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두 문학상
이재형 / 불문학·외대강사
오, 정겨운 빛
오, 빛의 신선한 샘
화약도 나침반도 발명하지 못했던 사람들
증기도 전기도 정복할 줄 몰랐던 사람들
바다도 하늘도 탐험하지 못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대지가 대지일 수 없는 사람들
대지가 메마르면 메마를 수록 더욱 이로운 용기
그리고 또 대지
대지 외의 것이 보존되고 익어 가는 곳간 대지
나의 네그리뛰드는 돌이 아니다. 대낮의 소음에
항의해서 귀를 막아버린 들이 아니다, 나의 네그리뛰드는 대지를
덮어버리는 괸 돌이 아니다.
나의 네그리뛰드는 담도 아니고 성당도 아니다
그것은 해양의 붉은 살명이 속으로 잠겨든다
그것은 하늘의 타는 듯한 살덩이 속으로 잠겨든다
그것은 끈질긴 인내로써 불투명한 종압에 구멍을 낸다
………
그리고 그 늙은 검둥이는 일어선다
앉아있던 늙은 검둥이가
갑자기 일어선다
화불장 속으로 일어선다
선실 속에서 일어선다
갑판 위에서 일어선다
바람 속에서 일어선다
태양 아래서 일어선다
피 속에서 일어선다
일어서고
일어서고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에매 세제르에 의해 1939년도에 이렇게 「귀향수첩」에서 노래되었던 네그리튀드, 흑인정신이 50여 년만에 다시 한번 그 목소리를 드높였다.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출신 파트릭 샤므와죠가 1992년도 콩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샤므와죠는 이로써 1백 50년에 달하는 마르티니크섬의 역사의 대변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이것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일곱 가지 불행의 연대기」라든가 「멋진 솔리보」 등의 작품으로써 이미 역량을 인정받은 이 작가는 언젠가는 걸작을 하나 써내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걸작이 드디어 여기 나타났다.
마르티니크 역사의 주술적 연대기-텍사코
마르티니크 1백 50년 역사의 풍요한 주술적 연대기인 이 작품의 이름은 「텍사코」로서, 파트릭 샤므와죠는 이 작품을 쓰면서 식민지적 콤플렉스로 인한 집요한 침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마르티니크를 끄집어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젊은 소설가는 서인도 제도의 역사가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여 있으며, 그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문학이 가진 힘을 모조리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어둡고 다양한 조국의 역사가 증인들 없이, 증언 없이 이뤄졌음도 알고 있다. 노메블의 역사, 그것은 단어와 설화와 우화와 꿈으로 이뤄진, 그러나 글로 쓰여지지 않은 풍요하며 은밀한 세계다. 파트릭 샤므와죠는 개인들의 궤적과 집단의 행정(行政)속에 묻혀 있는 이 같은 기억을 해독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살았다.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는 「텍사코」에서 증인을, 전설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을, 크레옴어로 쓰여진 이 서사시의 대변인을 한 사람 내세웠다. 마리-소피 라보리유라는 이름의 이 대변인은 해방된 노예의 딸이자 여자 투우사로서, 모든 절망의 에너지로써 〈성안(마르티니크의 수도인 포르드 프랑스)〉을 정복하려고 떠나서 변두리 지역에 텍사코라는 신화의 거리를 만든다. 도시계획주의자들이 빈민굴이라고 부르게 될 이 거리는 그러나 하나의 거리 이상이다. 파트릭 샤므와죠에게 있어 이 혼잡한 도시는 도시에 위치한 전설의 〈팡그로브 나무숲〉이며, 이 숲에서는 가히 예술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삶의 매혹적인 기술들을 매일매일 습득할 수 있다. 그렇다, 마리-소피 라보리유는 텍사코를 출현시킴으로써 크레옴어의 건강함을 표현하는 예술가가, 영원히 유예된 영웅 세계를 건설하는 마술사가 된다.
마리-소피의 목소리는 도시화되어 가는 언어의 제스처와 풍경의 한 세기 반에 걸친 격렬하고 마술적인 변화를 이야기한다. 「진흙 속에 피어난 작은 양각초 꽃봉오리」에서 「거리의 흑인여자」로 변신하는 마리-소피는 집단적이며 정치적인 역사와 연결된 그녀의 가족사와 사랑의 역사를, 용기 있는 여성인 그녀의 동작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기 민족의 광기와 비극적이거나 즐거운 사랑, 재난‥‥ 등등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독교도이며 도시주의자를, 〈말의 기록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그들이 텍사코와 텍사코의 혼을 마르티니크 민족의 혼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텍사코 얘기를 한다. 그녀는 서인도제도의 작은 산들이 영혼을 가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사납고 흉악한 〈성 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삶의 실〉을 푸는 것이다.
마리-소피는 글로 쓰여진 기억을 정열적으로 전달하며, 모든 독자들은 그녀가 불임이기 때문에 그녀의 후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물 여섯 권의 초등학생 노트에 자기 삶을 기록해서 작가에게 넘기고, 작가는 그의 서사시를 쓰는 도중에 그것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샤므와죠는 텍사코를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만듦으로써 이야기꾼이자 여전사를 기리고 있다.
콩피앙과 샤므와죠의 야심에 찬 문학적 계획
「텍사코」를 쓰면서 샤므와죠는 서인도제도 구비문화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집단 무의식을 드러내고, 단어의 힘을 빌어 카리브 지역의 상상세계의 목록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친구 라파엘 콩피앙과 그들의 스승 에루아르 글리쌍이 수년 전에 꾸몄던 〈계획〉에 충실한 셈이다. 그 계획이란 동시대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면서도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마르티니크의 아이덴티티를 풀어내고, 서인도제도 민족들의 지워진 역사를 밝혀 내는 일이다.
콩피앙과 샤므와죠가 1988년 「서인도제도적인 것에 대한 찬사」라는 선언문을 통해서 이미 당당하게 정의를 내린 바 있는 이 야심에 찬 문학적 계획은 놀라울 만큼 잘 실현되고 있다. 라파엘 콩피앙은 「흑인과 해군대장」(1988, 그라세 출판사)이라든가 「커피울」(1991, 그라세 출판사)같은 훌륭한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파트릭 샤므와죠는 「텍사코」를 통해서 그들을 열렬하게 인도한 크레옴의 유토피아야말로 오늘날의 프랑스어로 표현되는 문학에 일어날수 있는 가장 야심한 모험임에 틀림없음을 증명해 준다. 결국 옛 대영제국의 변방에 사는 새로운 소설가들 덕분에 최근 영국문학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를 이 콩피앙과 샤므와죠 덕분에 프랑스 소설의 기법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소설가들은 그것이 인도인인 샐먼 루시디건, 나이제리아인인 벤 오크리이건, 파키스탄인인 하미프 쿠레이쉬건, 벵갈인인 아미타브 고쉬건, 그리고 물론 그들의 스승인 인도인 네이폴이건간에, 글쓰기야말로 조각나버린 아이덴티티의 퍼즐을 다시 짜 맞추기 위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학은 잃어버린 세계를 그리며 한탄하거나 그 세계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금 이곳의 요구에 맞추어 재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샤므와죠에게도 마찬가지로 크레옴의 상상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긴급한 일인 동시에 뿌리 깊은 욕망이다.
「텍사코」, 이 작품은 서인도제도만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의 표명이다. 샤므와죠는 작가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일부러 겸손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 섬의 이야기꾼들의 직계 후손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말을 기록하는 자〉인 그는 기억을 도둑맞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중국, 인도 등 소위 제3세계 민족주의 한을 증언하려 할뿐이다.
그러나 파트릭 샤므와죠는 프랑스어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작가가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샤므와조와 마르티니크 문화에 대해서 쓴 훌륭한 글에서 (「영 피니」지 34호) 샤므와죠가 구사하는 문학언어가 프랑스어와의 혼종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대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쿤데라는 이렇게 쓴다. 「그의 문학언어는 물론 변형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프랑스어다. 하지만 그것은 크래올화된 언어(그 어떤 마르티니크인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 다)가 아니라 샤므와죠화된 언어다.」
「텍사코」는 또한 최근의 문학에 등장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마리·소피라는 도시 게릴라를 통해서 샤므와죠는 크레옴 여성에게 찬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용기와 불요불굴, 시적 재치에 의해서 그녀는 텍사코의 혼 그 자체가 된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 「불쾌한 자」의 지스베르
소설 부문에 주어지는 또 하나의 권위 있는 문학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은 프란츠·올리비에 지스베르의 「불쾌한 자」에게로 돌아갔다.
지스베르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프랑스의 유수한 일간지인 「피가로」지의 편집국장으로서 프랑수와 미테랑에 관한 뛰어난 칼럼을 쓰기도 하지만 또한 쐬이으 출판사에서 나온「아드리 엥」같은 작품에서는 열정적이고 참을성 없는 청춘을 섬세하게 묘사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불쾌한 자」는 파리 교외에 사는 한 불우한 소년의 이야기다. 불구에 추한 모습으로 잘못 태어나서 사랑도 못 받는, 프랑소와즈라는 여인과 금세 사라져 버리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는 이 소년은 인생 을 살아갈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은 있다. 그는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환희의 순간들과 동기들을 끄집어 낼 줄 아는 자이다.
뿌리 없는 이 아이는 쉴 르나르의 「홍당무」라든가 「레미제라블」의 「가브로슈」를 연상시킨다. 순결하면서도 타락한 그는 또한 게토(ghetto)사는 불우하게 태어난 자들이 갇혀 사는 제도에 사는 일종의 자찌(Zazie)이다.
불어 유머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완화된 아이러니에 대한 감각도 타고난 지스베르는 그 점에서 레이몽 크노와 유사한 작가다. 그의 주인공 아리스티드는 온갖 종류의 불운을 다 체험한다 그리고 아리스티드는 자기 나이 또래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소설가로서는 구사하기가 매우 힘든 테크닉이다. 매우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가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혹적인 인물로 만들어 준다. 이제는 처참한 꼴로 태어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갈 아티스티드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독자들은 아리스티드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작품이 막을 내리면 독자들은 소름끼치는, 그러나 환하게 밝혀진 현실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워 것이다. 실제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적절한 표현, 감화력 있는 공간, 진정한 연민 등은 현대문학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편견이나 편들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이상야릇한 작품의 분위기를 풍요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이 따뜻함이야말로 혼돈스럽고 변화무쌍한 우리 시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