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출판

고전의 완역은 출판의 연꽃




이영준 / 민음사 주간

「걸리버 여행기」가 얼마 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사실을 기억하자. 그 책이 왜 새삼스레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그 책은 무슨 특별한 상황 때문에 주목을 받은 것인가.

무슨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깨끗하지 못한 인과론을 찾아내는 데 우리는 익숙하지만 그러한 질문 방식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어 왔다. 결론을 말하자. 딴 이유는 없었다. 그 책은 '완역본'이었다. 드디어 「걸리버 여행기」를, 아동용으로 번안해 놓은 다이제스트판을 넘어서, 성인용 '완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왜냐하면 완역본은 다이제스트판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보여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문 문화면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완역본 출간 왕성' 운운하는 기사들은 정말 기가 막히는 우리 출판 현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 기사는 역으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완역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는 다시 한번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까지 여섯 권이 나왔고 금년 내 완역되면 전10권의 방대한 전집이라는 사실에서 우리가 알게 된 진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접해 온 「아라비안 나이트」가 형편없는 발췌 축약본이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라면 그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것이 사실은 원전이라기엔 한 단계 모자라는 중역본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버튼 경은 어느 일간지의 표현처럼 '원저자'가 아니라 영어본 번역자이다. 그가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했으니 마땅히 이슬람 문학 전공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고 일반 독자들은 우리의 문화적 후진성을 쓰디쓰게 음미해야 할 것이다. 100년 전의 대영 제국이 이슬람 문화를 다루는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방식은 버튼 경의 서문에 잘 나타나고 있듯이 엄밀한 학구적 태도를 보여 준다. 그가 이슬람 문화를 대영제국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금 와서 우리가 그리 문제삼을 계제가 아니다. 그 열매를 지금 우리가 훔치고 있으니 말이다.(하긴 문화의 논리에서 빌리는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지만 훔치는 것은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잘 소화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면 완전히 훔친 것이 되며 그것은 표절이 아니라 문화의 공유로서 영향의 차원일 것이다.)

고전 번역 활발한 출판계

최근 출판계의 동향 중에서 반가운 일이라면 완역도 완역이지만 고전번역이 활발하다는 사실이다. 때아닌 고전 번역이라니 싶은 느낌이 들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우선은 기분이 좋아진다. 문화적 창조성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인간 이해의 통렬한 정확성일 것이다. 그 정확성은 대개 고전들이 담고 있다. 고전이 된 이유라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흔히 번역의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경우 일가를 이룬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이 24종류나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 우리의 경우 그나마 번역해 놓은 셰익스피어라 하더라도 연극 공연에 부응하지 못하는가 하면 정확히 의미를 옮기지 못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자랑하는 것은 조상 자랑에 불과하나, 우리가 그 자랑을 과연 감당할 수 있는 후손인지 자문해 봐야 할 시점이 왔다. 그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낸 전통은 혹 지금에 와서 끊기지나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등 따습고 배부른 상태라 할 만하다. 우리 사회의 경이적인 경제 발전이 우리에게 비만아들을 걱정하게끔 해준 데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나 황폐하게 느껴지는 문화적 빈곤감은 생활 속에서 물질의 과소비로 탕진되고 있다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북한의 흰쌀밥, 고깃국 소원론을 두고 기가 막힌 듯 웃은 사람들이 우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한에 없는 한국철학사를 북한은 「조선철학사」로 갖고 있으며 우리가 못한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이미 완성한지 오래 라는 사실이다.(어쩌면 금년 연말이면 우리도 조선왕조실록 완역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있다. )

우리가 고전 번역에 관해 그간 무관심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 이해에 피상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고백이 될 수도 있다. 다시금 고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 의식의 부박성을 반성하는 일이며 우리 주위의 문화적인 거품들을 걷어 내는 일이 될 것이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 중에서 아직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찾을라치면 쉽다. 그나마 번역되어서 출간되어 있는 고전 중에 제대로 된 번역 수준을 갖춘 경우를 찾을라치면 우리는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 절망의 늪은 그러나 출판 기획자들에게 연꽃을 안겨 줄 수 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자랑하느라 침이 튀는 원효나 율곡, 퇴계, 다산 그 어느 전집이 번역되어 있는가. 젊은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한자의 종이 더미에 불과할 뿐이다. 학생들은 입시를 해 그들의 저서 목록을 외고 있다. 시간이 모자라 읽을 수 없다 하나 실상은 시간이 남아돌아도 막상 읽자니 얄팍한 부분 번역밖에 없지 않은가. 풍문에 불과한 선현들의 사상 내용이다. 그들이 원효나 다산을 존경한다면 무얼 보고서 존경하는지 반문해 볼 만하다. 우리의 정신적 내용들은 어쩌면 이런 부박함으로 점철되어 있지나 않은가.(근자에 범람하는 역사 전기류 소설들의 저자들이 이런 황무지 상태에서 짜 맞춰 내느라 들인 노고는 가상하지만 그것이 한낱 허황한 픽션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의 원전 독해 능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련한 것은 그것들을 애국심(!)으로 애써 사 읽는 독자들이며 우려할 만한 것은 이런 사이비 문화를 부추기는 일부 언론들이다.)

동양 고전의 세계를 보라. 2천년을 두고 우리가 머리를 조아려온 13경 완역은 아직 부지하세월이다. 동양 문학의 금자탑이라는 이백이나 두보도 전집이 없다. 요즘은 서양이 득세하고 있다면 그쪽을 보자. 세계문학사상 걸출한 작품이라 불리는 「돈키호테」만 하더라도 우리는 완역본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전집 번역이 없다. 괴테도 톨스토이, 카프카도, 하다못해 칸트도 헤겔도 전집은 없다.(혹 몇 권 있다 하더라도 일본어 중역본이 태반이니 가히 정신의 부분적 식민지 상태라 할 만하다)

이 모든 절망의 목록은 그러나 우리 시대 출판인들의 연꽃의 목록이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우리 문화의 내일을 살게 할 것이다. 고전번역의 기운에 유보 없는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