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미술

생리적 예술의 한계




이용우 / 미술평론가

실험과 모방 사이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났던 이른바 '새로운 것'들의 대다수는 서구의 철 지난 것들의 '변형' 내지는 한국적 소재의 가미 정도로 등장했던 예를 우리는 다수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도입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미술이 가지는 최대의 치부요 구조적 모순이기도 하다. 비록 이 같은 문제점이 '우리에게도 모더니즘 시대가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낳게 하고, '자생적 미의식의 발현의 시대'라는 수사학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의 구조적 성찰의 계기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모습은 오늘의 화단에서의 예외는 아니고 40세 미만의 젊은 세대들에서도 너무 쉽게 발견되어져 전세대의 모순이 유전적으로 대를 물리는 것 같은 인상 마저 든다. 공모전에서의 모방 시비는 차라리 밖으로 드러나 수술이 가능하고 치유될 부위가 쉽게 노출되지만, 교묘한 변형은 우리의 진지한 창작마당에 무국적의 '세련된 목소리'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80년대 현대미술에서 한 동안 휘몰아쳤던 신표현주의적 분위기나 트랜스아방가르드의 아류,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고 등장한 각종 표현들이 그것이고, 90년대 들어 패스티쉬, 키치, 패러디,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자연주의 등 서구 용어나 형식에 벗한 작업들이 그것이다. 가령 80년대 우리 미술이 60∼70년대의 편협했던 표현양식으로부터 자의적으로 탈출하여 분방 한 행동을 보여주었던 긍정적 측면도 있었으나 그 가운데 얼마나 '건강한 한국미술의 80년대'를 가꾼 형식이 존재해왔는가는 단언키 어렵다. 특히 90년대 들어 후기산업사회 속에 나타난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서구사회가 선험적으로 겪었던 체험들을 조형적으로 풀어본 것과 판이하게 다른 의미로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다문화주의적 경향이 우리에게 직접 대입되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 사회적 운동으로 나타난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직접 대입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공업화 정책 일변도에서 나타난 한국사회의 모순과 기층민중의 탄생, 과소비와 향락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지위 문제, 핵가족화로 인한 여성의 역할 등 우리에게도 미국식 페미니즘의 의미론으로 대입시킬 소재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미술에 나타난 페미니즘의 형식은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는 미국식 페미니즘의 아류이거나, 조형적으로도 모방성이 강한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권 신장을 위한 미국의 사회운동이 아니라 다분히 폭력적이면서도 남성 중심의 정치 사회구조에 대한 대항 문화적 성격으로 나타나 미국에서의 탈모더니즘 운동의 기수로 판명됐던 흐름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해외 미술의 수용과 경계

최근 우리 화단에는 테크놀로지나 산업사회의 소재를 다루는 미술 형식들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한때 '가상의 실재(Virtual Reality)'가 국내에 도입 소개된 예도 있다. 예술이 일상성을 소재로 하되 일상을 비교적 유쾌하게 떠난 또 다른 목소리라고 본다면 독창성은 예술이 갖는 필수요소이다. VR 산업이 21세기의 주요 기술패턴으로 등장 할 것은 예상할 수 있으나, 이제 초보단계인 우리 기술로 예술적 흉내내기를 해서는 예술 경쟁 무대에서 뒤떨어지기 십상이다.

테크놀로지 예술만 해도 그렇다. 조각에 키네틱의 개념이 도입되거나, 바람과 물 등 자연 소재에 의해 예술에 기술 개념을 도입시킨 것은 이미 50년 전의 일이다. 서구 미술이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적극적으로 대입하면서 최근에는 컴퓨터와 홀로그램 다이오드 작업에 이르기까지 광의의 테크놀로지에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우리의 취약점은 엔지니어들이나 과학자들이 예술과 조우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들이 겪는 고충은 말이 아니다. 따라서 기술을 예술에 대입시켰다는 상징적 의미만 살아있을 뿐, 기술의 다양한 변주를 예술로 치환시킬 능력을 예술가들이 가지지 못한다.

이 점에서 비디오예술의 창시자 백남준은 더욱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비디오를 예술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는 비디오 박사들보다 실물 이론에 더욱 밝기 때문인 것이다. 앞으로 테크놀로지 예술은 우선 그룹을 형성하거나 연구기관과 교류를 통해 기술적으로도 완숙한, 예술적으로도 기술자들의 한계를 극복한 창의력이 나오지 않고는 이른바 서구 테크놀로지 미술의 뒤치다꺼리 수준에 머물고 말게 된다.

미국미술은 수사학의 천국이라고 불리 울 만큼 이즘도 많고 또 그 이즘의 타당성에 따라서는 별다른 논란 없이 활용한다. 그 배경에는 국제현대미술의 선도자라는 미묘한 자긍심을 그들 스스로가 지키기 위한 방어적 수단이 깔려 있다. 때문에 80년대부터 10여 년 간 지금까지 등장한 용어만 해도 신표현주의,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자연주의, 환경주의, 다원주의 등 수없이 많다. 이 가운에는 매우 국지적인 현상을 과대 포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가 이 같은 용어에 굳이 익숙할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선도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일 때는 이미 더 이상 실험의 차원이 아닌 상업 화랑의 쇼 윈도우에서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미국미술이 시장의 몰락으로 정신적 공황기를 주고 있다는 표현은 매우 비판적인 것이기는 하나 최근 들어 이 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80년대를 통해 예술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기능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면서 이제 예술은 사회현상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 돼버렸다. 그것은 예술의 소재가 삶과 밀착된 가장 현실적이고 실체적인 것으로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친 포장에 과민 반응을 보인 주요 이론가들의 합일된 의견에서 나온 제3의 생산물인 점도 있다. 게다가 탈냉전 탈이데올로기의 긴박한 무드, 환경오염과 산업사회에 대한 현실적 시각, 기계주의에 함몰돼 가는 인간의 모습, 대중소비사회에 대한 고발 등 현실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과다한 얼굴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주제의식이 비교적 투철한 이 같은 예술형식들은 미국의 경우 영향력 있는 미술관들에서 기획전을 통해 저널리즘들이 추인 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이제는 '지나치게 생리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벽에 부딪치고 있다. 게다가 유럽권에서 이 같은 형식에 대해 비교적 담담한 것도 큰 이유로 작용되고 있다. 이즘에 종속된 미술형식이라는 것은 늘 부분적 메시지에 충실한 대신 유행의 물결을 탄다는 사실이다. 특히 구조적 현실에 대한 탄탄한 인식이나 구체적 사고 없이 부분적이고 생리적 현상을 추종한 미술형식은 대개 생명력이 결여돼 있다.

해외 미술 정보의 활발한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미술 행위의 공유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외국의 현상이 우리 미술계에 즉각 영향을 미치는 현상 또한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자생적 한국미술, 한국미의 주체적 발현이나 전개를 주창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긍정적으로 전개되면서 우리 화단도 어느 정도 걸러진 풍토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이 때로는 미술의 국수주의, 전통을 답습하는 문화재 미술과 같은 피곤한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아 넘기는 아량도 필요할 것 같다.

해외미술의 활발한 전개 양상은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 우리의 현실과 적절히 부합하는 연대감이 형성될 때 활발한 교류의 채널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 문화의 생리적이고 즉물적인 답습이나 모방은 우리의 정신적 힘의 고갈을 초래하는 말초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