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연극

여성적 삶의 재조명




이형식 / 건국대 교수

페미니즘 연극의 가능성

여성 문화 예술 기획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각색하여 일인극으로 무대에 올린 「자기만의 방」이 무수한 화제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내며 연장 공연에 들어갔다. 본격 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야심에 찬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더 많은 여성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주부만을 위한 오후 2시 공연과 놀이방 운영, TV 토크쇼 출연을 통한 적극적인 홍보 등-이 시도되었고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이번 공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또한 만만치 않아서, 전통적인 극형식을 탈피한 설교조의 극 진행이 얼마 되지 않는 남성 관객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안겨 줌과 동시에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평가 또한 주변에서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기존 관객과 평자들에게 문제로 제기된 것은 극화되지 못한 채 강연조로 관객들에게 직접 제시되는 메시지에 의존한 극을 과연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번 공연은 여러 가지 면에서 1960년대에 시작된 미국의 페미니즘 연극 운동을 연상케 하면서 진지한 페미니스트 연극의 정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이 미국 페미니스트 연극을 연상케 하는 첫 번째 요인은 그 동안 억눌린 여성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한 대본 쓰기의 공동 작업이다. 미건 테리, 마리아 아이린 모니스 등이 중심이 된 미국 초기 페미니스트 연극은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연극이 단일한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메시지라는 점에 착안하여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공동 작업을 통해 대본에 반영하였다.

「자기만의 방」 또한 번안하고 각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여성의 목소리를 수렴하여 대본에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이 초기의 미국 페미니스트 연극과 닳은 점은 남성적 형태라고 페미니스트들이 규정하는 전통적 사실주의 무대의 거부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사각의 무대에서 환상을 창조하며 정해진 플롯의 선을 따라 결말로 향해 가는 사실주의 연극을 남성적 형태라고 간주하며 관객자의 장벽 붕괴, 여성적 공간의 창조 등의 전략을 통해 공감을 유도해 낼 수 있는 여성적 틀을 추구했다. 이번 연극에서 사용된 밝은 조명의 사용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끌어내는 기법은 페미니스트 연극이 추구하는 미학의 반영인 듯 보인다.

셋째, 특히 남성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던 이야기 중심의 극 진행 또한 미국 페미니스트 연극이 걸어갔던 길이다. 언어 중심의 연극은 미국에서도 남성 비평가들로부터 너무 다변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자기만의 방」에서의 이 교수는 여성의 역할이 지금까지 듣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이제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항변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공연의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여성들의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데 있다는 점에서 여성 운동의 시초에서 볼 수 있었던 의식 고양(consciousness-raising) 작업을 연상케 한다.

상업성이 경계할 점들

비록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을 기본 틀로 삼고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을 한국적 상황에서 접목하려는 노력을 이 작품은 보여 주고 있다. 연극이 시작할 때의 물방울 소리와 한에 맺힌 여인의 흐느낌 소리의 이용은 생경해 질 수 있는 여성 운동의 입장을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접근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구체적인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이 극은 여성론적 관점이 바로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 페미니즘 비평과 운동이 걸어 온 다양한 입장들을 이 연극은 기술적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오류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듯하다. 서구 페미니스트 비평이 여성 이미지 비평에서 출발하여 여성 중심 비평으로 전환해 간 것처럼 이 연극도 우선 남성이 그려 왔던 전통적 여성 이미지를 해체한 다음 여성 중심 시각에서 그 동안 왜곡되고 등한히 여겨졌던 여성 작가들을 다시 바라본다.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드리엔 리치가 말한 다시 보기(re-vision)의 일환이다. 극의 시초에 가부장적 사고의 허구적 구축물로서의 여성 이미지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의 캐트리나를 제시한 후 오늘날 삶의 공허 때문에 자살을 택한 여인을 실제 여인으로 등장시켜 대조시킴으로써 이 극은 다시 보기의 패러다임을 설정한다. 여성 중심 비평은 춘향, 심청, 경아, 이화, 애마 부인 등의 이미지가 해체된 다음, 그 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재능 있는 여성 작가들의 논의에서 시작된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거바의 저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연상케 하면서 이 연극은 황진이, 허난설헌 등의 시대를 앞선 지적인 여인들이 왜 미친 여자, 무당, 마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의 양상들을 열거한다는 점에서 이 극이 취하는 기본 입장은 급진론적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의 역사와 계급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유물론적 입장 또한 이 극은 수용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이 작품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 토론과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중산층 여성들이 겪는 고뇌는 하층 계급의 여성들의 억압의 경험과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극은 스스로 다양한 목소리의 부딪힘을 연출하여 직선적이고 단일한 메시지 전달의 오류에서 벗어나고 있다. 남편의 돈이 곧 자신의 돈이며 모든 공간이 자신의 방이라며 여성론적 인식에서 멀어져 있는 부유층 여인과 공장에 가기 위해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출근했다가 화재로 자식을 잃은 여인의 경험은 성차에만 근거하여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격 페미니스트 연극을 표방하고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고 있는 이 연극과 이 연극을 제작한 여성 문화 예술 기획이 앞으로 계속적으로 페미니스트 연극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연극에 가해지는 비평의 소리에 또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연극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거부감은 곧 이 극의 특징과도 관계가 있는 설교조의 분위기이다. 강의식의 연극이 주는 거부감을 예상한 탓인지 극의 서두에서 "설득하거나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특히 남성 관객은)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가 없다.

특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교수는 관객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제스처를 사용하고 있어서 이러한 느낌을 더해 주고 있다. 강의라는 딱딱하고 남성적인 포apt을 취하여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시도는 비록 그것이 강력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주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페미니스트 연극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 같다. 아울러 이 극에서 여성적 경험의 재평가가 남성 문화의 해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현상일지 모르나 이 극이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기본적인 입장은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울프의 양성론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이다.

남성들에게 "입 닥쳐라 피곤하다"고 외치는 등의 장면에서 여성 관객들의 억눌린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어 박수를 받을지는 모르나 대사가 암시하는 남성 언술 행위의 억압은 결국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극의 많은 부분을 통해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을 이야기한 후(특히 이 교수의 어머니의 죽음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제시되는 양성론은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의 결론처럼 들린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수많은 억눌려 온 여성들의 고통이 표현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했다는 점만으로도, 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은 여성 관객들이 와서 듣기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여성론적인 메시지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 어떻게 전달하는가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페미니스트 연극이 초기의 실험적 형태에서 사실주의적 형태로 전환하여 극적 재미를 희생하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은 참고로 삼아야 할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영미 페미니스트 연극의 한국에서의 공연, 특히 「게팅 아웃」,「스티밍」 등의 공연에서 드러났듯이 여성만의 경험의 제시가 대중적 스타의 기용과 과다한 육체의 노출을 통해 왜곡되는 위험은 피해야 할 함정이다. 여성들이 자주적 삶을 살기 위해 경제력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듯이 여성 문화 예술 기획 또한 상업적 성공에 초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업적 성공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순수성의 오염과 진지함의 약화 또한 이들이 부단히 경계해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