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미술

한국화의 산 표현을 향하여




이재언 / 미술평론가·산업대 강사

최근 젊은 한국 화가들의 작품들이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화는 전통의 고수(이것만이 장르 개별성의 존립 근거가 되는)라는 명제와 시대적 상황에 따른 변화의 명제간의 대립 때문에 그 방향성을 상실한 채, 상당한 갈등을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타난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움직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렇다고 어떤 외래 사조에 편승하여 새로움에만 적용하고자 하는 식의 한시적이고 표피적인 것은 결코 아닌 듯이 보인다. 전통적인 요소들을 시대적 감정 구조와 감수성 속에 대입하여 보다 활력적인 표현의 장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본질적인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몇 차례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과제를 놓고 일군의 작가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시도한 바가 있으나, 대체로 자연적인, 시대적 당위와 요청에 부합되지 않은 까닭에 어떤 선언적 차원에서만 그쳤었다. 그러나 최근의 움직임들은 특별한 성명이나 선언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그 명제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피동적으로만 시대와 사회에 관계하는 것이 아닌 선도적인 미술로 자리매김을 하고자 하는 의지들이 엿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이며, 자연적인 흐름들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화의 새로운 흐름, 강선구의 돋보이는 작품 세계

바로 이러한 한국화의 새로운 흐름 속에서 한국화가 강선구(姜善求)의 활약은 특히 돋보인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 될 지 모르지만 그의 활동은 개인적인 창작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화단 전체의 인식 지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난관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지 미래적 시제가 아닌 이미 진행형 혹은 과거형으로서의 시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지난달(11. 27∼12. 6) 금호 미술관에서 있었던 그의 개인전은 처음으로 갖는 것이면서도 대단히 심혈을 기울인 역작들을 선보인 아주 인상적인 전시였다. 특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화가 현대화(現代化)되면서도, 어떻게 우리 집단적 감성의 원형을 훌륭하게 환기시켜 낼 수 있는 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즉 그의 한국화는 한국화 미학의 근간이 되는 공간 의식이나 재료적 특성 등이 오늘날에도 감수성의 공감대가 있는 한, 그것의 지속을 마땅히 용인한다. 한편,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만 억압적으로 주어진 틀 자체를 깨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는 점과, 오늘날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명제들을 직관해 내는 동시대성을 소홀히 함이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마련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갖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우선 전통적 재료인 먹과 종이를 단순한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이념으로서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와 먹이 지니는 관계는 감각적인 차원에서만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상에 대치하고 있는 정신의 구현에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의 화면은 확실히 먹과 종이의 대립과 융화라는 이중주에 다름 아니다. 또한 그의 화면은 그것들의 관계 속에서 이른바 「기(氣)」를 농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설이 촉진되고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먹과 종이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은 확실히 종래의 관념적인 차원을 극복하는 조작적이고 질량적인 데 있다. 즉 일필(一筆)에 의해서만 표현이 종결되는 문인화적 방법을 넘어 몇 겹이 종이 층위를 두고 먹이 침윤되고, 그 층위들 위에서 누르고 긁고 하는 행위의 흔적들이 누적되어 수묵의 단조로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분히 전통적인 기법들이 변조되고, 또한 전통적 수묵화 화면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먹의 새로운 감각들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특히 여기서 먹을 이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 세계 인식의 문맥에 진입했을때 더욱 명료해진다. 즉 상대주의적이고 불확실한 세계 본질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론을 명료한 형태의 단일 필설에 담을 수 없음이 그의 화면 처리에서 정언적으로 단언되고 있다는 것이다.

없음보다는 있음으로, 「여백의 미(美)」에 파격

이렇듯 사역된 새로운 독창적인 방법들에 의해 구축된 화면의 질서는 간명하기보다는 불투명한 편이며, 반영적이기보다는 구성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또한 평면적이기보다는 몇 겹의 공간이 중첩되어 있는 다중적 공간으로 연출되고 있다. 그리하여 종래의 수묵에서는 제한구역이였던 여백이 상당 부분 온갖 형상들로 잠식당하여 그 본연의 상징성이 박탈되어 보인다. 즉 없음 속에서 있음을 강요하는 전통적 미적 질서가 아니라, 있음 속에서 그것들의 허구와 가상을 폭로해 내는 역설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언가 분명하지 않지만 어떤 형상이나 이콘들로 가득한 화면의 질서는 확실히 오늘날의 무수한 존재들의 허상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백 여기 저기 편재해 있는 층위적 이미지들은 어떤 문양들과도 같아 보인다. 그것들 역시 오늘날의 인간이 겪는 현실적 고뇌의 상징으로 표상 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독창적인 기법에 의해 처리된 수묵의 새로운 시각 질서 위에 전체의 견고한 형상들이 다시 중점적으로 구축되고 있는 것도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어찌 보면 이원적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형상들이 곧 배경 속의 파도문으로 흡입되고 말 운명적 도상임을 감안한다면 일원론적 윤회적인 세계관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의 단서는 이것 말고도 산을 그린 것 같은 격자형 연속 구조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파상형 문양과 별똥 같은 형상, 태극 문양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것들은 분명히 어떤 질서에 의해 운행되고 윤회되는 피조물의 표상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화면 여러 곳에 다분히 불교적인 이콘들을 흔적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확실히 오늘날의 인간 의식의 범주와 삶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세계상을 설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투박한 형상들이 추상적으로 구획된 구조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 현존하는 세계상과 대치하여 좌절의 넋두리를 하기보다는, 생명에 대한 외경의 태도로 그 불투명함 속에 몸을 던지고자 하는 연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화면들은 보다 진지함과 육중함을 방법적으로나 형상적으로 구축하고 있어 보인다.

요컨대 강선구의 한국화는 전통적인 미학적 기초나 기법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전통적 한국화의 미감을 보다 생생하고 밀도있게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누구보다 전통적이라는 역설이 그에게는 가능할 것이다. 즉 기법의 변용이 독창적으로 주어져 한국화의 본질적 변질을 기도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오히려 한국화가 가장 한국화다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표현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상이 변화되고 인간 삶의 양식이나 감수성이 변화된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도구의 새로운 마련일 뿐이다. 따라서 일부 전환기 양식을 무분별한 표절이나 모방에서 믿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변별될 뿐 아니라, 한국화를 수구적으로만 고수하고 있는 작가들에게도 경종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