 그의 시에서 우리는 대중문화·예술 수용의 긍정적 요소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오규원이나 유하의 시는 대중들에게 고급·저급예술의 탈 이분법적 시각을 마련해 줌으로써 예술의 고답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감을 맛보게 하고 있다.
다림질을 한다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다림질도 잘 하려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리미가 놓이는 위치와 나의 위치, 분무기에
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양, 다리미의 온
도, 옷을 다리는 순서, 이런 따위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의 다림질은 진지하지 않다
「다림질은 되도록 짧고 빠르게」
다림질에 관한 나의 방침은 이렇다
나는 자꾸만 다림질을 쉽게 생각하고 싶어진
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어디 다림질뿐이더냐
-이선영 「나의 게으른 다림질」
문학·시를 개체적 일상의 기록으로 담아냄으로써 예술의 아우라와 결별한 생활세계의 시학을 「나의 게으른 다림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선영의『오 가엾은 비눗갑들』은, 대량소비시대의 전자 정보 미디어가 현실을 픽션화하는 기법을13) 언어화·문학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나의 제작자와 나」 등의 경우처럼 그녀의 시에는 현실의 실체가 사라지고 현실의 이미지만 남는다. 삶의 실체가 묻혀버리고 현실 이미지만 남는 이 시대의 실체 없는 삶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이선영의 시들은, 존재의 무거움 속에 짓눌려 있는 일상의 가벼운 신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하찮은 것의 소중함을 가벼운 감각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그녀의 시의 미니멀리즘적 경향은 삶의 깊고 내밀한 체험을 일상 사물들에 이입하여 그것들을 이미지화하여 날려버리는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내용, 예리한 통찰, 뛰어난 심미성이 사라진 시대의 시·문학의 아우라에 저항하는 그녀의 시 쓰기는 감성복제시대의 대중감각을 개성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소비자와 더불어 작품 쓰기 전산망 이용한 과학소설
시인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소설가 복거일은 대중문화 매체의 꽃·PC 통신과 조우하고 있다. 「전산통신망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소설의 시장에서 지닌 가능성에 대해 실험했고」, 그 실험은 「전산기 화면이라는 새로운 그리고 앞으론 점점 중요해질 책을 통해 문학적 글을 쓰고 읽기」라고 정의되는 실험이다. 그는 이러한 실험에 대해 「긍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작가와의 대화를 통하여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을 독자와 서로 주고받으며 그는 대중매체 미래시대의 문자영상 매체 「PC통신」을 성공적으로 맞아들이고 있다.
『전산망에 과학소설을 싣는데 동의하고서 새로운 매체의 성격에 대해 생각하다가, 저는 매체와 전언 사이의 친화력이 이번 경우엔 보기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밝혔듯이, 전산망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과학소설의 독자들이 많이 겹치리라는 점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전산망과 과학소설 사이에 있는 친화조직은 그런 차원보다 깊으니 둘 다 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 질서보다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질서를 불러오는 특성을 지졌습니다.
전산기가 처음 나타났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사회의 중앙 집권화를 불러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중심부에, 특히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전산기가 정보를 독점하는 상태를 상상했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나오는 결론은 아주 엄격하게 짜여진 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 사회의 출현이었습니다.
현실은 그러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산기는 정보와 권력의 집중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분산을 불러와서 모든 층위의 사회들에서 자유화와 민주화를 촉진시켰습니다. 그런 사정은 기업의 조직과 운영에서 가장 뚜렷하니, 거의 모든 기업들에서 정보 처리와 의사 결정은 점점 현장으로 분산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갑작스럽게 무너진 데서도 전산기에 의해 가능해진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14)
모더니즘 소설처럼 난해하지 않고, 리얼리즘 소설처럼 진부하지도 않은 미래·과학소설 『파란 달 아래』는 경박한 사이비 실험작가의 극단적 SF 감각도, 상업성에 물든 퇴폐적 섹스 마약 증후군도 없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작가와의 대화」를 통하여 복거일은 독자들을 그의 소설세계 속으로 이끌거나, 혹은 독자의 요구 속으로 이끌려 가며 「소비자와 더불어 작품 쓰기」를 완성해 갔다. 복거일이 지적하듯이 과학소설은 문학의 여러 장르들 가운데서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특질을 가장 짙게 띤 장르이다. 과학과 기술이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들을 다룬 과학소설은 무지와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다른 어느 장르들보다 힘차게 민주주인 사회를 지향한다. 비판론자들이 우려했듯이 소설독자·대중독자들은 어리석지도 우매하지도 않았다.
평범한 일상의 피상적인 스케치를 통해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외적 행위의 액션을 통하여 한 시대의 풍속도를 잘 드러낸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재봉의 「블루스하우스-전화」15) 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중사회·문화의 현상을 수용하고 있고, 그 양상들이 내러티브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고 있다. TV와 VTR의 화면을 연상케 하는 영상적이고 파편적인 구성과, 개인적인 이력을 「스쳐 가는 화면처럼 감각화시키는 내러티브」는 영상매체의 기법을 복제한 느낌을 준다. 문학가·예술가 자신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독자를 향한 열린 시각을 지향하고 있는 이러한 유의 소설들은, 대중문화의 선도적·진보적 기법들을 수용한 예다.
우리사회의 대중문화가 전통문화의 토대에서 형성되고 창출된 문화가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모방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중문화 비판론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문화창조 주체로서의 대중이 형성한 실천적 문화라는 사실을 폄하하는 시각은 옳지 않다. 상업제품들의 득세추세를 비판하고 이 경향이 문화와 예술의 퇴보를 초래할 것이라는 아도르노의 예언이 서구사회에서 그대로 적중한 것은 아니다. 「필사본을 대체하는 도서산업의 발달은 문학작품의 창작에 엄청난 공헌을 했고, 생음악 연주회를 보완하는 음반산업은 음악에의 취향을 자극하는 데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생활의 향상과 여가시간의 증대, 교육수준의 향상과 매스미디어의 대량보급은 「거짓 만족이든 혹은 대리 만족이든 자본주의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대중문화를 창출해 왔고, 그것이 대중의 생활세계를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우려할 만큼 이 사회의 저속화·퇴폐화를 조장해 오지는 않았다.
대중독자들의 변화욕구 반영이 문학의 과제
현대사회의 대중은 현명하게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자본가의 상품과 서비스를 거부해 왔다. 대중정서와 심리를 강하게 파고드는 표현과 기법의 개발은 무소불위의 힘과 권력을 가진 기업가나 정치세력에게도 「가장 지난한 과제」였다. 그 동안 고급스럽지 못하다고 억압받아 왔던 또 다른 문화의 모습을 대중문화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을 통하여 전통문화의 기반을 조성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이러한 자세는 새롭게 대두되는 대중사회를 해석하고 그 사회의 도래에 따른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대의 산업기술은 교통수단과 커뮤니케이션의 정교한 네트워크를 발전시켰고 테크놀로지는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무한한 유희·여가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그 부산물인 문화산업들과 제휴하여 문학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문화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하다. 「소비자의 수요와 시장의 메커니즘」을 지향하는 문화산업은 역설적이지만 문학가·예술가의 지휘를 격상시켜 줄 것이다.
대중문화의 오도된 기능을 극복하는 문학운동의 대안은 현실에 적응하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대중문화의 다양한 기법들을 창조적으로 변용·수용하여 전통적인 문학소재들을 개방화하고, 그것들을 다시 설계하여 변화하는 시대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포용할 때, 문학예술은 생산 차원이 아니라 소비차원에서 대중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인의 생활세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건전한 여가문학·소비문학 개념의 도입은, 어느 시대에나 대중의 환영을 받아왔다. 오늘날의 문학은 이질적인 만큼 광범위한 대중독자들의 변화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소비자·독자의 변화의 욕구를 차단하는 시대착오적 작가·생산자의 제품·작품이 「본격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던 시대는 지났다.
주)
1) 문화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 12,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1978,「Culture & Civilization」). 이 용어는 학문분야에 따라 상이한 의미로 규정되기도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Vol 3,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1974, 「Culture」)한다. 최근에는 그 사회의 공통경험을 이해하고 반영하도록 해 주는 모든 유용한 「기술 체계들의 총합」(the sum of the available descriptions)에 문화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방법과, 그 사회의 삶의 방식 전체 속에 있는 「사회적 실천들(social practices)의 상호관계의 총합」이라고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강현두,『대중문화론』 나남, 493-494면 참조).
2) 우리 시가에서 민요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민요는 조선시대의 엘리트 시가양식인 시조를 해체하여 사설시조 양식을 출현케 했고, 엘리트 문학을 수용하여 그 폭을 확장하고 그 질을 높여 왔다.
3) 「대중문화의 전개와 문학의 위기」(『문예중앙』 1992년 여름)를 다룬 기획물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대중사회·문화출현에 비판적이여야 할 『사상문예운동』,『실천문학』,『문화과학』 등은 대중문화·사회출현에 중립적이거나 덜 비판적인데 반하여, 보수적인 문학·문예잡지·계간지들이 공평성을 잃고 그것의 출현에 비판적이거나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다. 특히 보수적인 계간지·잡지에서 대중사회의 전개를 문학의 위기로 바라보는 시각은 피상적인 논의·서구의 비판론을 얼기설기 복제한 논의에 머문 예가 많다. 대중문화는 사회학이나 신문방송학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왔으나 사실은 예술·문화계에 더 관련된 분야로 생각된다. 「대중예술과」를 대학에 설립해 보는 것이 어떨지 ?
4) 우리 사회에서는「대중」에 대한 두 가지의 평가기준이 있다. 「대중성 확보」,「대중적 정서 획득」 등의 구호에서 뜻하는 대중성이란 매우 긍정적 차원에서 대중을 특정 이념과 사상, 운동의 지지세력(주체) 확대 범위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하여 대중문화, 대중추수주의에서의 대중은 대단히 부정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특히 미국식 포디즘의 대량생산·대량소비가 빚어놓은 대량소비시대의 익명의 대중은 문명의 타락과 도덕적 타락, 소외, 고통, 무의미를 상징하는 나쁜 것의 대명사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러한 부정적 의미의 문명 비판적 대중관이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다. (백욱인,『대중사회의 구조와 대중의 계급적 존재 양식』 실천문학 91년 봄).
5) 『쉴즈와 벨리즈만 등은 대중사회를 새로운 질서로 규정하면서 변화 이전의 사회질서에 비해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 전체사회와 가지는 관계에서 보다 근접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해 주고 또 동료간의 관계도 그 유대가 더 긴밀해 짐으로써... 대중이 전체사회에 통합됐을 뿐 아니라, 사회의 중심부-중심적인 가치체계-영역이 주변으로 넓게 확장되었으며 주변에 있던 대중이 사회중심부에 밀착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문화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이강수, 『한국대중문화론』, 법문사, 1987. 33면)
6) 이강수, 앞의 책, 23면
7) 제임스 미치너·윤희기 옮김. 소설, 열린책들, 1992. 292면.
8) 「영상매체시대의 문학예술」(한길문학, 1990년 11월)의 부록 「TV문학관·베스트셀러극장 작품 총목록」을 보라. 이 목록에는 우리의 문학사를 풍성하게 엮어낼 작가·작품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9) 이강수, 앞의 책, 34면
10) KBS 1 TV에서 1992년 12월∼15일에 방영한 「포스트모더니즘-무엇이 문제인가」를 보고 나는 두 가지의 느낌을 받았다. 첫째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첨단에 선 방송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부제로 그 첨단의 논리를 부정적으로 기획하고 있다는 당혹감이고, 둘째는 기존의 인식틀을 가지고 그것을 깨부수는 미래의 이론틀을 비판하는 황당함이 그것이다. 이 기획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민중·대중을 우둔한 대상으로 판단하여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기득권의 대중지배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나는 이 기획물을 보고 기획자의 의도를 짜깁기하여 사안 자체를 조직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긍정과 대안의 마련보다는 새것을 비판하거나 외면함으로써 현실에 안주하는 지식인·기득권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Eduard Fuchs)가 『풍속의 역사』(박종만 옮김, 까치, 1987)에서 강조한 「성에 관한 지배층·지식인의 이중적인 태도」나 EW. Said가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에서 지적한 「이성과 합리를 위장하여 권력과 담합하는 지식의 이중적인 모습」을 참고해 보라.
11) 벤야민은「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서두에 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가져 올 예술산업의 커다란 변화를 이야기 한 폴 발레리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모든 예술에는 더 이상 예전대로 생각되거나 취급될 수 없는 물리적 부분, 현대의 지식과 힘의 영향으로...중략...어쩌면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하여야 한다」(Walter Benjamin·이태동 역, 『문예비평과 이론』 문예출판사, 1989, 257면).
12) 예술·시의 아우라와 작별하는 예는 이외에도 가정 요리로 시적 소재를 삼고 햄버거로 철학적 명상을 대신한 장정일, 비디오 천국에 매달려 신음하던 하재봉을 비롯하여 황지우 박남철 등 소위 해체군단의 시인들에서 수없이 확인된다. 이들과는 또 다른 의미가 시·예술의 아우라와 작별한 예로 김종삼을 들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서울역 앞을 걸었다./저녁 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람들이/그런 사람들이/이 세상의 알파이고/고귀한 인류이고/영원한 광명이고/다름 아닌 시인이라고(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3) 전통사회의 미화된 향수·고향을 소재로 사실과 허구를 혼합한 MBC TV의 「전원일기」는 현실의 농촌사회를 픽션화함에 따라 농촌현실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 현실의 이미지만 남는다. 이 드라마는 허구적 농촌상황에다 실제로 농촌생활을 접어 넣으려는「삶의 비현실화(derealization of life)」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중·시청자들이 이로 인해 현실경험을 방해받거나 그 현실로부터 도피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현실과 허구성의 경계 지우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향수상품(鄕愁商品)의 꽁보리밥 수제비 호박죽, 자연상품(自然商品)의 실내낚시터, 모험상품(冒險商品)의 실내등반 등은 전통사회의 생활세계를 모사. 이미지화하여 상품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제품들, 특히 향수 상품들은 그것들을 경험할 수 없는 미래세대에게 전통세계의 생활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제품들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우리의 문화·정신을 위안하는 상품을 뜻할 수 있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서구화 생활 패턴의 획일화를 막는 의미를 갖는다.
14) 복거일, 『파란 달 아래』문학과 지성사, 299면.
15) 『비디오 천국』에서 대중문화 양식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하재봉의 「블루스하우스-전화」는 「광고매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허구의 사실화 기법이나 논문양식에서 권위 덧붙이기의 수법」과 유사한 주석 달기를 시도하고 있다. 서사구조에 주석 달기의 본격적인 도입은 사실 기록적 성격이 강한 르포양식이나 진실 지향적 성격이 강한 논문양식을 픽션의 내러티브로 전용하는 소설 쓰기의 신선한 전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