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문학작품 번역의 몇 가지 문제점




최 윤 / 서강대 교수

번역이란 무엇일까. 타문화, 타언어의 정보가 거의 순식간에 번역되어 일상으로 파고 들어오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질문은 불필요하고 고답적으로 들린다. 더욱이 문학작품의 번역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가 통역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기술적인 정보, 혹은 전문적인 지식의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문학작품의 번역을 구별하는가. 실제로 통역 기계나 자동 번역기의 발명이 첨단화되는 이즈음에 바로 문학작품의 번역은 어쩌면 그러한 기계적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단 하나의 영역일 수도 있다. 어떻건 문학작품의 번역은, 언어학, 문학 비평, 더 나아가서 비교문화 인류학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매우 복합적인 대상으로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은 번역학의 중심 연구 분야이다.

바로 이 문학 작품의 번역에 관계되는 몇 가지 문제를 여기 접근해 보고자 한다. 제기될 문제는 외국어로 쓰여진 문학 작품을 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나, 국어로 쓰여진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1)

번역은 일종의 법칙 없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탈피해, 번역이라는 것이 하나의 언어, 문학 체계를 또 다른 언어, 문화 체계로 전이하는, 제한과 법칙이 있는 활동으로 보고 언어학적으로 번역 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던 구조주의 언어학자 죠르쥬 무넹의 사고에, 번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2)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한 언어(국어)의 체계를 또 하나의 다른 언어(외국어)체계로 이동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번역을 하는 동안 번역자는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일차원으로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 즉 번역자는 동시에 언어학자적인 시선으로 번역어의 출발어와 도착어의 언어적 수준이나 문체를 포착하며, 번역대상 작품을 문학비평가가 보듯이 세밀히 분석하게 되며 일단 작품의 독창성과 특징이 되는 다양한 요소들의 고려를 최대한 확대하고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도착어의 체계 속에 재구성하는 작가적인 기능으로 도착어의 문학 작품을 쓰게된다. 이 중의 어느 한 기능이 결여될 때 번역의 불균형은 전문적인 독자에게 즉각 결여로써 감지된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조건이며 그 요구의 폭이라는 것이 무한할 수 있으나, 번역 자체가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생산될 수 있는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번역의 두 가지 태도

다양한 논의들을 보면 번역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위베르 니쎈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자우월주의 (le litteralisme)와 문학우월주의 (le litterarisme)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3) 흑은 전자를 자의적(字意的) 번역, 후자를 문학적 번역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문자우월주의 번역은 원어의 모든 언어적 특성을 글자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때 번역자는 완벽하게 원어의 원문에 의지한다. 번역된 언어로는 생소해 보이는 언어적, 구문적, 작품 구성상의 문제는 물론이며, 더 나아가서는 원작품에 나타난 이상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원전만을 중시하는 번역의 태도이다. 여기에서 번역된 작품은 그 나라의 독자에게 외국 문학이 지니는 생경할 수도, 때로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특수한 국면을 감추지 않는다.

반면 문학주월주의 번역의 태도는 번역된 작품이 지닐 수 있는 문학성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번역자는 거의 작가적인 기능을 다른 어떤 기능보다 확대하여 담당하게 된다. 즉 한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인 측면은 번역된 언어의 수준에서 이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번역 작품을 읽을 그 나라의 독자들에게 작품의 에스프리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며, 이 경우 외국 문학이 지니고 있는 생경함은 감추어져 있게 된다.

첫 번째의 문자우월주의 번역만을 고수할 때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이해 불가능한 번역 작품이 생산되며, 어의에 충실한다는 명목으로 작품 전체의 구성력과 언어 요소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고려하지 못하는 번역자의 능력 부족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문학우월주의는 번역에 정열을 가진 많은 전문 번역가들의 첫 번째의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태도도 많은 문제점을 배태하고 있다. 번역된 작품을 읽을 독자에게 하나의 문학 작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고집은 그것이 한 작품의 독자적인 특성이나 외국 문학 작품으로서 문화적 차이, 언어 구조상의 차이, 사고구조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학작품의 번역은 어쨌든 문학성을 지향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번역자의 대부분은 두 번째의 번역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의 태도가 극단화되어 나타난 번역은 엄격한 의미에서 번역이 아니다. 원어의 특수성이 나타나지 않고 그 생소함의 문제를 번역 과정에서 해결하는 대신 번역어로 된 하나의 작품을 읽는 만드는데 주력할 경우, 그때 출발어가 한국어이건, 일본어이건, 또는 중국어이건, 번역어로 이들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커다란 상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실행되어져 온 바 있으나, 좋은 번역을 위해 기필코 피해야 하는 하나의 번역의 편법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바로 교열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번역 작업이다.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번역자가 일차적인 번역을 한 후에, 도착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그 일차 번역의 문법적 실수를 수정하고 문학 작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꼴을 갖추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작품이 바로 잡아지는 경우보다는 출발어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특성들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문법적 정형성을 이유로 지워지고 수정되어 버리는 사례가 너무도 종종 발생하게 된다. 출발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교열을 맡을 경우, 그가 번역에 대해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열은 단번에 일차 번역자와 교열자와의 공동 번역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그만큼, 작품의 한 구절, 한 구절은 그것이 출발어 자체에서 번역상 문제를 제기하고, 그 속에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꼭 고려되어야 하는 수많은 의미의 잠재태가 내재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출발어에 대해 아무런 지식을 지니지 않은, 도착어를 모국어로 지닌 사람을 교열자로 선택했을 경우, 타문화에서는 생소할 수 있는, 출발어의 수많은 특성들이 단순한 이상함으로 치부되어, 비문학적인 것으로 단번에 수정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내용의 전달만이 문제가 되는 기술적인 번역에 있어서 그토록 유효한 이 제도는 문학 작품의 번역에 관한 한 오히려 많은 함정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언어권, 문화권의 차이점과 독창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그것을 번역 속에서 소화해 낼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문제는 한 작품이 지닌 문학성(la litterarite) 자체이다. 언어학자이자 시학자인 야콥슨에게서 시작되어 작품의 분석이나 비평에서 영원한 문제로 제기되는 이 문학성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번역 과정에서 가장 생생하고도 과학적으로 전문 번역인들이 맞닥뜨리는 문제일 것이다. 야콥슨은 문학성을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이게끔 해주는 특성들이라고 했다. 한 작품의 어조, 어휘의 선택, 문단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언어 수준(Ie niveau du langage), 상징 구조의 통일성, 구조 ‥‥‥ 각 작품이 독창성을 지니게 되는 이 무수한 문학적인 변수들이 바로 문학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출발어인 한국어가 지니는 문학성의 다양한 특성들이 인지되었으면 그것은 도착어인 외국어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어떤 형식이나 뉘앙스를 통해, 어떤 특수한 문장의 구조를 통해 한 국어 작품의 문학성이 드러나는지를 간파하는 작업은 또한 외국어의 번역문 속에 나타나야 된다. 이 과정에서도 메쇼닉이 한 언어의 다른 언어의 병합(1'annexton)이라고 부른 것을 경계해야한다.4) 원어이건 번역어이건 한 언어, 문화에 우월성을 주어 번역에 임하는 것이 병합이다. 병합에 의한 번역에서 원어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은 사라져 없어진다. (번역에 있어서의 문학성의 문제가 크게는 문화 인류학의 범주와 많은 맥을 닿고 있는 이유도 바로 번역이 두 문화의 관계의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또안 베르만이 번역의 냄새가 나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니지만 번역의 흔적이 없는 모든 번역은 당연히 나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입장이다.5)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한 작품의 고유한 문학성이 도착어에서도 구조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번역에 대한 우려이고, 우리는 오르테가 이 가제트나 벤야민도 이와 같은 번역 태도를 옹호함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무수한 번역이 원어의 많은 문학성을 절단하면서 이루어지며, 특히 시 장르처럼 한 언어체계의 내적인 정서와 리듬 자체를 매시마다 다양하고도 독특하게 형식화하고 있는 장르의 번역은 번역자에게는 가장 어렵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도전이며, 가장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표출되는 확률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번역이 주는 원어의 상실을 실례를 통해 문제 삼으면서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임을 강조하는 유종호의 입장6)은 시의 번역의 출발어에의 충실, 그리고 시의 번역에서의 완성도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에 해당되는 문제임은 말할 여지도 없다.

예술품으로서의 번역

그렇다면 하나의 번역문학 예술품의 탄생은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번역에서의 완성이라는 것은 늘 상대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이다. 그리고 바로 번역으로도 문학 예술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도착어를 모국어로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한계가 분명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외국어로 나의 글을 쓰는 일은 가능하다. 언어적 제한이나, 의미구조, 뉘앙스들을 내가 선택하고 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진정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학작품은 사전적인, 일반적인 글에서 볼 때 늘 정형성에서의 문체적인 일탈을 통해서 독창성, 문학성을 표출한다. 유머나 희극이 번역이 어려운 이유가, 이 장르들이 바로 언어의 정형성에서의 일탈에 장르적 특수성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비교적으로 생각하면 쉽사리 이해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도착어에서 이 요소들을 표현해 주는 일인데,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이 다양한 일탈의 표현성을 모두 나타내는데는 얼마나 많은 한계가 있을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특히 세계의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겨우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 문학의 경우 현재 단계에서 이상적으로 택할 수 있는 번역의 방식은 두 개의 언어를 각각 모국어로 하는 두 사람의 공동작업이다. 우리의 언어 체계와 문화를 알고 있으며, 번역의 도착어를 모국어로 지니며, 문학에 대해 위에 언급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의 공동 작업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많은 난점이 있다. 첫째는 많은 시간의 소요이며 실제적으로 이상적인 공동작업의 실제적인 조건들이 생각처럼 쉽사리 만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외국인 문학 전문인의 확보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공동 번역 작업의 중요성

외국의 성공적인 번역 문학 작품들을 통계적으로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대표적인 번역의 대부분이 도착어를 모국어로 쓰는 외국 번역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게 된다. 번역 문화가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프랑스어권으로 예를 한정해 보면, 이 같은 현상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외국 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데 그들 또한 무수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공동번역으로 성과를 이룬 작품들도 적은 것은 아니지만, 원작자의 명성만큼이나 번역가로서의 명성이 언급되는 것은 역시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지니는 사람에 의한 번역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번역가라는 둘 이상 문화의 전문가들이 미국, 일본, 남미, 북구의 수많은 작품들을 걸작 번역 작품으로 만듦으로써 독자들과 문학 전문인에게 무한한 지적 영향을 끼쳤다. 미국 작가 포크너의 번역이 미국 사람에 의해서 불어나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또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성공적인 불어 번역은 일본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포크너의 작품을 너무도 기가 막히게 번역한 모리스 에드가 꼬엥드로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불어 번역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파리조, 「수호전」을 번역한 쟈크 다르쓰 같은 프랑스인 번역자들의 작업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무엇이 이들 외국 문학인을 전문적인 번역자, 나아가서 외국 문학의 대사로 변화시켰을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발굴한 문학 작품과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정열이겠지만, 영국이나 미국처럼 접근이 수월한 문화와는 달리 동양권의 문학이 그 같은 정열을 부추기기에는, 좀더 장기적이며, 세계의 문화대에 민감한 문화적인 기획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한 나라의 문학의 세계화가 어차피 번역 작품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가능하다고 할 때,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권의 질 높은 외국 문학인의 전문적인 관심을 야기 시키면서 하나의 한국 문화대를 장기적으로 형성했을 때 진정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일본이 이미 반세기 전부터 인식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시인은 모국어로만 시인일 수 있다'는 확인을, '번역자는 자신의 모국어로만 번역자일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 대상 작품의 언어(여기서는 한국어)를 출발어(la langue du depart)로 번역된 언어인 외국어(예를 들어, 불어)를 도착어(la langue d' arrivee) 혹은 번역어로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하 언급되는 번역이라는 단어는 반복을 피해 문학 작품의 번역을 지칭하기로 한다.

2) Georges Mounin, Les Preobliemes theoriques de la traductuon.)

3) Hubert Nyssen, Editeur et son double, Actes Sud, 1988.

4) Mechonnic, Pour la Poetique, Gallimard, 1973.

5) Antoine Berman, I'epreuve de I'etranger, Gallimard,1984.

6) 유종호, 시인과 모국어, 「현실주의 상상력」, 나남 출판사, 나남,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