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 문학의 흐름
유유정 / 시인·일본 문학 연구가
패전의 혼란과 문학세대의 공백
'현대 일본 문학'이라고 할 때, 일본 문단에서는 1945년 이후의 문학, 곧 2차 대전의 패전 이후의 문학을 가리키며, 따라서 그 이전의 문학, 곧 메이지 개국부터 2차 대전 중까지의 문학을 '근대 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는 일본 현대 문학의 현황을 개관하고 나아가서 새시대의 전망을 짐작해 보기로 하려는 바, 지면의 여유가 없어서 주마간산 격이 될까 보아 송구스럽다.
2차 대전 후 일본 문단에 등장한 주요 작가 약 85명을 연대적으로 대충 분류하면, ① 제1차 전후파 ② 제2차 전후파 ③ 제3의 신인 ④ 이시아라·가이코·오오에의 시대 ⑤ 내향의 세대 등의 그룹으로 분류되며 대개 이런 등장 순으로 논의되고 있다.(소네 히로요시의 일람표에 의함)
비평가 소네 히로요시는 "40년대 중반 태생의 작가가 거의 없다, 아니 전무하다는 사실(일람표에 의하면 2차 대전 후 현재까지에 등장한 주요 작가 80여명 중에), 1938∼1942년 5년 간(전쟁 중)에 출생한 작가가 한 사람도 없다"고 지적하고 "이 사실은 현대 일본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지나 않을까"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이점,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한국의 이 시기의 작가 배출 상황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내향의 세대'의 주요 작가를 나이순으로 들면, 오가와 구니오 다음으로 고토 아키오, 구로이 센지, 아베 아키라, 사카가미 히로시, 그리고 후루이 유키치.(이들은 1917∼1937년 생이다.)
그 다음은 6년 공백(1938∼1943년) 다음에 아오노 소오, 마루야마 겐지가 오는데 그 뒤는 다시 전쟁후의 1946∼1947년이 공백이고, 그대로 나카가미 겐지 등 전쟁 후 출생 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단 등장의 측면으로 보면 내향의 세대 작가들의 대부분은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작가 활동을 개시하고 있는데,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되는 것은 6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부터다. 후루이 유키치가 '요오코'(데뷰작. 아쿠다가와상 수상)를 발표한 것은 1970년 8월이다.
그 당시 비평가 오다기리 히데오가 그들을 '외부 세계와의 대결을 회피한', '내향의 세대'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는데, 이 비판 덕분에 오히려 그들은 '탈 이데올로기'로 총괄되는 공통의 문학 세대로서 도리어 주목을 끌게 되었다. 뿐더러, 70년대부터는 각자가 비판을 물리칠 만큼의 충실한 작품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내향의 세대라는 호칭을 플러스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아, 7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차츰 문단의 중핵을 이루어 왔다.
그후 나카가미 겐지, 츠시마 유우코, 미타 마사히로, 무라카미 류우, 미야모토 데루, 다카하시 미치즈나, 다테마츠 와헤이, 무라키미 하루키 등이 이어 대두하게 된다.
곧 1927∼1937년 출생인 내향의 세대의 바로 뒤를 이어 1946∼1953년 출생인 패전 후의 신세대가 속속 등장했던 것이다.
패전 직후인 40년대 중반부터의 10년간과 60년대 전체에 걸친 10년간은 각각 뜨거운 정치의 계절, 혼란의 계절이었다.
이 시기에 오오 오카 쇼오헤이의 「레이테 전쟁기」를 비롯해 미시마 유키오, 다케다 다이준, 후쿠나가 다케히코 등 전후파의 도달점을 보여 주는 대작이 속속 완성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969년의 전공투(반체제 학생운동)의 종언과 1970년의 작가 미시마의 자결은 바로 일본의 '전후대'의 종언을 고하는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급격한 사회 변혁-'내향의 세대'
그 뒤에 '제3의 신인'처럼 '탈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일상성을 고집하는 '내향의 세대'가 문단에 급부상 하게 된다. 그 뒤의 신세대와의 연령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있음을 다시 여기서 음미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곧 내향의 세대의 작가들 중 가장 연령 차이가 적은 후루이 유키치(1937년 생)와 나카가미(1946년 생)만 해도 9년 차이, 오가와 구니오(1927년 생)와 무라카미 류무(1952년 생)에 있어선 실로 25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러한 커다란 세대의 낙차에다가 70년대 이후의 문학적 상황의 변화가 중첩함으로써 공통의 문학기반의 상실로 인해, 내향의 세대 이후의 문학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하게 된 것이다.
고도 성장기 이후의 일본인의 생활은 시대의 대변화가 서서히 그들의 일상 생활에 침투하여, 알고 보니 어느 틈엔가 싹 변화해 버렸다는 체험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향의 세대의 작가들은 그 점에 철저하게 집념 하여, 거기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제3의 신인들은 전후파의 '관념'에 대신해 '일상성'을 믿었으며, 그 세세한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켜왔다. 그 점에서 내향의 세대는 제3의 신인의 정당한 후계자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내향의 세대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제3의 신인들이 믿었던 일상에 있어서의 자기와 현실의 모습조차도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의 작품에는 한결같이 안티 리얼리즘 경향이 짙어졌으며, 리얼리즘에 익숙한 독자에겐 좀 접근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들의 등장이 늦어지게 된 원인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 그들은 일단 등장을 이루었으며 각자의 작품을 차츰 변화해 갔다.
후루이 유키치는 자기 내면에만 틀어박혀 마음이 병들어 가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의 눈에 비치는 일상 생활의 이상함을 묘사함과 동시에, 혈연과 지연과 그 밖의 무의식의 집단적 연관 속에 놓여진 개인의 관념에 살아 있는 존재의 형태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구로이 센지는 기업에 있어서의 노동을 통해 메이데이 사건 체험에서의 자기 회복을 꾀한다는 사회적 관념적 모티프에서 출발, 이윽고 자신의 유년 시절의 체험으로 소급함과 동시에 고도 성장 후의 시민생활과 가정 생활의 선명한 묘사로 하여 주목을 받았다.
소설 형식의 해체와 재구축
도시의 획일적 생활에 있어서의 고독과 자기 상실이라는 문제는 이 시대의 소설의 일반적인 테마라 할 수 있는데, 고토 아키오는 자기 상실로부터 이른바 소설 상실 그 자체를 테마로 한 소설을 쓰게끔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철저한 리얼리즘의 소설 또는 논픽션이 독자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것은 내향의 세대에 대표되는 이러한 지적 내면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 또는 반발이 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논픽션이나 엔터테인먼트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카가미 겐지의 거칠고 터프한 리얼리즘에 독자들은 큰 기대를 걸었으며, 인생의 쓴맛을 담은 일본적인 '사소설' 작가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다.
오오바 미나코로부터 츠시마 유우코까지의 여성 작가들의 활약에는 남성 우위의 허풍스러운 문화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자리 잡고있다.
80년대에 나타난 변화 중에서 이후의 소설의 운명에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형식 자체의 해체와 재구축이라는 시도일 것이다.
이 점에서 최대의 문제작이 고지마 노부오의 「헤어지는 이유」라고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고지마의 뒤에는 고토 아키오가 이어져 있다. 즈츠이 야스타카의 과격한 실험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즈츠이와 동세대인 오사베 히데오의 「미완성 반어파」등도 이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오오에나 나카가미의 일련의 장편과 연작도 소설의 재구축에의 강력한 시도로 볼 수 있겠다.
미국 소설의 영향이 강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체와 재구축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양을 둘러싼 모험」 이후 재구축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제1회 미시마상을 수상한 다카하시 겐이치오로 등에 의하면, 종래의 소설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오직 언어의 짜 맞춤과 유통에 의한 일종의 게임 형식을 만들어 내는 데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소설이 '이야기'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이젠 현실이나 꿈이나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기조차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런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나서 그래도 역시 소설을 써야 하는 데에 현대 소설 작가들의 고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종래의 '소설다운 소설'을 요구해 마지않는 일반 독자로부터의 고립에 대한 고뇌이기도 하다.
'현대'를 개척한 남녀 작가
일본의 현대문학에서 분명 '이제까지의 표현 수준을 초월했다고 느껴지는 작가'라면서 비평가 야마다 유우사쿠는 후루이 유키치와 나카가미 겐지를 대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내면이 용해되어 파악하기 어려운 그 형상 자체를 '병환'으로서 파악하려고 한다든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인간생활의 옛 관습에 조명을 대고 그것을 부상시키는 후루이의 표현은 항상 '현대'를 느끼게 한다.
이 같은 후루이 문학의 농도를 일순 망각하게 하는 문학 표현을 나카가미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문장을 보라. 이것은 이후루이의 문장과 상대화되는 충분한 참신성과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노가타가 그의 성미에 맞는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운다. 밥을 먹는다. 햇살이 뜨겁다. 바람이, 땀에 범벅된 몸이 상쾌하다. 아무 생각도 않는다. 나뭇가지 끝이 흔들린다. 그는 다시 일한다. 흙이 뒤집혀진다. (‥‥‥) 무엇이건 다 정직했다. 흙에는 인간의 마음처럼 '무늬'라는 게 없다. 그는 노가타를 좋아했다.
이 단순하고 율동적인 문체는 그의 육체 노동을 자연과 일체화한 형태로 힘차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분명 나카가미가 묘사하는 것은 「곶」, 「가레키나다」에 명시되듯 자기 고향(기슈)의 산천과 바다에 둘러싸인 마을에서의 거친 육체 노동자들의 세계이며 그같은 문체로서밖엔 표현한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후루이, 나카가미의 문학적 중량과 대항할 수 있는 여류작가로선 60년대 중반 이후의 고오노다에코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예컨대 츠시마 유우코의 「총아」 등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강력하게 느끼게 한다. 다카코라는 36세 여성의 이혼 후의 생활이 묘사돼 있는데, 그녀와 딸과의 관계하며 세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가 상상 임신을 하게 되는 프로세스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남성 독자들에게 강한 이화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환상의 확대와 균열이 츠시마 유우코의 문학의 핵심이 되어 있음은 사실이며, 그것이 구성과 조화되어 나가기만 한다면 새 세대 작가로서 크게 촉망될 것이다.
'몰 주체'에서 '무의미' 창조로
무라카미 류우의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1971년 6월에 문예지 「군상」의 신인상을 수상, 이어 7월에는 아루타가와상을 수상함으로써 24세의 청년 작가가 일본문학의 새 시대를 열어 놓게 되었다.
비평가 미우라 마사시는 이 작품에서 철저한 '몰 주체'를 포착하고 '본다는 것, 보기만 한다는 것에 대한 특이한 냉철과 정열의 문학'으로 자리 매김을 했다.
훗사라는 소도시, 미군 기지의 극한 된 허구의 거리를 설정하여 주인공이 보고 있는 세계는 전쟁 중이나 전쟁 후의 세계가 아니라, 예비 된 전쟁, 미래의 전쟁의 예감 속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흑·백·황 각종 인종이 뒤엉켜 뒹구는 육욕 향락의 세계이다.
어찌 보면 육욕 지옥이랄 수 있는 그 같은 세계를 1천 장에 가까운 장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을 몰각시키고 냉철한 객관 묘사로 일관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무라카미 류우의 두 번째 작품 『바다 저편에서 전쟁이 벌어진다』에는 전쟁 개시를 희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모든 것은 더러운 구토물이다. 모든 것은 어미의 저 부스럼이다. 더럽고 구리고 썩어서 가렵다. 잘라서 찢어 버릴 필요가 있다. 제사 같은 거 필요 없다. 전쟁이 터지면 좋겠다.' 이런 식의 서술이 이어진다.
여기에선 '평화'라는 무질서에 대한 초조감만이 떠오르고 있다. 지금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일체가 '가상'인 것이며, 그 가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전쟁의 이미지가 담겨져 있다. 시대를 생생한 촉감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감각이 묘한 진실성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979년 6월에 「군상」의 신인상을 받았는데, 이 작가의 등장을 일찍이 평가한 가와 모토 사부로오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 청년다운 경쾌한 대화, 사물을 호들갑스럽게 표현하지 않으려는 자연스러운 장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억제된 수치감이 잘 융합되었다. 나아가서 청춘소설 특유의 심각한 자기와의 격투, 왕성한 피해자 의식, 절규, 그러한 과도한 파토스의 노출을 주의 깊게 회피하고 있다."
미국 작가 J.D. 샐린저나 커트 보네거트와도 비교되는 무라카미 문학에 대해 가와모토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엔 도대체 '생활'이 없으며 더구나 '생활과 예술'이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이 성립될 수 없을 만큼 애당초 철저하게 '생활'이 배제 돼 있다."
무라카미 문학은 '유아적(어린애)인 인상'을 주는 문학이라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공간이 그 '유아적인 인상'에 있어서 시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예컨대 대학교로 가고 싶지 않다,
취직을 하고 싶지 않다, 사회적인 것을 거부하고 싶다, 뮤직 사운드와 자기만이 틀어박힐 작은 공간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혼자 있어도 좋다. 그러한 청소년들의 모라토리엄적인 기분에 영합하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른바 기성세대의 '생활'을 원치 않는다 함은 전혀 별개의 자기만의 '생활'을 갖고 싶다는 자기한정, 자기 격리 욕망의 표출인 것이며, 하루키 문학은 그런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공유할 시대의 기분을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류우 및 하루키 두 작가와는 또 다른 형태로 그들로부터 뒤늦게 등장한 21세의 신인 시마다 마사히코가 있다. 그의 출세작 『우아한 '사요쿠(좌익)'를 위한 희유곡』(1986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은 이소다 고이치로부터 같은 평을 받았다.
"고도 성장기의 현실을 자명한 기정사실로 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도 대학 분쟁도 이 작가에겐 소년기에 맞이한 이상 사건일 뿐이었다."
"시마다의 소설 제목의 하나인 「캡슐 속의 모모타로(전래 동화의 주인공, 충효 용맹을 상징하는 소년)」라는 어휘에 빗대어 말한다면 시마다 자신도 실은 '캡슐 속의 모모타로'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대가 '캡슐 속의 모모타로'와도 같은 청소년을 대량 생산하고 있을 때, 그러한 형태의 '청춘'을 그려내는 것은 꼭 현실에의 매몰을 의미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형태로밖엔 현대의 청년상이 성립되기 힘듦을 그리는 것은 그 자체가 비평적 행위의 하나이다."
이 같은 비평에 대한 시마다 자신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창조력이란 것은 얼마만큼 '무의미'와 희롱할 수 있느냐에서 표시되는 것이 아닐까 ? 오늘날 시대 상황은 더블바인드(이중 구속)라는 메타포 밑에서 논의되었는데 더블바인드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의미'를 뛰어넘어서 '무의미'를 창조해 낼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생각한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라고.
1990년대의 현대 일본문학에서 가장 촉망을 받고 있는 신진작가의 이 문학관은 깊이 음미해 봄직하지 않은가.
(이 글은 일본의 최근간 「국문학」,「문예」,「군상」 및 기타 문예지를 참고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