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해외선양 사업을 위한 건의
서지문 / 고려대 교수
한국문학 번역 사업의 필요에 대한 인식은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고조되어 왔는데, 실지로 번역사업에 대한 지원은 문예진흥원이 전달하다시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작년 말 대산재단에서 한국문학의 해외 선양을 위해 55억 원을 출연한다는 반가운 폭탄선언(!)이 있었고, 올해에는 몇 개의 유명 국내 출판사들이 이 사업에 참여할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번역 사업에 실지로 참여도 해 보았고 또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 사람으로서 이 많은 투자가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현명한 판단과 치밀한 계획 하에 진척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염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번역의 성패의 첫 번째이며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원작의 선정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나라 작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가(또는 그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아직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문학 작품이 아직 충분한 수량이 번역되지 않았고, 또 번역된 것도 질적으로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아서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우리 문학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충분히 번역만 되었으면 우리 나라가 벌써 노벨 문학상을 탔을 것이라든가 또는 우리 나라에 노벨 문학상을 탈 만한 작가들이 얼마든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번역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흡했다는 생각에는 동감이다. 무엇보다도 그 미흡한 양 중에도 상당량은 순전한 낭비였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번역 작품의 선정 문제
우선 원작의 선정이 한국 사람이 보기에도 매력이나 가치가 별로 없고, 외국인들에게는 더구나 지루하고 졸렬하게 느껴지질 수밖에 없을 작품인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외국인 독자들의 문학적 수준과 취향이 각양 각색이므로 어느 작품이 외국인의 입맛에 맞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동양 문학이 서양 독자의 취향을 전전긍긍하며 맞추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흥미와 감각과 이해를 배양해야 할 사명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국의 일반 독자에게도 그 문학적 가치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작품을 우선적으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나라의 번역 사업의 경우, 문예진흥원처럼 번역자가 대상 작품을 선정해서 지원 신청을 한 것을 심사해서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위촉을 하는 출판사나 재단측에서 번역 대상 작품을 선정을 해서 번역자에게는 그냥 매 당 얼마의 번역료를 지불하며 '임금노동'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작품 선정은 국내 유수의 평론가들에게 위촉을 하여 선정을 하고, 이 사실을 그 사업의 권위를 높이는 선전자료로 잘 활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평론가라 하더라도 국문학자들의 국제감각이 늘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작품이 외국인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제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는 외국인 독자들의 저항이나 타성을 뚫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는 작품인지는 아무래도 외국 문학 작품과 늘 더불어 사는 번역자들의 감각이 좀더 정확하기 쉬울 것이다. 또한 번역자들이 스스로 번역하고 싶은 애정과 열의를 느끼는 작품을 번역하는 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번역하는 경우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물론, 번역자라고 해서 감각이나 취향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고, 번역자의 역량 또한 의욕이나 열의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번역 사업을 하는 기관이나 단체는 먼저 번역자를 심사 숙고해서 선정을 하고, 작품 선정은 번역자와 평론가들이 함께 숙의해서 상당 기간을 두고 재독을 하고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을 가는 것이 옳다.
이런 말은 하면 욕이 돌아올 것이 뻔한 말이지만, 번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번역을 하고 싶은 '탐 나는' 원작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애석하고 기운 빠지는 일이다. 우리나라 작품에는 깊은 감동을 주면서 작가의 인생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함께 치열한 정의 의식과 인간에 대한 폭넓은 연민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 매우 적다. 문단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도 사건의 전개도 억지스럽고 인물도 깊이와 개성과 복합성을 지닌 생생한 인물이 아니고, 대화나 묘사도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음미할 재치나 여운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이 책임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암울했던 근세사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정과 불의와 비리가 팽배한 현실 때문에 작가들은 자신들의 일차적 사명이 현실 비판에 있다고 인식하고 그것에 주력해 온 것이 무리가 아니다. 또한 현실 고발적인 작품들이라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고 논의의 대상이 되기가 용이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나라의 많은 신진, 중견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가 현실 고발 소설이 되었고 그것은 특권층에 의한 서민의 억압과 착취라는 공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었다.
물론, 어떠한 주제나 공식도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는 생생하고 감동적이며 독자의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79년대, 80년대에 나온 우리의 사회고발 소설들은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서 몹시 읽기가 빡빡하고 작품을 읽고 느끼는 분노 같은 것도 다분히 의무적인 것일 때가 많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현실 감각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국제적으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선명히 구분된 사회고발 소설은 예외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아니고는 이미 산업화 과정, 권력 전횡의 피해를 다 겪었고 그 병폐를 고발한 소설도 무수히 읽은 외국 독자들의 각별한 관심들 끌기가 어렵다.
한국 작가,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불만은 많지만 내가 정말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여 번역해 보고 싶은 대작도 있고, 이런 작품은 정말 실력 있는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을 해서 세계 시장에 내놓으면 노벨상이 훨씬 가까이 다가올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김칫국부터 마시는' 식으로 민망스럽게 노벨 문학상을 자꾸 거론하지 말고 순수한 문학적인 사랑과 정열에서 모든 번역자가 최선의 번역을 하는 것이 순서다.
어쨌든 최근 몇 개월 사이에 한국문학 해외 선양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 기관들이 몇 군데 생긴 것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기관들이 모처럼 뜻을 세우고 많은 자금을 기울여서 애국적인 사업을 하려함에 있어서는 신중하고 지혜롭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최근에 어떤 국내 유수 출판사에서 자기네 사업에 번역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그 출판사가사업을 진행하는 방법도 이제까지 다른 개인 사업체들이 하던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평론가들에게 의뢰해서 선정한 작품을 가능한 최단 시일 내에 번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번역자의 선정도 중요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또 한 해가 허무하게 흘러갔다고 허탈해 하는 상황에서 한국문학 해외 선양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조급한 마음을 갖는 것은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급한 작업으로는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오기가 지극히 어렵다. 물론, 번역하는 일을 창작하는 일처럼 영감이 떠오를 때에만 할 수는 없다. 또 마감 기일의 압력이 전혀 없을 때에는 양적인 진전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소홀해 지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사역 노예처럼 컴퓨터 앞에서 수십 페이지를 숨돌릴 틈 없이 번역을 해내야만 할 때에는 기계적인 직역이 되기가 쉽고 그 작품의 묘미, 독특한 분위기, 인물 성격의 복합성들을 살려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며칠 동안의 집중 작업으로 해내는 단편에서는 간혹 가능할 수도 있으나 몇 달을 매달려야 하는 장편에서는 데드라인에 계속 쫓기면서 훌륭한 번역을 해낼 수가 없다.
실지로 번역을 해 보면 번역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원작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별로 막힘 없이 한번 초역을 하고 한번 다듬으면 웬만한 수준급의 번역이 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애간장을 말리면서 초역을 해서는 또 심혈을 기울여 몇 번씩 다듬고 손질을 하고 해도 영 작품의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않아서 불만스럽고 매끄러운 영어로 완성이 되지 않아 속상한 그런 작품도 있다. 같은 번역자가도 이렇게 원작에 따라 작업의 속도가 달라지는데, 모든 번역자에게 어떤 평균 속도를 상정해서 번역을 위촉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업의 의의를 깎아먹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작품 선정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번역자의 선정이다. 이제까지의 번역이 양적으로 보잘것없는 중에도 낭비가 많았던 것은 원작의 탓도 많지만 번역자의 능력 부족과 소홀의 탓도 결코 그에 못지 않다. 한국인 역자의 번역인데도, 어떤 미망인이 타오르는 육체의 열기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칼로 찌른, 그 작품의 중심적 상징인 상처를 무슨 사고를 당해 입은 상처인 양 처리해 놓은 번역를 비롯해서 오역과 졸역의 예는 무수히 많다. 심지어는 장편 속에 한 문장이 제대로 영어 문장이 되지 않는 그런 번역을 한 사람이 번역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의 상을 수상한 일도 있다. 이런 번역이 나온 것은 그 번역를 위촉을 하고 출판을 하는 기관에서 정말 그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어떤 중요작가의 문제작을 영역을 해서 출판을 했다는 '실적'만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번역 사업을 시작한 기관들이 종전과는 다른 각오로 임하지 않는다면 돈 들여서 우리 나라 문학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번역이 또 나을 수 있다.
번역을 위촉하는 측에서는 한국인 번역자에게 위촉하는 것이 좋을까 외국인 번역자에게 위촉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 번역자들은 종종 외국인은 절대 한국문학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한국문학의 정서와 향기를 살리는 번역을 할 수가 없다고 주장을 하고, 외국인 번역자들은 한국인 번역자의 번역은 영어가 너무 어색해서 독자가 읽다가 집어던지게 된다고 말들을 한다. 이것은 물론 양쪽 다 경쟁 심리에서 나온 비꼼과 과장이 섞인 말이지만 전적으로 사실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필요한 것은 한국인 번역자, 외국인 번역자 양쪽에 다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에 대해서 시인을 해야 한다.
외국인 번역자, 한국인 번역자들이 각기 범한 오역의 유형에 대해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이 잡지의 작년 5월 호에서 논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논하지 않겠다. 우리 문학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한국인, 외국인 중에 누가 더 번역을 잘한다던가 누가 더 부적격이라든가 하는 논쟁이 아니고 한국문학을 사랑하고 아끼고 해외에 제대로 인식을 시키고싶은 열의를 가진 한국인, 외국인 번역자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서 훌륭한 번역들이 나오도록 힘을 합하는 일이다.
언어의 공동 작업
완벽한 작가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번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완벽을 향해 부단히 정진을 해야 하듯이 역자도 완벽을 향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서로 마음이 맞는 우수한 한국인 번역자와 우수한 외국인 번역자가 협동 작업을 한다면
가장 완벽에 가까운 번역이 나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래서 공연에서 한국인이
초역을 하고 외국인이 다듬는 작업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원작의 뜻과 정서를 최대한으로 전하면서 또 매끄러운 영어로 완성이 될 가능성에 최대한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을 그냥 한번씩 거쳐서는 안 되고, 두 번, 세 번 교환을 해서 읽고 숙고를 하면서 원작자의 의도가 전달이 되고 번역자가 목표한 때로는 섬세한, 때로는 세련된, 때로는 대담한 전달이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교포 2세가 그러면 한국인과 외국인의 몫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이상적인 번역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번역은 언어의 구사 능력만으로 제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한국인이고 한국말을 일상어로 쓴 사람이라도 한국인과의 공감대, 한국인 정서의 이해는 오히려 한국에 짙은 애착을 갖고 있고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외국인보다 못할 수도 있다.
사실 한국에 나서 자란 사람 중에도 젊은 세대는 한국말도 마치 외국말을 잘못 쓰듯이 틀리게 쓰는 사람이 많고 우리의 토속적인, 전래적인 표현이나 상용구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가증하는', '염원하는', '범람해진' 등의 단어를 당연한 듯이 사용하는 젊은이들은 문학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한강에라도 가야겠다'고 하면 한강에 뱃놀이를 가겠다는 한가로운 심경으로 해석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한국에서 자라고 생활하지 않은 교포는 번역에 있어서는 준외국인으로 간주함이 옳다.
한국인 번역자와 외국인 번역자의 공역 팀이 짜여지기 위해서는 외국인 번역자들과 한국인 번역자들이 자주 만나서 접촉을 갖는 것이 좋다. 아니 반드시 공역 파트너를 구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같이 외롭고 힘든 작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를 하고 또 서로 어떤 작품을 번역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서, 번역의 중복을 피한다던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작가를 집중적으로 번역할 계획을 세운다던가 하기 위해 자주 만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연말에 하와이에서 열린 한국문학 영역자들의 회의는 지극히 성과가 많았고 고무적이었다.
멀리 보는 지원 사업을
이번 하와이에서의 회의는 애초에 한국 고전 문학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기획된 것이어서 규모는 그 전 해 시애틀에서 열린 제1회 회의보다 작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좀더 짜임새 있는 회의가 되었다. 발표는 번역 전반에 걸친 원론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나 또는 자신이 한국문학을 영역을 하다가 부딪힌 각종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관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영역을 하는 사람들이 부딪친 문제가 비슷하기 때문에 그것은 서로에게 약간의 참고 내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문제들은 매 경우마다 각기 가능한 최선의 대안을 생각해 낼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보다는 문학 번역이라는 수고하는 양에 비해서 성과나 보람이 눈에 뜨이지 않는 고된 작업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고 매달리는(우매한) 사람들이 자신 이외에도 꽤 있다는 사실의 확인해서 오는 사기 앙양이 이런 회의의 가장 큰 성과이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인, 외국인 번역자들이 만나서 우의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값진 보람이었다. 서로 중복 번역을 피하고 출판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국제한국문학학회'를 결성했고, E-mail 통신망도 개설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참석자 중에 미국의 초등, 중등학교 교재개발위원회에 있는 교포가 있어 대학생이나 일반인 대상이 아닌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레벨에서 읽히고 소화 될 수 있는 한국문학 작품을 발굴, 번역하기로 결정한 것도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였다.
앞으로도 매년, 또는 더 자주 한국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우의도 다지고 정보도 교환하고 공동 번역 팀도 결성하게 된다면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 큰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외국인 번역자들이 한국의 정서를 좀더 잘 이해하고 익힐 수 있도록 6개월이나 1년씩 우리 나라에 와서 문단의 동향도 감지하고 작품도 읽고 한국문학 학자들과 그 의미를 토론도 할 수 있는 연구비 같은 것을 가능한 한 많이 마련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문학이나 한국학을 전공한 외국학자들이 자기 나라의 대학에서 전공을 살려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외국의 대학에 한국학 강좌, 교수직 설치에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힘을 쓴다면 장기적으로는 가장 효과적인 한국문학 선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는 상당수의 대학들이 동양학과에 한국학 과목들을 개설하고 적임 강사들을 찾고 있다. 물론 미국의 전체 대학 수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적은 숫자지만 그래도 80년대 이전과 비교를 한다면 몇 배, 아니면 몇 십 배의 대학에서 적어도 한국에 대한 절대 무지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런 의지는 여러 번 벽에 부딪치면 꺾일 수가 있는 것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정부에서는 재정과 인력의 투자를 해야 한다.
한국문학 해외 선양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번역자로서의 주문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들에게 감동의 명작을 써 달라는 것과, 지원사업을 벌이는 개인과 기관들에게는 성급한 투자를 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리고 반드시 역자와 함께 멀리 앞을 내다보는 계획을 세워서 효율적인 사업을 하기 바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