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놀이의 미학
이형식 / 건국대 교수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보면서 우리는 삶의 부조리성을 느낄 뿐만 아니라 연극성(theatricality)에 대한 깊은 통찰을 목격한다. 특히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놀이를 수행하여야만 하는 두 부랑자의 몸짓을 담고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관객들에게 하게 만든다. 즉 이 극은 다름 아닌 연극하는 일에 대한 연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극단 '마루'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국내에서도 여러 번 공연된 적이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정종화 연출)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기존의 공연과의 비교를 유도하며 같은 작품이 어떻게 다르게 표출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 「유희의 끝」을 공연했던 이 극단은 계속 베케트의 작품을 일관성 있게 파고드는 것을 통해 극단의 특징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와 가까워진 베케트
이번 공연에서 연출자는 자신의 목소리로 기다림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의도를 밝히면서 원작을 자신이 번역해서 연출을 하였다. 그 결과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 못하는 원작의 많은 부분이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변신되어 전달되어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베케트의 극을 관객들이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소위 현대의 비희극(tiagicomedy)이라고 부르고 있는 부조리 계열의 작품들, 예를 들어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피란델로의 「헨리4세」, 듀렌마트의 「방문」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포복 절도할 만한 기상 천외의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진행과 장면 뒤에서 삶의 진실, 혹은 허구를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통렬하게 깨닫게 만드는 순간들을 직면한다 '2막으로 된 비희극'이라고 부제가 붙은 「고도를 기다리며」 또한 비극과 희극의 양면성이 적절하게 융합된 작품이라기보다는 두 명의 부랑자의 희극적인 분장이나 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희극적인 표층 구조가 작품을 전체적으로 꿰뚫으면서 동시에 그 밑바닥에서 묻어나는 삶의 공허가 섬뜩한 느낌을 주며 표현되는 작품이다. 특히 2막에서 여러 가지 희극적인 동작들이 있은 후 소년이 등장하여 어제 만난 그 소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인식의 확실성을 흔들어 놓을 때 관객은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다.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가치는 혼돈 되며 시간마저도 일직선상의 진행을 중단한 세계가 바로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부조리의 세계이다.
극단 마루의 공연은 「유희의 끝」을 연상케 하는 검은 색의 무대 배경에서부터 극의 기조를 어둡고 심각하게 이끌어나가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기다림의 절망적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 극은 통일성을 보인다. 2막에 가서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희극적인 면을 애써 절제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는 극의 리듬을 늘어지게 했고 특히 1막에 있어서는 기다림의 무게를 관객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정도였다. 이 공연은 고고와 디디의 분장이 풍겨주는 희극적인 인상과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의 결합을 통해 비희극적인 면을 표현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러한 비희극성은 위에서 언급한 현대 비희극의 특징과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극에서 기다리는 행위를 통한 절망감의 표현은 특히 고고와 디디의 희극적인 놀이에서 과장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 극이 사실주의 연극과 다른 점은 사실주의 연기자가 극중 인물과의 동일시를 통해 그 극중 인물이 되는 것을 시도한다면, 이 극에서의 연기자는 극중 인 물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동시에 의식한다는데 있다. 보드빌이나 서커스에서 볼 수 있는 희극적이고 과장된 행동이 이 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놀이로서의 연극의 요소가 이 작품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극에서의 놀이가 연극성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유도하는 이유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하는 그들의 몸짓이 우리의 일상적 행위의 무의미함과 연관됨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바로 연극이라는 오래된 경구를 연상케 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광대로서의 고고와 디디의 역할이 '고도를 기다리고' 인생의 의미를 모색하는 진지한 철학자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의해 압도된 느낌을 이번 공연은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한 인상은 특히 과장된 행동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놀이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다. l막 보다는 2막에서 많은 육체적 행동이 포함되며 활기를 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의 흐름은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으로 절제된 인상을 주었다. 두 사람의 놀이는 장난, 역할 연기, 변신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장난의 예를 우리는 고고와 디디가 럭키에게 맞은 정강이를 확인하기 위해 바지를 들어올리는 대목에서 같은 쪽의 바지가랑이를 계속 끌어올린다던가, 모자를 서커스에서처럼 저글링(juggling)하듯 계속 바꿔 쓴다던가, 서로에게 욕하기 놀이를 하는 등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조와 럭키의 놀이는 남의 역할을 연기하는 대표적인 예이고, 나무가 되어 보는 것은 변신의 예이다
기다림의 기대와 절망
이처럼 시간을 보내기 위한 절실한 몸짓이 놀이를 통해 희극적으로 표현될 때 놀이로서의 연극을 우리가 깨닫는 한편 그러한 희극적 몸짓 밑에서 묻어나는 삶의 허무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놀이의 몸짓이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 또한 증대된다.
럭키와 포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무대 공간의 평면적인 사용은 특히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도를 향한 지루한 기다림 뒤에 무대에 누군가 등장한다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하는데, 이때 럭키와 포조를 연결시키는 기다란 로프는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가 있다. 럭키가 먼저 등장하고 혹시 고도가 아닐까 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사람의 등장이 로프의 길이로 인해 지연될 때 우리의 호기심은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다른 희극적인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로프의 과장된 길이가 두 인물의 확대된 무대 공간 사용과 결합되었을 때 얻을 수 있을 효과가 이번 공연에서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 극장의 물리적 여건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이 작품의 원형적 구성(circular structure)이나 기다림의 반복에서 착안할 수 있듯이 무대를 폭 넓게 원을 그리며 돌도록 블록킹을 했더라면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럭키와 포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네 사람간에 벌어지는 언어적, 육체적 상호 의사전달 과정은 가장 재미있게 연출될 수 있는 장면이다. 네 사람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의 의도가 무대 공간에서 충돌하고 긴장을 이루면서 꽉 찬 듯한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네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동이 어떠한 안무적인 몸 동작(choreography)을 구성할 수 있는 지는 이 극에서 극중극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번 공연에서 럭키가 고고를 걷어차는 장면이라든가, 럭키가 혼자서 긴 대사를 외우는 장면에서 연기자들 간에 긴밀한 연결을 통한 화합이 부족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럭키가 긴 대사를 외울 때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모자를 벗기는 장면, 1막에서 럭키와 포조가 떠날 때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럭키가 두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과연 서 있을 수 있을지 없을지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대목, 2막에서 포조가 눈이 멀어서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고와 디디가 그를 일으켜 세울 때 서 있을 듯하다가 다시 넘어지는 장면 등에서도 섬세한 몸 동작과 타이밍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더 큰 참여를 유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고고 역을 맡은 정남철의 나직하게 깔린 듯한 독특한 목소리는 희극적인 장면들에서 효과적으로 구사되었다. 그렇지만 1막과 2막 마지막의 중요한 대사들에서는 너무나 절제한 나머지의미의 전달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극의 절망적인 분위기의 연출에도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했다. 럭키가 혼자서 생각을 하는 대목에서도 대사는 너무 억제되고 느리게 구사되어서 명령에 의해 생각하는, 그래서 모자를 빼앗길 때 생각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기계적 인간의 모습이 효과적으로 표현되지 못했다.
이 작품에서 주동기를 이루며 반복되는 대사들, 예를 들면 "이제 뭘 하지?", "기다리는 동안 뭘 할까 ?", "갈까 ?" 등의 대사는 삶의 권태와 무위를 관객들에게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대사이므로 희극적 몸놀림 사이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흔히 일반 관객에게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인식되는 이 작품의 미국 초연이 산 퀀틴(San Quentin)에 있는 형무소에서 죄수들을 관객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대사들이 갖는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극단 마루의 베케드 공연은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으며 그 시간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두 방랑자의 우스꽝스러운 놀이의 동작을 통해 연극성의 의미를 살펴보게 만들었다.
생각하게 하는 연극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오늘의 현실에서 이번 공연은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