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文學에세이의 대두와 그 의미
김경수 / 문학평론가, 서강대 강사
모든 종류의 글쓰기는 다소간 형식상, 그리고 내용상의 직접성, 간접성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과 삶의 환경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다. 그것은 소설을 비롯한 구체적인 문학장르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러한 문학과 상보관계에 있는 문학비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비평이라고 부르고 있는 많은 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들이 문학의 원론적인 문제를 고찰하거나 규범적인 정의를 시도하는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세이,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학적 에세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 경우의 에세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가벼운 생활주변의 이야기와 그리고 그로부터 추출되거나 파악된 다소 의미 있는 삶의 교훈이라든가를 적당하게 배합하여 허구적 이야기와 교훈적 지침을 동시에 제공하는 그런 경수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논자가 자신의 절실한 문제를 글쓰기를 통한 탐색이라는 의미에서 다소 깊이 있게 써 내려간, 무형식의 진지한 작업의 소산을 말한다. 문학이 인간 삶의 리얼리티에 관계된 한, 그것에 대한 해석과 주석으로 나름의 논의 영역을 상정하고 행해지는 문학비평이 앞에서처럼 인간 삶의 환경에 대한 논의인 까닭도 여기에 있고,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문학비평을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수준 높은 문학론의 에세이인 문학비평
하지만 많은 이유로 해서 문학비평은 그간 에세이로 취급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학비평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문학을 우선하고, 그리고 그 비평의 글쓰기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다른 또 하나의 문학 내의 규범적인 장르를 형성한다는 자의식 때문에 스스로 문학비평의 에세이적 면모를 외면한 듯한 인상이다. 그것은 그들의 논의가 배타적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독서를 전제하고 이루어져 온 점 등에서 확인 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발표되는 많은 문학 논의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규범적인 비평론과는 구별되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특정적으로 문학론이라고 할 수 없는 성질의 글들이 간간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굳이 특정한 문학작품을 거론하거나 문학론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암시적으로건 명시적으로건 폭넓게 논의될 수 있는 문학과 사회의 연관성이라든가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역사를 포함한 제반 인문과학의 테마들을 한데 엮어서, 세부적이거나 광범위하게 그들 상호간의 연관 방식을 고찰하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시대의 문화적 현상을 진단하는 글들이 끊이지 않고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양은 많지 않으나, 구체적으로 비근한 예를 들어보면 김우창 교수의 「국제공항-포스트모더니즘 상황에 대한 명상」(「현대비평과 이론」1991, 봄)이라는 글과 역시 김우창 교수의 「회한, 기억, 감각-삶의 깊이와 글쓰기에 대한 수상」이라는 글이 대표적인 경우로 지적될 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김우창 교수의 두 편의 글은, 반복해 말하지만 특정한 문학작품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론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수준 높은 문학론의 에세이라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즉, 「국제공항-포스트모더니즘 상황에 대한 명상」이라는 글은, 90년대 들어 활발하게 논의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특성을, 국제공항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예로 들어 건축과 인간 의식, 인간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는 글이고, 후자의 글인 「회한, 기억, 감각」이라는 글 역시 인간의 자기 실존 확인의 전거를 탐색하는 글로써, 우회적으로 문학의 본질 혹은 기능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고 있는 글이다.
특히 전자의 글보다는 다소 문학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는 후자의 글에서, 김우창 교수는 글쓰기의 문제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자기 실존 확인의 한 방편이라는 것을 프루스트의 작업을 예로 들어 역설하고 있고, 그러한 회상 reminiscence이 문학의 주된 테마이자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부족한 현재적 삶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인간적 욕구의 필연적인 현상임을 논리 정연하게 역설하고 있다.
즉, 어느 면에서는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마지막 권에서 진실한 것, 그것은 문학이다. C'est vrai. c'est la littératurê라고 했던 진술을 환기시키듯, 김우창 교수의 논의는 문학의 기능과 더불어, 문학의 본질을 논하고 있는 글이다.
비록 주된 논의의 근거로 김우창 교수의 글을 들기는 들었지만, 형식이 온전하다 못할 뿐, 김우창 교수의 논의와 같이, 문학이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을 둘러싼 제반 시대적·문화적 상황을 거론한 글들은 예상외로 많다.
잠실 롯데월드와 지하철의 연계라는 사회적 현실을 두고 교통의 편리함과 그 궁극적 목표로서의 소비 자본주의의 결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강내희 교수의 글도 이런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으며,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광고계의 모델이라든가 탤런트를 소재 삼아 우리의 문학적 상황을 빗대어 시를 쓴 유하의 몇몇 시편들도, 따지고 보면 문학을 논하되 문학과 같은 문화구성소인 몇몇 접점들을 함께 고찰해 보자는 의도의 다른 표현들로 보인다.
사회적 패러다임과 문학적 패러다임의 긴밀성
여하튼 김우창 교수의 몇몇 작업, 대표되는 이러한 글쓰기의 현상은 그것이 창작과 비평, 양 측면에서 문화적 조류의 변화를 둘러싼 논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김우창 교수의 논의가 그 출발은 좁은 의미에서 문학적이되, 그 지향하는 바와 논의의 맥락은 문화적 패러다임을 진단하는 방향에서 개진되었다는 사실이다. 패러다임이란 개념은 주지하는 것처럼, 과학사의 전개를 설명함에 있어서 토마스 쿤이 마련한 개념으로서, 이제는 인문과학의 전 분야에 걸쳐서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일단 여기서는 문화적인 이동을 논하는 토대로서의 설명력을 지니고 있는 어떤 현상의 계열적 총체라고 이야기해 두자.
어느 시대나, 그리고 어느 사회나 자체의 사회전개과정과 병행선을 지니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문학은 또 그에 준해서 나름의 문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여기서 패러다임이라는 말로서 장르, 혹은 특정 문학 양식을 염두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제반 영역의 패러다임의 형성은 결코 그것만으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부득불 사회적 현실의 변화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사회 현실의 변화는, 비록 패러다임 자체의 관성(慣性)으로 인해 시기적인 지체 현상을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사회적인 현실과 병행하는 패러다임을 형성하기 마련이고, 문학은 또 그에 준해서 나름의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짧은 글이라 상론할 수는 없지만, 소설과 사회가 맺고 있는 역동적인 관계를 감안할 때, 문학적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패러다임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패러다임과는 다소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학적 패러다임도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나름의 관성을 가지게 될 터인데, 그것이 사회적 변화와 그리고 사회적 패러다임과 즉시적인 병행성을 이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시에 있어서의 상투어라든가 사은유(死隱喩, dead metaphor)를 이야기할 수 있고, 더러는 더 이상 자체 조정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죽어 버린 구성들로서의 문학작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간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던 문학적 기법의 이러한 측면들에 대한 논의의 분분함은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학적 패러다임의 비동시성에 나타내는 하나의 반증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우창 교수의 문학적 에세이가 전반적인 소설작단의 침체 현상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고, 그리고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점차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그에 따라 문학 시장은 급격하게 축소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 현실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음은 결코 적지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지금의 우리 문학 상황이 실제 창작을 통한 성과면에서는 부진한 채 사소한 문제들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의로 일관하고 있는 것의 저변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긴밀하게 삼투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급변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회적 환경이 문학인들에게 올바른 창작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인지하고 숙고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학적 현상과 에세이적 비평의 존립 근거
김우창 교수의 에세이가 결코 문학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한편으로 문학적 현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하고 또 이해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김포국제공항 청사의 건축적 양태가 갖는 기능적 변화의 의미라든가, 교보문고의 아트리움을 예로 들어서 인간과 건축, 그리고 세계 인식의 변화의 측면 등을 논하고 있는 김우창 교수의 에세이들은, 그 자체로 지금의 우리 문학적 상황이 처한 위기 상황이 무엇이고 또 그에 대한 타개책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글들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해 쓰여지는 많은 글들은 여전히 문학계 자체의 부진만을 논의하고 있는 답답함을 보여주며, 심지어 모 계간지의 권두언에는 1992년의 문학계 총평을 하는 자리에서 소설과 시 등 창작 분야의 부진을 메워 준 것이 비평적 담론의 풍다(豊多)함이 라고 해석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적 담론과는 별도로 사회 진단의 글들은 또 나름의 몫만을 주장하고 있다. 확실히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대중문화라는 완충 지대에 대한 관심의 폭에서 문학과 그 바깥의 모든 것들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반복되고는 있지만, 문학을 향한 모든 논의는 일단 우리 시대의 사회적 패러다임을 찾고 해석하는 쪽으로 모아져야 한다. 이점은 비근한 예로 미셀 푸코라든가 에드워드 사이드, 크리스테바 등등, 최근에 우리들에게 소개되는 서구의 숱한 인문과학적 저서들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김우창 교수의 최근의 글은, 이전부터 그가 보여주었던 문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의 구체적 현현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주의를 요한다. 그렇듯이 위와 같은 김우창 교수의 글은 오늘날의 문학 논의가 어떤 맥락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또 동시에 그간의 비평적 글쓰기가 범해 온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적으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글쓰기는, 특히 그것이 비평적 글쓰기라면, 원론적인 차원에서 인간 개개인과 사회적인 현실과의 재통합을 성취하기 쪽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리얼리티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확인하는 목적 이외의 글쓰기는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