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조사 연구 기능
정준기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박물관의 현대적인 기능이 사회 교육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수집·보관· 조사·연구와 전시라는 기본적 기능의 충실화가 선행되어야 사회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조사 연구의 목적
조사란 사물의 구체적인 상태나 사실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연구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정확한 조사 없이는 연구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조사 그 자체가 박물관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기본적인 조사와 거기에서 얻어지는 정보와 자료가 축적이 되어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되고 나아가서 박물관의 전시와 교육 활동의 기초 자료가 되는 것이다. 반면 목적 없는 조사란 있을 수 없으므로 조사와 연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박물관의 수집 기능도 기본적으로는 조사 연구의 산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조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정보와 자료가 서서히 축적이 되고 그러한 축적 위에서 전시도 이루어지며 논문 발표나 강의 등 교육 활동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사 연구 기능은 박물관의 타 기능과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조사연구에 수반되는 제 활동이 박물관의 지역적인 존재 의의를 높이며 박물관의 발전은 조사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박물관학적 연구
박물관이 행하는 조사 연구로는 크게 보아 순수 학술적 연구와 박물관학적 연구가 있는데, 후자는 박물관 자료와 이용자를 유효하게 연결시키기 위한 광의의 교육학적 연구, 박물관 자료의 수집·전시보관·전시 등에 관한 과학 기술적 연구를 포함한다.
박물관학적 연구 중 자료의 채취·운반·정리·보존과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보수와 수복에 필요한 조사 연구를 보존 과학적 연구라 한다. 수집 당시뿐 아니라 박물관에 보관된 이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자료의 화학적 변질, 물리적인 변형 및 파손, 벌레나 미생물의 해 등을 최소화시키고 전시할 수 있는 상태로 보강하는 것이 보존 과학 처리이다.
전시는 박물관의 교육 활동의 주요한 수단으로서 전시를 통해서 박물관이 관람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기술 및 방법과 아울러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홍보적인 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자료의 전시를 위한 조명 효과, 전시대의 설치, 판넬 등의 해설을 위한 기술적 연구, 모형 제작 등 교육적 수단도 연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연구는 박물관 학예원이 독자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시 기술자, 조명 전문가 등 각 방면의 전문 기술자와 공동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박물관도 기본적으로 사회기관이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학교 교육의 측면에서 제기되는 요구 사항을 박물관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하며 학교에서도 박물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면 조용한 분위기에서 미술품을 관람하고 싶어하는 전문가나 애호가의 입장을 조화하기 위한 연구도 필요하다.
학술적 연구
각 박물관은 설립 목적에 따른 전문 영역에 대한 순수 학술적 연구도 필요하다. 박물관에서 학술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한때 나온 적이 있으며 현재에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러한 주장은 아래의 두 논지에 기초한다.
첫째 박물관은 사회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술 연구는 필요가 없으며 학예원은 학술 연구에 쓰이는 시간과 예산을 전시와 교육, 자료의 수집정리에 쏟아야 한다.
둘째 학술 연구는 기존의 학술 분야에서 제일선의 연구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빈약한 시설과 한정된 인재로 같은 연구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위탁 연구 등의 방법으로 그 성과를 흡수하고, 박물관에는 박물관이 아니면 타 분야에서 할 수 없는 박물관학에 관한 연구만 행하여야 한다.
첫 번째의 불요론은 박물관에서의 학술 연구를 사회 교육 기능과 자료의 수집 보관 기능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학술연구를 포함한 조사 연구 기능은 박물관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필수 불가결의 기능이다. 물론 박물관이 갖고 있는 성격의 차이에 의해 각기 학술 연구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부과된 기능에 차이는 있으나 적어도 박물관이 단순한 기념관, 쇼(Show)장이나 보관소가 아니라면 학술 연구는 자료의 수집·전시·교육 활동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결코 방기될 수 없는 기능이다. 조사 연구, 수집과 보관, 전시와 교육은 상호 분리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고 서로간의 유기적인 협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총화로서 박물관이 사회적으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학술 연구보다는 박물관학적 연구가 박물관의 주된 기능이라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논지이다. 박물관의 학술 연구는 각 박물관의 설립 목적에 맞는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수집된 것이 자료화되며, 조사 연구의 성과 위에서 자료가 전시되고 정리 보관되어지는 것이다. 박물관 학술 연구의 테마나 방법은 때로는 대학 연구소 등 타 연구 기관과 중복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박물관의 목적상 타 기관과 다른 시점에서 본 테마, 박물관이라는 입장에서의 조사 연구 방법을 항상 탐구하고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학술 연구를 박물관이 방기하고 타 기관에 위탁한다면 박물관 그 자체에 맞는 테마의 발견도 연구 방법도 생겨날 수 없을 뿐 더러 전시도 교육도 모두 빌려온 물건이 될 뿐이다. 어쨌든 빈약한 시설과 한정된 인재뿐이라도 학술 연구는 박물관 활동의 불가결한 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
박물관과 대학의 연구 방법의 큰 차이는 자료를 다루는 방법에 있는 바, 양자는 크게 보아 연역적과 귀납적, 양적과 질적, 기술적과 창조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박물관 본래의 목적, 새로운 시대적인 요구, 그리고 각 박물관이 처한 조건에 따라 새로운 연구 방법도 모색될 수 있는 것이고 귀납적인 연구를 할 필요도 생긴다. 또한 방법론이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간에 그 결과가 박물관 자료의 집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다.
한편 대학적인 연구가 근래에는 전문 영역의 세분화로 진행되고 연구 대상도 미시적인 레벨로 들어서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세분화된 전문 분야에 있어서의 분석적인 연구 성과를 종합화하여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이 박물관에서 필요하다.
학예원에 의한 조사 연구
학예원은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박물관 자료의 수집·보관·전시·교육 등의 제반 활동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전문 직원이다. 박물관 전문 직원의 명칭이나 직무내용은 나라마다 박물관의 역사·전통·규모에 따라 일정치 않으나, 박물관 자료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전문직을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는 큐레이터라 부른다. 우리 나라의 박물관 법에는 학예직원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직급 분류와 그 명칭은 박물관마다 조금씩 다르다.
학예원에는 전문 분야의 연구, 거기에 따른 자료의 수집·정리·보관, 사회 교육 분야로의 교육과 보급·전시 등의 광범위한 업무가 요구되어진다. 이는 질, 량으로 보아 큰 업무이지만 그러한 업무를 개별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학예원 개인의 활동 중에서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 즉, 학예원은 자기의 조사 연구 테마를 소속 박물관의 목적에 부합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 성과를 박물관 자료로 남겨 그 성과를 전시·출판·교육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이나 학계에 돌려주고, 그러한 과정 중에 다시 새로운 조사 연구 테마를 찾아내어 연구·자료 수집·전시와 교육 활동의 질을 높이는 나선상의 발전을 해야 한다. 학예원의 학술 연구 성과는 한편으론 반드시 학계에 공표 하여 평가와 비판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학교 교수나 타 연구 기관의 연구원에 대행시킬 수는 없는 박물관 특유의 직업이나 아직도 학예 직원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불충분하여 직업으로서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점이 바로 공사립을 막론하고 박물관의 발전을 저해하는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이다.
한편 박물관에는 수장고 등 자료 보관에 관한 시설과 설비 외에 연구를 위한 시설과 설비가 필요하다. 조사 연구 활동은 고도의 지적 창조 활동이고, 취급하는 자료의 종류에 따라 연구 방법, 연구 수단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아 연구용 공간은 각종의 연구실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넓은 한 방에 학예원 전체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방은 연구실이 아니라 회사의 사무실에 불과하다.
조사 연구 성과의 활용
학술적인 조사 연구의 성과가 한편으론 박물관 자료의 양적인 증가와 질의 향상을 가져오면서, 또 한편으로는 전시를 통하여 공표 되어 교육 효과를 높이기도 하는 것이 박물관만이 갖고 있는 특징중의 하나이다. 또한 이러한 기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박물관학적 연구가 요구된다.
학술적인 조사 연구의 성과는 항상 전시의 정정과 내용의 충실로 이어져야 한다. 상설 전시도 박물관 학예원의 학술 활동과 그 성과를 항상 전시에 보충시킬 수 있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특별전은 박물관이 갖고 있는 사회 교육적인 목표를 위해, 상설전을 보충하거나 상설전의 교육 효과를 한층 높이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별전의 테마는 박물관의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일정 단계에 도달한 성과를 공표 하는 기회가 되면서 동시에 사회 교육에 공헌하는 장이 된다. 특별전의 기획은 교육학적인 성과로서 테마가 미리 결정되는 경우와 학술적인 조사 연구와 자료 수집이 선행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도 특별전의 성과로서 교육적 성과는 물론, 연구 보고서 전시, 해설서 등의 출판물이 박물관의 업적으로 남게 되면서 특별전의 끝난 후에도 널리 이용되게 되고, 아울러 박물관 소장 자료의 증거와 그 질적 향상까지 이룰 수 있어야지만, 그러한 특별전이 박물관의 기능을 높이는 결과를 남기게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조사 연구의 성과는 대외적으로 공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사 연구성과의 공표는 각각 관련된 학회에서 구두 발표로써 또는 학회지에 투고하여 인쇄물로써 관계자들에게 배포될 필요가 있다. 반면 박물관이 정기 간행물로 연구보고서를 출판하고 관계기관에 배포하는 방법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예원의 연구 성과는 동시에 박물관의 학술적인 업적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술지는 투고된 논문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제도를 두고 있다. 박물관의 정기 간행물로 연구 보고를 출판 배부하는 경우에도 객관적인 방법으로 보고서의 질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 전문적인 간행물에 발표하는 것과는 별도로 박물관은 학술 연구의 성과를 일반시민에 환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방법으로 특별전을 여는 것이 바람직하고 몇 번의 특별전을 거쳐 자료와 정보가 집적되면 그 연구 성과가 상설 전시의 충실과 확대로 귀납되어야 한다.
동시에 연구 성과는 출판물로서도 일반시민에 환원되어지는데 출판물로서는 상기 특별전의 해설서나 보급 도서, 팜플렛 등이 있다. 학예원의 연구 활동을 기초로 한 각종 출판물이 풍부해져야 박물관의 학예 활동이 활발함을 보여주는 바로메타가 된다.
전시와 보급 도서의 출판이라고 하는 형태를 통하여 연구 성과를 시민에게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박물관이 갖는 특성이다.
박물관의 조사 연구 활동에 대한 앞의 글은 천지만조(千地萬造)가 같은 주제로 「박물관학 강좌 ·5」(웅산각, 1978)에 실린 글을 추려서 소개한 것으로 박물관에 몸담고 있는 필자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이다. 연전에 공포된 우리 나라의 박물관 법에도 박물관 자료에 관한 전문적 학술적인 조사 연구와 박물관 자료의 보존 전시 등에 관한 기술적(박물관학적)인 조사 연구를 박물관의 업무로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박물관에서는 학예직원을 의무적으로 고용할 것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박물관이 앞서 언급한 박물관의 조사 연구 기능에 충실할 수는 없다. 특히 개인적인 소장 문화재를 보관, 전시하고 있는 개인 박물관 등 소위 논-큐래이셔널 (non-curational) 성격이 강한 박물관에까지 이러한 기능을 강요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국공립 박물관과 대학 박물관에서는 조사 연구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립박물관의 경우 학술 조사 연구와 이에 수반되는 사회 교육 활동은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올라서 있다. 그러나 박물관학적인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선진 외국에서는 박물관학이 별도의 학문으로 독립되어 정규 학부나 대학원에서 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박물관학 강의가 개설되어 있는 대학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독립된 학과로 유지되고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 모 전문대학에 박물관학과가 작년에 처음 개설되었다. 그렇지만 박물관의 조사 연구 기능이 학술적이든 박물관학적이든 단순한 기능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물관학과가 전문적 기능 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2년제의 전문대학으로 허가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의 현 상황이 박물관에 대한 일반인과 정책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어 우리 박물관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