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신임 국립발레단장 김혜식씨

"세계 수준의 발레단을 만들겠습니다"




문애령 / 무용평론가

문애령-국립발레단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오랜 동안 외국 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고국에 돌아오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김혜식-27년만에 돌아와 중책을 맡게 되니 처음에는 어리벙벙했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3년 전부터 동아 콩쿠르 심사 차 매년 한국에 오게 되었던 경험이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 교육까지 받은 후에 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또 임성남 선생님의 파트너로 맡은 공연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적응이 빨랐지요.

문애령-신임 발레단장에 대해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이 중책을 맡게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고 그만큼 기대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만 27년만에 돌아오시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

김혜식-사실 그 동안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만 저와 남편 모두가 미국에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또 가장 기억에 남는 기회였던 1974년경에는 한국의 무용계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었지요. 3년 전 사석에서 만난 임성남 전임 단장님께서 바톤을 이어받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처음으로 하셨어요. 그 후 많은 이유들로 망설였지만 제 나이로 볼 때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삶의 훌륭한 마무리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다는 제 설득에 남편이 이해하고 허락을 하신 셈이지만 떨어져 살아야 하고 생활 기반도 정리가 되지 않아 문제가 많아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저의 발레에 대한 애착과 남편의 격려가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의 원천인 듯합니다.

문애령-오랜 외국 생활의 청산을 결심하신 것도 어려운 결단이었겠지만 발레 유학의 선각자였다는 사실이 더 힘든 위치였을 것 같은 데요. 선생님께서 한국을 떠나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영국 로얄 발레스쿨로 유학 가셨다는 기사가 담긴 사건이 학교 무용실에 걸려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무용반원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셨지요.

김혜식-제가 무용을 시작한 것은 어렸을 때 장난처럼 배운 한국 무용부터였어요. 이화여중에 들어갔을 때 임성남 선생님이 일본에서 귀국하셨고 일 주일에 한번씩 초청 레슨을 받았는데 발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주위에서도 모두 소질이 있다고 권장하셨고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입학했지요. 그 때는 대학 1·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들 갔었지요. 그런데 선배 언니들이 모두들 일 년도 못 되서 포기하고 말더군요. 사실 발레라는 게 얼마나 힘들고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모두들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감당을 못하더군요. 그때 저는 미국이 아닌 영국의 로얄 발레단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고트 폰테인의 「온딘」을 영화로 보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대학 다니면서 편지를 내고 사진과 추천서 등을 로얄 발레스쿨로 보냈어요. 물론 나이가 18, 19세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 케이스로 뽑혔어요. 근대 막상 가려고 하니 수속은 다 끝났는데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동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의 추천으로 당시 공화당 의장이셨던 김종필씨가 5·16 장학생으로 선정 해 주셔서 학비를 지원 받았지요. 그리고 제가 제1회 동아콩쿠르 금상 수상자였기 때문에 동아일보사에서 생활비를 지원 받았어요. 이렇게 해 서 유학이 이루어졌지요.

문애령-유학 후에는 곧장 귀국 해 후배를 양성하거나 공연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을 텐데 외국 생활을 고집하신 데는 그 쪽에 더 큰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

김혜식-예, 처음에 갈 적에는 어떻게 배우는 지만 알아도 좋을 것 같았는데 가서 일 년이 지나고 나니 계속 춤추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요. 마침 로얄 발레단에는 매년 여름에 발레단원 보충을 위해 세계 각국에서 감독들이 방문하곤 하는데 그때 스위스 쥬릭 발레단장이 저에게 스위스로 오라는 제안을 했어요. 저는 이 제안을 한국에 알렸고 "너는 우리 나라를 대표한 외교관과 다름없으니 얼마든지 체류해도 좋다"는 대답을 받았어요. 쥬릭 발레에서의 3년간도 참 만족한 생활이었지요. 그 후, 발레 부흥기를 맞은 뉴욕으로 갔는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는 영주권 등 법적 절차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더군요. 결국 레 그랑 발레 캐네디엥이라는 캐나다발레단 오디션에 응시했고 2백여 명 중 운이 좋게 선발 됐어요. 그래서 캐나다도 갔지요. 무용하는 사람이 춤추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뭐가 있었겠어요.

문애령-한국에 오시기 전에 계셨던 미국 대학에 대해 소개 좀 해 주시죠. 무용 교육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을 발견해 낼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은데요.

김혜식-캘리포니아 스테이트 오브 프레즈노인데요. 1977년부터 가르쳤지요.

문애령-독립된 무용과가 있고 졸업생 중에 발레 컴퍼니에 들어간 사람도 있는지요 ?

김혜식-네, 있어요. 미국의 대학 무용과는 과거에는 체육과 안에 있었는데 요즘은 연극영화과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 나라 교육 시스템이 미국을 많이 모방하고 있지만 이 점은 다르지요. 특히, 저는 그 곳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 능력이 탁월한 사람은 졸업할 필요가 없으니 캄퍼니로 가라고 권유했어요. 무용 실기가 뛰어난 사람도 대학 졸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지요. 반면 실기 능력이 캄퍼니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에는 졸업을 시켰어요. 우리 나라와는 굉장히 다르지요.

문애령-네, 인식이랄까 관념이랄까, 뭐, 그런 확실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형식주의, 권위주의가 큰 영향을 발휘하는 느낌이지요. 이러한 여파가 발레단 운영 과정에서도 발견되리라고 보는데요. 선생님께서 착안하신 가장 큰 개혁을 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혜식-우리 발레단원들은 공무원입니다. 그래서 인지 오래된 순으로 월급을 지급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발레는 생명도 짧고 기량 면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스템을 바꾸기로 하였어요. 주연 무용가, 솔리스트, 꼬리페(세미 솔리스트) 꼬르 드 발레(군무진)로 구분을 해서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재질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올라가는 제도로 1994년부터 실시하기로 했어요.

문애령-외국의 모든 단체가 그렇기는 하지만 발레만의 특수성을 감안한 결단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신 이후로 연습량이 급격히 많아지고 외부 활동을 전면 금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고 우리 발레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랜 관행이라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을 텐데요.

김혜식-네, 그래서 제가 욕을 많이 먹고 있어요. 하지만 프로페셔널 발레 댄서들은 하루 종일 연습해도 실력이 부족한데 언제 과외 교습을 하고 예고나 대학 강의를 나갈 수 있겠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그래서 발레단과 외부 교습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어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발레단을 떠났지요. 우리 발레단원들이 재주는 다들 있지만 체력이, 즉 연습량이 부족해요. 발레단을 위해서는 이 오래된 나쁜 습관을 빨리 결단력 있게 없애야 합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체력이 소모됩니까 ? 직업 발레단원이 춤추는데 온 힘을 쏟아야지요. 제 경우에는 하루 종일 연습하고 집에 가서 쉬는 일정에서도 춤이 어렵고 힘들었는데 이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좋아하는 발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물론 단원들도 월급이 적으니까 생활이 힘들겠지요. 그래서 제가 후원회를 결성하고 있어요. 큰 도움은 못되더라도 단원들 토슈즈 정도는 많이 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작지만 옆으로 도움을 줄 생각을 하고 있지요.

문애령-외부 활동을 선택한 단원들이 불만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 무용계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에만 전념하는 짧은 기간 후에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국립발레단원이었다는 사실이 굉장한 경력으로 인정받아 평생을 발레 교사로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현실도 대학을 위주로 한 교육 체제거든요. 그러니 발레단원들에게 대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만류하기는 어렵지요. 각 대학 무용과 교수들이 개인공연을 위해 제자들을 컴퍼니 멤버처럼 양성하고 있고 그들이 대학강사나 학원 운영을 하고 있으니 미래를 예측하는 발레단원들로서는 위기감을 느끼게 마련이지요. 한마디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봅니다.

김혜식-맞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용 교육 시스템인 것 같아요. 발레리나를 위한 교육이 아닌 대학을 위한 무용이지요. 그러니 나이 들어 시작한 사람이 많습니다.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닌 셈이지요. 또 교수들은 각자의 공연 활동에 치중하다보니 정말 중요한 조기 교육의 문제는 뒷전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대학교수가 공연하면서 말하자면 '김혜식 발레단'이란 타이틀을 사용하는 법이 없어요. 그랬다간 큰일나지요. 대학에 등륵금을 내고 다니는 대학생들이 어떻게 개인 컴퍼니 단원이 됩니까 ? 되려 엄청난 의상비까지 부담하면서요..

문애령-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발레단원, 무용 교수, 무용학과가 엄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이 박사 학위를 소지한 학자이자 예술가인 무용가인 동시에 실기 수업과 이론 수업을 가리지 않는 만능인을 양성하고 있으니까요. 얼핏 들으면 그 개인이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외국의 전문가들과 비교한다면 창피할 뿐이지요. 국제 경쟁력을 기르려면 이제는 전문화가 절실함을 주장하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한 현실입니다. 선생님께서 발레단원의 겸직을 규제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기를 저 또한 바라며 변화를 주도할 위치에 계신 분들의 결단력을 기대할 뿐이지요.

김혜식-그래요. 교수는 교수의 할 일이 따로 있고 예술가의 임무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각자 자기의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문애령-각자의 전문성을 살린 다면 무용계의 전망이 훨씬 좋아지겠지요. 이제 국립발레단원들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들의 기량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외국에 비하면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있을 텐데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

김혜식-우선 구성원의 분포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최태지씨나 문병남씨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고, 특히 최태지씨는 외국의 발레단원에 비해 손색이 없지요. 반면 이들을 계승할 솔리스트가 없고 군무진들도 거의 같은 실력입니다. 저와 지도위원들이 연습을 시키지만 외국 의 트레이너도 초청할 계획이에요. 두 번째로는 기초가 잘 되어있지 않아 발레학교를 통한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서 있는 자세부터 고쳐야 밸런스가 잡히고 선이 제대로 나오는데 발레단에 와서야 그런 기본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지요. 국립발레학교가 곧 생긴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 무용하는 사람들이 개인보다는 전체 무용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체계 있게 일을 해야겠어요. 사실 발레의 조기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문애령-국립발레학교가 빨리 생기고 제대로 교육받은 발레리나들이 나온다면, 그리고 국립발레단 입단이 모든 이의 희망이 된다면 우리 발레계는 비로소 정상 궤도를 찾게 되겠지요. 올해의 발레단 공연 계획은 어떠신지요 ?

김혜식-1993년도 행사는 벌써 1992년도에 계획되기 때문에 전임 단장님으로부터 그대로 인수받은 겁니다. 3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백조의 호수」를 3일 동안 공연하고 6월에는 「레퀴엠」과 「브라보 피가로」를 재공연합니다. 9월에는 「잠자는 미녀」를 정해 놓았는데 지금의 단원수로는 불가능해요. 그리고 꼭 대작만 해야 할 이유도 없구요. 소품 대여섯 개로 하루 공연을 치르고 다음 날은 두세 개 바꾸는 식의 공연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조지 발란쉰 작품을 공연해 보려고 미국에서 허락을 받은 상태지요.

비디오를 보고 공연을 하는데 허가 없이 복사하면 불법이에요. 우리 발레단으로서는 초연이 됩니다. 발란쉰의 소품에 클래식 발레의 그랑 빠드되(남녀 2인무)도 한두 개 넣고 저도 소품 하나를 안무할까 합니다. 그리고 1994년 봄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킬리안이나 존 버틀러 등을 초빙해 컨템포러리 발레도 할 계획이에요. 클래식 레퍼토리 중 대작 한두 개는 매년 하게 될 것 같고요.

문애령-앞으로는 공연이 많아지겠는데요 ?

김혜식-공연 회수 또한 많아져요. 며칠간의 공연은 너무 짧아서요.

문애령-바람직한 일입니다만 관객 동원의 문제가 항상 장애물이었지요.

김혜식-그것 또한 제가 다 맡았어요. 단장이자 예술 감독이자 관객 동원까지 모두 책임져야 돼요. 그래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어요. 회원에게만 표가 가도 극장이 찰 수 있게요. 1월 29일 첫 발기인 대회를 하는데 많이 소개해 주세요.

문애령-그 밖에도 발레단의 운영상 시급한 문제들이 많으시겠지요 ?

김혜식-네, 그래요. 특히 연습실이 최소한 하나는 더 필요해요. 군무진 연습 때 주역들 연습실이 없으니 보통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단원들 쉴 곳도 마땅치가 않고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피아니스트와 단원 숫자도 증가되어야 하고요.

문애령-마지막으로 신임 국립 발레단장으로서의 포부를 말씀해 주시지요.

김혜식-저는 지원이 충분하다는 전제 아래 우리 발레단을 외국 수준과 똑같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어요. 우리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나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그렇게 되겠지요 ? (웃음)

문애령-예,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요.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김혜식-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