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되는 판화 - 우리의 그림
김상구 / 목판화가
이 글의 목적은 바로 오늘의 판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에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판화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판화 발전들 위한 주변 환경의 개선점을 모색함과 아울러 판화 부문의 장점을 두둔하고자 한다.
판화의 시작은 '찍는다'는 행위의 재미와, 반복과 타성이 붙는다는 이른바 '복수성'으로 말미암아 대중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구의 늘어남과 더불어 수요와 생산에 있어서도 판화의 성장은 인쇄와 같이 발전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지우개에다 글자나 모양을 새겨 인주를 묻혀 여기저기 찍던 시절, 다른 학우들도 부러워하며 가졌으면 하던 마음들, 모두가 선하게 떠오르는 옛날 이야기이다. 예전 조상들의 생활에 사용되었던 판화들의 흔적은 너무나 고귀하고 멋이 살아 있는 것들이다. 떡에 무늬를 찍어 모양을 낸 것들, 옷감에 찍던 능화판의 무늬들은 일반 생활에 사용되었던 판화들이다. 우리들의 문화가 변천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변해졌는지 아쉽기 짝이 없다. 모든 부문에서 느끼는 바이지만 일반 생활에서 판화가 이용되었던, 그것도 의식주에 골고루 이용된 모든 것들이 한가지도 남지 않고 없어진 지금에 우리의 판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을 오늘의 판화에서 느낄 수 있다.
신세대의 판화 교육에서 옛날 판화에 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몇 백 년 된 우리의 판화가 있었다는 설명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 간간이 조상들의 판화에 관한 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미술 서적 코너에서 고판화에 관한 책을 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판(板)자체가 골동품으로 취급되어 수장가에 의해 보존된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능화판이나 판화 판들이 보관 및 전시되곤 하는데 온통 먹칠이 되어있는 시꺼먼 판들이 전시된다. 판에 새김질이 되어 있는 그림이나 글씨는 사실 뒤집혀져서 새겨져 있기에 감상도 안 되거니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어 형상을 알아보기조차 어렵다. 판들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찍혀 나온 형상이 우리에게 보여 지고, 책이 만들어지는 일에는 왜 신경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 장의 탁본을 찍어 전시하거나 책자로 만들어져서 신세대의 교육에 반영이 되어 감상함으로써 이제 시작되는 판화 장르의 뿌리를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 장의 탁본이 수천 장을 찍어 낸 판에 이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보다 넓게 알림으로써 보존의 가치를 더해 주지 않을 것인가.
내 자신이 목판화를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고판화에 관한 책 한 권을 갖고 있다. 발행은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고전 자료 편집실에서 발간된 책으로 「한국의 고판화」란 제목의 3백 페이지 분량이다. 정신문화원에 소장된 고서에 나오는 고판화 204점의 판화가 실려 있는 데
1979년도에 전시 목록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 책 한 권이 어렵게 구해졌으나 그것이 고판화에 대한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그 후 '공간'사에서 능화판의 무늬들만 모아서 발간한 책도 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수장가나 보관하고 있는 곳에서는 올바른 문화 발전을 위하여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요구하고 싶다.
판화의 가치는 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찍혀져 나온 형상에 있는 것이니, 오늘날의 판화에서도 일정한 수량이 찍혀지면 판은 파기해버린다. 파기해 버린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찍어 낸 판화가 CP(Cancellation Proof)이다.
귀한 옛날 판들을 모조리 파기해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찍혀 나온 형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실례로 합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의 경우 책으로 발간되어 일반인에게 소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화엄 변상도」 주본 80장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모두가 판화로서 약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목판화의 진가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판의 마모나 보관에만 치중하는 것이 과연 도리인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판화 분야에서도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환경 및 분위기를 조성해야한다는 것과 같은 매우 먼 곳에서부터 넓은 의미의 시작이 필요하다. 어느 한 시기에 이루어진다는 조급한 마음일랑 접어 두고 한 세대에 이루지 못한다 해서 피할 것이 아니라, 시작이 반이라 하는 입장에서 더 깊게, 더 길게 보고 많은 일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처지 중에 한 가지를 이야기한 것뿐이다. 판화도 다른 분야처럼 즐거움 속에 본인의 체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우 급한 성격의 작업을 한다 했을 때 약간의 어려움이 예상되는 것처럼 인내심을 갖고 계획적으로 치밀한 계산이 뒤따르는 작업이다.
판화를 작업하는 정신의 하나로 조상들의 장인 정신을 들 수 있다. 조상들은 심지어 집을 짓는 목수들도 자연의 소산인 나무를 대할 때면 경건한 자세에서 물건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있었다. 가능한 한 자연에서 생겨난 모양을 다치지 않고, 매만져가며, 서로 마음을 열어 대화하듯이 귀하게 다루는 모습, 휘어진 것, 가는 것, 큰 것, 넓은 것, 모두를 요소 요소에 배치함으로써 조형미를 갖고 전체를 완성해 나갔다.
판화의 작업을 장인 정신에 비유하는 것은 또한 '기다린다'는 점에서이다. 어느 한 순간에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작 과정을 통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야만 완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기법의 차이가 있겠지만, 목판화에서 새김질을 할 때 자칫 잘못하여 빗나간다 했을 때는 판에 생긴 자국을 지워 버릴 수가 없다. 잡념을 버리고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의 축적과 오랜 기다림으로부터 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판화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제작 과정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판화의 제작 과정은 대강 이렇다. 소재가 결정되면 찍어내는 판이 제작되는데, 판의 종류에는 흠을 내어 팔 수 있는 목판이나 무른 금속판, 약품의 효과에 의하여 제작되는 석판, 공판화와 같은 것이 있다. 판의 재질과 기법에 따라 제작방법이 다르며 찍혀 나왔을 때의 느낌도 다르다. 현대 미술에 있어 판화의 이용도는 점차 커진다고 생각되며, 일반의 인식도 달라지는 추세에 있다. 모든 판의 종류를 설명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짧다. 하지만 내가 주로 다루는 목판의 과정은 판을 준비하는 것부터, 파기 좋으며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선택해서 판재들을 모아 건조시켜야 한다. 대개는 수입목인 마티카 나무를 사용하며 판면을 곱게 다듬은 상태에서 새김질을 하게 된다. 작품의 성패는 판면을 깎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이전 스케치를 어떻게 했는가, 어떠한 그림을 표현하려 하는가, 따위도 중요하다. 판각 방법이 서투르면 그런 대로 둔탁하고 거친 표현이 더욱 힘있게 표현이 될 것이며. 오랜 경험에 의한 기술이 터득된 경우이면 나름대로 운치를 살려 판각할 수 있는 것이 목판화인 듯하다.
내가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서툰 새김질에 용기를 주고자 함이다. 운전의 경력과 마찬가지로 목판의 새김질은 다같이 기술에 해당되기에 경험에 의한 판각법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개발된다 하겠다.
목판화의 표현은 섬세한 쪽보다는 평면이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복잡한 선의 교차보다는 단순한 넓은 면이 시원하게 찍혀지는 것이 목판화이다. 여기에 나무 결 무늬가 더해지면 따스함이 표현된다. 동판화가 섬세한 선의 표현이라면, 목판화는 면의 표현, 석판과 실크스크린은 재료의 질감과 표현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판종 전체적인 제작 과정을 이해하는 것부터 감정표현도 자유로워지고, 감상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요즈음 이러한 판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많은 기회가 준비되어 있다. 대학마다 교육원에 판화과가 있고, 과천 현대미술관의 아카데미 실기반에도 판화과가 있다. 신문사의 교육원 문화 센터에서도 배울 수 있으며, 10여 군데 있는 판화 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공방에 관하여 좀더 소개를 하자면, 공방은 판화의 연구실이다. 이상적인 공방의 분위기를 연상한다면, 하얀 수염이 난 할아버지와 젊은 청년이 어우러져 두 손을 걷어올리고 육중한 판화 기계를 돌려가며 찍혀 나온 판화를 조심해서 들어올린다. 노인은 찍혀 나온 판화를 불빛 가까이 대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잉크의 색은, 물감의 농도는, 입자는, 종이와 잉크의 밀착도는 어떠한가 ? 세밀히 관찰한 후 청년에게 넘겨주며 수정을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가운데 끼니를 잊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 들 수 있는 곳이 바로 공방이다. 할아버지를 비유하여 설명한 것은 연륜 때문이다. 오랜 경험이 쌓여야 좋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공방은 지금 막 시작이라 하겠다. 위의 글이 우리의 처지에 있어서 과거의 돌이킴과 작가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면 다음은 전시와 관람을 통한 확산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있는 좋은 작가와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 올바른 전시와 관람을 통한 이해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므로 해서 작가, 화랑, 관람자 모두가 새로움의 기대에 재충전하는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시는 준비가 짧은 대신에 기대가 큰 편이다. 오늘날의 전시란 모든 기대를 수치로 환산해서 표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람객의 숫자나 호응도도 예측을 통하여 가늠할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목표를 갖고 충분히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한번의 전시가 얼마나 어렵고, 경비가 많이 들어가는 행사인가 ?
판화 전시에는 시범을 보여 주는 시간을 마련하여 미처 과정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는 분을 위하여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던가 혹은 참고될 만한 책이나 판화 재료를 보여 줌으로써 이해를 돕게 된다. 올바른 감상을 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지식은 무엇인가 ? 마음가짐은 어떠했을 때 효과적일까 ? 눈 높이는 적당한가? 그림과 그림의 간격은 적당한가 ?
이러한 것들이 전시를 준비하는 기획자가 시간을 두고 생각하여야 될 점들이다. 관람자에게 느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의도한 목표를 감지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전시란 보여준다는 의미로, 보여 주는 주체와 보는 사람의 만남으로서 전달코자하는 내용을 이해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를 주최하는 쪽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화랑을 경영하거나 기획전을 열 때에는 주최측의 성의가 배어 있는 전시가 되어야한다.
우리의 전시 문화가 질보다는 횟수에 있었다. 그러나 횟수의 의미가 과연 질을 높여 주는 감동을 주었는가는 의문이다. 한 번의 전시를 보기 위한 관람자의 거동은 위대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짬을 내어 전시장을 찾았을 때 무엇인가 보람있었다고 하는 느낌을 줌으로 해서 다음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전시는 관심 있는 자들로부터 어떠한 느낌을 받아 왔을까 ?
전시의 기본은 새로운 창작 작품에 두어야 한다. 판매를 위한 전시도 있을 수 있고, 친목을 다지는 전시도 필요하다. 작가의 발표 시기는 변화된 표현에 기준을 두어 발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시대의 흐름을 보아 묶어야 될 성질의 그림들도 날카로운 평론가의 주장에 의하여 기획 전시도 필요하며, 앞만 보고 달리기에 큰길을 보지 못한다면 역시 낭패다. 그러기에 큰 미술관에서는 무엇인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국내외의 주요전시를 기획함으로써 작가와 관람자의 보이지 않는 반성과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나 본다.
예술의 길이 외롭다고 하나, 그 외로운 행위도 결국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서로가 보람있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풍토를 위한 시작이라는 뜻에서 노력을 바랄 뿐이다.
판화에 관한 참고 자료
■ 책
한운성.「판화 세계」, 창미
구자전.「판화 기법」, 미진사
장순만.「판화 사전」
■ 판화 공방
-서울 판화 공방
논현동, 장태식 (546-3560)
-장 판화 공방
이대 앞, 장석태(363-1497)
-윤인근 판화 공방
홍대 앞, 윤인근(323-6720)
-가나 화랑 판화 공방
평창동. 이호재
-고도 판화 공방
양재동. 이상록
■ 판화 전문화랑
-메이 갤러리
신사동, 540-2911
-홍의 갤러리
서초동, 525-5161
-그린 판 갤러리
반포동, 593-1181
-고도 갤리리
신사동, 546-6865
-코 아트 갤러리
논현동, 517-6398
-기림 갤러리
대구. (053) 423-1605
-고즈 갤러리
제주. (064) 52-5645
■ 판화 실기 아카데미
-과천 현대미술관 내
아카데미, 502-6864
-예술의 전당 내
미술부 실기반. 580-1614
-홍익대학교 내
미술 교육원. 320-1411
-진로 문화 센터 내 문화 교실
-중앙일보사 내 문화 교실
■판화 재료상
-렘브란트
홍대 앞 323-9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