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음악

신인 음악회에서 느끼는 것




주성혜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해마다 각 음악 대학의 그 해 졸업생 중 교수 추천을 받은 성적 우수자들을 모아 개최하는 조선일보사 주최의 신인 음악회가 올해에도 4월에 열렸다. 9일에서 12일까지 나흘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무대를 빌어 마련된 이 음악회가 올해로 56회 째라니 참으로 그 의의를 새겨 볼 만했다.

제4회에서 제16회까지는 일제하의 신문 폐간, 해방, 6·25 등의 혼란으로 인해 개최하지 못했다지만, 1938년 부민관에서 이관옥, 이순명, 김신덕, 최영애, 오경심, 김동진 등 일제하의 음악 대학 졸업자 여섯 명으로 첫 출발을 했던 신인음악회의 역대 출연자 명단을 보니 오늘의 한국 음악계를 이끈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 음악회가 열거하고 있는 이름들을 보면서, 한 사회를 움직일 힘을 잠재한 젊은이들의 가능성이 새삼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교육이 지니는 사회적 기능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신인 음악회는 노련미는 없지만 성실함과 풋풋함이 주는 희망이 그 즐거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에는 영남대, 효성여대, 충남대, 목원대 등 지방의 4개 대학과 서울대를 비롯하여 수도권의 12개 음대에서 서른 여섯 명의 졸업생이 참가하였는데 각 전공들이 고른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 퍽 반가운 일이었다. 피아노와 현, 특히 바이올린이 우리 기성 악단에서 비교적 강세를 보여 왔던 것을 반영하듯 예년의 신인 음악회는 그런 악기들의 연주가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나흘간의 무대 중 필자가 감상한 둘째 날과 셋째 날의 공연에서는 소프라노와 바리톤, 오보에가 피아노 못지 않은 기대할 만한 기량을 선보였다.

소프라노 양경희(추계예대)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음색은 아니지만 레퍼토리의 선율에 곱고, 부드러운 자신의 목소리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고, 곡이 지닌 서정적 흐름을 무리 없이 표현하는 연주자였다. 숙명여대의 황용선은 풍부한 성량을 이용, 극적인 표현에 주력함으로써 머지 않아 새로운 오페라 가수가 출현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도 했다. 이 두 소프라노는 빠른 패시지나 작게 소리 내야 할 부분의 연주 기술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다든지, 성량과 음정의 조절력을 더욱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악에 비해 성악은 전공 연마의 출발 연령이 인체 구조상 늦을 수밖에 없고 입시 제도 등 여러 여건도 있어 우리 나라의 대학생 성악도들의 기량은 대체로 발성 위주적일 뿐 표현력 내지 악곡 해석력 면이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소리내기에만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발성을 해석이 담긴 편안한 노래로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이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필자는 최근 들어 급성장이 가시화 되고 있는 우리 성악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두 인재의 우연한 출현이 아니라 세계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우리 성악이 인력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는 두 사람의 바리톤도 역할을 했다. 중앙대의 신현오와 충남대의 오병각 역시 '소리내기' 아닌 '노래하기'로서 음악을 대하는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이틀간의 순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양대 졸업생 곽연희의 오보에 연주였다. 랄이엣의 「베니스의 축제」를 선곡한 그의 오보에는 세부적인 연주 기교가 안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대조적인 선율 패턴이 번갈아 나오며 형성하는 악곡의 큰 프레이즈 처리에도 손색이 없었다. 계획한 표현 구도를 매 악구의 끄트머리까지 놓치지 않고 실행하는 그의 성실함과 치밀성은 기성 연주가로서 지녀야 할 전문성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필자가 본 10일, 11일 이틀간의 연주가 나흘 동안 계속된 음악회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음악 교육이 부분적 기술에의 치중으로부터 음악적 완성도로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다행스러움이 이번 신인 음악회를 통해 받은 인상이었다.

대학의 성적 우수 졸업생들로 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은 각 음악 대학의 기량을 비교할 기회도 되고 또 우리 악단의 출발점을 점검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회가 정녕 일정 교육을 마무리짓고 기성 악단에 첫 발을 내딛는 명실 상부한 신인음악가들의 연주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을 해 본다.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선택하는 우리 나라 음대 졸업생 중 대다수는 대학졸업 후 작곡가니 연주가로서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그 전 단계로서 해외 유학을 계획한다. 이는 우리의 음악 교육이 전문 음악인을 육성함에 있어 충분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신인음악회 무대에 서는 '신인음악가'이어야 할 연주자들이 '신인음악가가 되기 위한 지망생'으로 여전히 머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인 음악회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 당당한 연주가 대신 좋은 성적에 대해 상을 받는 심정의 음악도를 무대에 올려놓는 일은 우리의 음악 교육이 반성해야 할 점이다. 조심스럽고 차근차근하게 악보가 지시하는 선율을 지켜 내기에 급급하고 연주자 고유의 몫인 셈여림, 템포, 표현 영역의 처리 등에는 아직도 소극적인 우리 음악도들이 대다수인 현실은 우리의 음악 교육이 반성할 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음악도 개개인의 음악적 숙련도로 그 책임을 돌리기에 앞서 그 정도밖에는 아예 요구하지 않는, 그래서 그 나머지는 외국의 음악인들이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기성 음악계의 태도는 문제점이 없는 것일까 ?

연주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자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음악인이라면 자신의 배경을 적당화 하는 데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제는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까 고민해도 좋을 만큼 우리 음악계가 성장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회의 기대가 한 개인의 능력을 얼마나 발휘시키는가를 우리는 학교나 가정, 정치권에서 흔히 보게된다. 으레 유학을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학교 공부를 마치면 나도 당당한 연주가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실지로 유학을 하느냐, 마느냐 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서른 여섯 명, 프로그램에 올려진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들 상당수가 머지 않아 한국 음악계의 주요 구성원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하니 더 만족스러운 연주가 욕심이 나고 더 진지한 교육이 문득 아쉬웠다. 그리고 젊은 연주자들의 충실한 연주를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한 곡씩 심지어 소나타의 한 악장씩만을 연주하고 들어가는 양적인 연주회 말고도 독주회가 마련될 경제적 여건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