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 전주

전북 미술과 온다라 미술관 휴관

-민족 미술 건강성 지키기 5년




김은정 /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

대부분의 예술 분야가 그러하듯이 오늘의 지역 미술은 서울에 비해 그 문화적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 지역의 문화 예술 분야는 재정적 여건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자생력을 터득하며 존속해 왔지만 서울과 각 지역간의 문화적 편차는 심화되어 주체적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크게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 와 있다.

전북의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예로부터 서화의 맥을 굵게 이어온 전북은 전통적인 선비 사상과 함께 서예와 문인화의 예맥을 근실하게 이어왔다. 그것이 학문이 중심이 된 여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아무튼 전북은 서화의 뿌리가 깊은 탓에 오늘에도 그 분야의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넓게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특징은 다른 미술 장르가 활성화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함으로써 전북은 꽤 오랫동안 미술 분야에서 서예와 동양화가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고 아직도 그러한 경향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70년대에 이 지역 대학에도 미술과가 생기고 그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창작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자연 미술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변하게 되었다. 특히 구상 계열의 미술이 각 장르를 지배하던 성향에서 벗어나 70년대 중반을 즈음해선 현대 미술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실험 의식이 반영된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미술 그룹이 하나둘 생겨나고 그룹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데 형식상의 다양함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관념적인 주제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 현실과 오늘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미술이 사회적 성격을 지닐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 지 않다.

올곧게 지켜 온 전북 미술

그러나 보수적 성향이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전북 지역에서 이러한 미술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기까지엔 짧지 않은 시간이 투자되어야 했으며 동시에 작가 자신들의 예술적 고뇌와 인내가 수반되어야 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7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현대 미술이 이 지역 미술계에 확실한 위상을 잡게 된 80년대 중반, 또 하나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술을 특권화 되고 신비화 된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담아 내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뚜렷이 인식시키는데 기여한 민족 미술 운동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민족 미술 운동이 지역 미술을 변화시키고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이어 낸 성과는 참으로 크다. 민족 미술 계열의 작가들은 길지 않은 연륜에서도, 그리고 숫자면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갖고 있는 독자성과 주체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미술이라는 양식에 의하여 감당해 내려는 노력을 올곧게 이어왔으며 그 결과로 적잖은 미술 인구를 끌어들이는 성과를 거두어 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두어들이는 데 가장 탄탄한 받침대 역할을 해낸 바탕은 지난 1987년에 문을 연 전주 온다라 미술관이다.

전북의 미술계가 전환기를 맞은 것은 80년대 말부터라 할 수 있는데 도무지 기업에서든 행정 관서에서든 투자의 가능성조차 기대할 수 없는 미술계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바로 민간 차원의 미술관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발표의 자리로서 창작 활동을 활성화하고 작가 발굴에 큰 역할을 맡고 나선 화랑은 전주의 온다라 미술관, 얼 화랑, 대성 화랑 등 3곳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다. 이들은 모두가 80년대 말에 개관, 길지 않은 연륜에서도 지역 미술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해 왔으며 그 동안의 활동으로 전북 미술의 오늘이 이들 미술관을 통해 규정지어지고, 이어지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그 위상을 뚜렷하게 부각시켜 왔다.

특히 이들 미술관은 각각 지향하는 미술의 성격을 확실하게 설정하고 꾸준한 기획전을 통해 그 건강성을 추구해 나가면서 미술의 고른 영역을 가꾸어 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주 온다라가 전북 지역 미술 발전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온다라 미술관의 발자국

지난 해 전북 문화계를 결산하는 시점에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부각 됐던 것이 온다라 미술관의 휴관으로 집약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전주 온다라 미술관의 지난 5년을 뒤돌아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온다라 미술관이 개관했던 1987년 말, 전북의 미술 판도는 새로운 미술 운동, 이를테면 실천 미술과 민족 미술이라는 흐름이 강하게 일고 있었던 우리 나라의 미술 현상과는 거리가 먼, 지금껏 그래 왔듯이 얼마쯤은 보수적인 전통 화풍이, 또 어느 정도는 실험 의식을 수반한 현대적 감각의 미술 양식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독특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몇몇 작가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 활동을 통해 민족 미술 운동을 견지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작업 성과들이 대중들의 몫으로 넘겨지기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 문화의 서울 문화권에 대한 상대적 소외감과 한계성을 극복하고 미술 인구의 저변 확대, 건강한 문화 매체 기능을 통한 바람직한 삶의 실현, 참다운 지역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내세운 온다라 미술관의 개관은 이 지역 미술의 물꼬를 새롭게 트이게 하는 하나의 획기적인 시도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7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현대 미술이 이 지역 미술계에 확실한 위상을 잡게 된 80년대 초반,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민족 미술 운동을 자리매김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바탕으로서 온다라 미술관은 그 중심의 자리에 나선 셈이다.

미술을 특권화 되고 신비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담아 내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뚜렷이 인식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낸 민족 미술을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이 지역 미술계에 전면으로 부각될 수 있게 하는 힘을 이어 낸 바탕이 바로 온다라 미술관이었던 점을 인식한다면 그것이 갖고 있는 이 지역 미술에 있어서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87년 10월 1일 개관을 기념한 '신학철 초대전'으로 문을 연 온다라 미술관에 대한 이 지역 미술인들의 관심은 특별했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건강한 미술을 향한 구체적 지향성, 이를테면 민족 미술을 중점적으로 수용해 나가겠다는 당당한 공간 운영 취지도 그랬거니와 이 열악한 환경에서 개인 차원의 화랑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경제적 적자를 감수 할 수 있느냐의 대한 호기심은(?) 지역 미술인들의 인식을 각별한 관심의 끈으로 엮어 놓는데 일단 성공한 결과를 가져왔다.

크지도 않은 화랑을, 가뜩이나 미술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유료로 전시장을 운영한다는 발상 자체가 설득력 없는 우려의 차원으로 비쳐졌을 때부터 이미 온다라는 이 지역 문화의 새 흐름을 주도하는 매체로 등장한 셈이었다. 이후 온다라가 기획하고 초대한 수많은 전시회와 강연이 과연 이 지역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를 더듬어 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짧은 역사에 긴 의미

신학철, 김경인, 황재형, 김호석, 임옥상, 이철수, 이종구, 송 창, 김정헌, 이인철, 최정현, 안창홍, 나상옥, 홍성담, 이석필, 김경주, 남궁산, 이명복, 김준권 등 우리 나라의 민족 미술 운동의 한 중심에서 온 작가들의 초대전과 그들이 중심이 된 단체 기획전을 통해 이 지역 관객들은 미술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불식시키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힘,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깨닫는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들 속에서의 미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그 전망의 토대를 또한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온다라가 이루어 낸 성과 중의 하나였다.

박민평, 박종수, 정현도, 이철량. 김두해 등 이 지역 작가 초대전 역시 같은 연상에서 그 성과를 가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수 차례 이어진 민족 미술 강좌는 또 하나의 미술 운동 차원으로 그 의미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의 미술 문화의 제도적 장치들이 지나치게 편협 되고 경직된 채 주체성 없는 시각으로 마름질되어 온 상황에서 온다라 미술관의 강좌 강연 등의 기획 작업은 미술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건강하게 접목시키는 새로운 자리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밖에도 온다라는 북한 사진전, 중국 목판화전을 비롯한 각종 기획전을 꾸준히 이어 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내는 작업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그런 까닭에 매 번의 전시회나 행사들이 어떤 성과를 거두어 냈으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세세히 분석해 내는 일은 사실상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차원에서 운영되었던 이 미술관이 이 지역 미술관에 지난 5년을 어떤 역할로 각인시켜냈느냐에 있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지금의 시점에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내려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가 중요한 만큼 80년대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오늘의 이 지역에 집약해 낸 온다라의 역할을 점검하는 일은 그만큼 절실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온다라 미술관에 초대되어 작업의 결실들을 성실하고 겸허하게 보여 주었던 많은 작가들, 열악한 재정 여건에서도 당당하게 당초의 취지를 살려 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미술관 일꾼들의 열정은 이 지역 미술을 새롭게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해 낸 것이 사실이다.

이 지역 미술인들과 온다라 미술관을 아꼈던 수많은 이 지역의 문화 예술인들은 그래서 온다라 미술관이 우리 80년대 미술의 흐름을 제대로 수용해 낸, 또한 전북 지역의 미술 속에 그 흐름을 과감하게 끌어들인 메체로서의 역할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한결 같은 입장이다.

더불어 온다라 미술관의 고사동 시절 마감을 아쉬워하면서도 끝내 안타까워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더욱 건실한 면모로 새롭게 선보일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 열악한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버텨 왔던 그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다라 미술관은 2년 계획으로 새로운 공간을 마련, 다시 문을 열 계획이다.

그때쯤이면 이 지역 미술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온다라 미술관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