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활성화를 위하여
권영필 / 미술사·고려대 교수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간 예산은 51억 규모(1991년)에 이르고 있다. 이 액수가 한국의 다른 문화 기구에 비해 많은 것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어도 미국의 일급 박물관인 워싱턴의 프리어 미술관의 예산액(1990년, 약64억)과 맞먹는 것임을 볼 때, 그것이 적은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문화국임을 자처하는 많은 나라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박물관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자기 존재의 확인을 위한 역사성의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넓게는 인류 전반에 걸치는 것이고, 좁게는 자기 민족에 국한시켜 그 역사를 가시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데에 박물관의 근본적인 필요성이 생겨 나는 것이다.
"한 장의 그림이 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색깔은 솔직한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독일의 유수한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지는 1980년 3월 7일자 신문에서 차후 칼라 사진판 주간지를 부록으로 발행하게 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미술 작품을 '도큐멘트(Dokument)'로 보려는 미술사학적 해석과 맞닿고 있는 것으로써, 요컨대 시각적 효과를 통해 진실에의 접근을 극대화하려는 문화계의 이와 같은 효율적 시도는 박물관의 경우에도 직접적으로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박물관에 있어서는 시각에 호소한다는 점을 제일 중요한 실천 강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세계의 많은 박물관들은 최신의 첨단 장비를 활용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다각적으로 보여 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박물관들은 대부분 평면적 전시에 안주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는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게으르다. 이것은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박물관이 모두 비슷한 사정이다. 고전적인 평면적 전시에 안주하고 있을 뿐, 개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처럼 박물관에 있어서 '전시'가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박물관의 주요 기능인 유물의 수집과 연구가 종국에는 전시라는 형식으로 집약·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문화재를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작품의 극단적 고립화를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시 방법이 고급화될수록 작품은 그것이 태어난 '본래적 환경'과는 무관한 것으로 되기 쉽다. 그리하여 유리창 속에서 휘황한 조명을 받으며 덩그러니 앉아 있게 마련이다.
근년에 완성한 E 대학 박물관에서는 부분적으로 진열 평면을 보행 평면과 동일하게 낮게 설정하고, 거기에 큰항아리들을 배치하여 마치 광에 들어 있는 그릇들을 보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어쨌건 인위적인 요소를 덜어낼수록 좋을 것이다.
얘기를 더 구체적으로 하고자, 실례를 든다면 이렇다. 가령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당시의 현장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미켈란젤로의「모세」상을 빈콜리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떼어 내거나, 유명한 「아침과 낮, 저녁과 밤」의 조각들을 플로렌스의 메디치 성소에서 분리시켜 박물관의 진열장으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조명은 더 밝아질지 모르나 그것들의 작품성은 저하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크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작품의 원형 보존과 복원의 의미는 이처럼 작품을 에워쌌던 환경까지를 고려할 때에 더 부각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박물관들이 배려해야 할 중요한 미학적 과제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환경 문제를 더 연장할 때, 박물관과 그 건물이 밀접한 연관 속에 놓여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더불어 박물관의 잦은 이전이 문제 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속언에 '죽을 수에 이사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반 서민의 이사에서도 번거롭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하물며 박물관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국에 있어서는 박물관이 당초에 헐어서는 안 되는 기념비적 건물에 자리잡거나, 또는 기왕에 사용 중인 건물의 공간이 모자랄 때에는 증축을 시도할지언정 좀처럼 이사를 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은 거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한 꼴이다. 이것은 국고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턴 제도의 도입과 운영은 가장 시급한 현실의 과제
박물관이 연구 체제에 있어서 대학과 관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항이다. 이것은 마치 의과대학과 병원이 병리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관점에서 유대·공존해야 하는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있어서도 인턴 제도의 운영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을 대학에서 이수한 후 박물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실습 과정을 끝내야 장차 연구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실습이 아직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독일의 경우 미술사 관계의 박사 학위를 끝낸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이 인턴 과정을 수료하도록 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소장하게 되는 경위는 몇 가지가 될 것이다. 발굴을 통해서 수습된 유물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는 매장 문화재와 구입 유물이 될 것이다. 이 구입 유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짜' 물건을 사들여서는 안 된다는 엄격함이 뒤따르게 마련인데, 순전히 학술적인 견지에서 보면, 때로는 안작도 소장품 목록에 넣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작은 학술적인 비교 자료로서 당대는 물론이요, 후대에까지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국립 사립을 막론하고 어떤 박물관에서도 이러한 학술적 목적을 고려하는 선에까지 유물 구입의 폭이 확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학술적인 기능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서는 보고서와 특별 전시 도록 등의 제작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을 '미술 출판'의 범주에 넣어 그 특수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출판에 있어서 세제 혜택의 특별 조치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화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주지되듯이 현재 일정 수준의 신축 건물의 경우, 그 건축비의 일부를 조각이나 회화 작품을 구입하는 데 할애하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조치는 근본 의도가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미술 활동을 진작시키는 데에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미술품을 사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이러한 취지에 입각해 볼 때, 당연히 문화재를 포함한 미술 출판에 있어서도 사회적으로 균형적 배려가 따라야 하는 합리성을 지적하고 싶다.
'논 플러스 울트라' 박물관의 또 다른 이름
끝으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박물관을 통한 문화 교류 채널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1959년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국립박물관이 주관한 대소 규모의 해외 전시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일깨우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고, 또 일정 기간 동안 한국 유물을 빌려주는 대여 전시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을 이제는 역으로 이용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말하자면 상대국의 유물을 빌어 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고, 특히 한국에 그 문화의 본체가 덜 알려진 나라들, 예컨대 동남아시아 제국 등의 문화재를 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탈쇼비니즘의 틀을 마련하고, 구미 일변도로 향해 있는 문화적 편식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립박물관의 한 코너에서 동남아시아실을 설치하거나, 따로 그를 위한 작은 박물관을 준비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계 분야를 위한 큐레이터를 함께 양성하면서 말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대학박물관들의 특수 유물들을 순회 전시 형식으로 다른 지방에 소개하는 방식도 유익할 것이다. 나아가 여건이 허락된다면 이것을 더 연장하여 해외 전시까지도 가능하리라 본다.
지금까지 박물관에 관계되는 평소의 생각들을 이것저것 피력하였는데, 매우 단편적이긴 하지만 박물관의 '활성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쓴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박물관은 그 나라 문화 수준의 척도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논 플러스 울트라', 그것은 박물관에 주어져야 할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