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진정성을 파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
고형진 / 상명여대 교수
포스트모더니즘의 폐해
최근 우리 문학을 휩싸고 있는 시류적인 사조를 들라면 아무래도 포스트모더니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와 문화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이다. 우리의 경우 지금의 사회, 발전 단계가 과연 서구의 그것과 비슷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주로 영·미 문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사회, 문화 구조를 설명해 내고, 또 변화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의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또한 최근에 우리에게 소개된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히 최근의 우리 문학을 휩싸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시류적 문화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에서 유입된 시류적 사조인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의 문학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시의 분야에 국한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의 부정적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언어 유희의 범람
첫째, 가벼운 언어 유희의 범람을 들 수 있다. 언어 유희(pun)는 사실상 전통적인 문학적 수사의 하나다. 언어 유희는 동음이의어의 활용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전복시킴으로써, 시 읽기의 재미도 주고 대상을 풍자하는 효과도 가져오는 일거양득의 문학적 수사다.
언어 조작을 통해 대상을 풍자한다는 점에서 언어 유희는 지적인 시적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일부 시에서는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지적인 모색을 결여한 채 오로지 표피적인 말장난만으로 한 편의 시를 구축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도처에 문, 도처에 벽, 도처에
균열, 도처에 맞지 않은 열쇠, 도처에 허물어지는
성곽,
도처에 자라나는 가시덤불
……(중략)……
-방문을 열면 계단, 계단을 올
라서면
습기 찬 지하, 지하를 내려가다
만나는 파란, 파란 하늘
잠긴 문 두드리다 지쳐 주저앉아
열쇠 구멍으로만 보이는
태양-처라, 처라, 처처
-이만근의 「處處」 일부
인용한 시는 '처처'의 언어 유희를 보인다. 모든 장소로서의 의미인 '처처(處處)'를 모든 것을 부순다는 의미의 '처처'로 의미 변환시키는 언어 유희를 보인다. 인용한 시는 현대적 삶의 모든 공간(處處)이 출구가 막혀 있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모든 것이 파괴, 균열돼 있음을 보여 주면서, 그러한 암담한 공간 안에 갇힌 절망적인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일단 매우 의미 있는 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시적 인식이 세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시적 성찰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현대적 삶의 모든 공간을 지칭하는 의미로서 '처처'라는 시어를 상정하고 이것을 다시 '처라'라는 의미의 언어 유희로 치환하여 간단하고 표피적인 인식으로 이 암담한 삶의 공간에 대한 시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결여 한 채, 매우 가볍고 표피적인 언어 유희만으로 한 편의 시를 구축하려는 경향은 최근의 시에 널리 유포되어 있으며, 이제 막 등단한 젊은 시인들도 여기에 상당히 감염되어 있는 형편이다. 패기만만하게 자신의 고유한 시적 영역을 지녀야 할 시적 출발기의 시인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부정적인 시적 태도에 감염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언어 유희의 시적 태도에는 엄숙한 이성주의에 대한 회의와 언어라는 것이 단지 시니피앙의 연속일 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는 데, 그것이 일부의 시인들에게는 깊이 있는 성찰을 가로막고 시를 유희의 차원으로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무분별한 섹스에의 탐닉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의 또 다른 부정적 양상으로 에로티시즘과 욕설의 난무를 들 수 있다. 섹스와 욕설의 시적 어법은 그 전에도 있어 왔다. 가령 김수영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수영의 작품에서 구사된 섹스와 욕설의 시적 어법은 허위와 가식으로 위장된 기성 관념을 폭로하고 삶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열망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시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최근의 일부의 시에서 엿보이는 섹스와 욕설의 시적 어법은 섹스와 욕설 그 자체에 함몰된 채 유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가령 다음의 작품을 보자.
비디오로 '裸女木(나녀목)'이라는 포르노
영화를 보니까
한오백년이 빽뮤직으로 쫘악 깔
리면서
山神靈(산신령)이 꼬셔서 홍알홍알 그 짓
을 하고
저, 영감탱이가…… 이젠 氣(기)가
빠져서……
백날 祈雨祭(기우제)를 올려봤자 말짱 도
로아미타불이다 !
……(중략)……
저주받은 땅이여, 흐응
저질화면 속에 펼쳐지는 우리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이여
킥킥킥
저 봉우리는 니 좆 같고
조오기 조 봉우리는 킥킥
내 좆 같다 야
-박인택의 「國産(국산) 포르노」 일부
시인은 이러한 시를 통해 저질 비디오가 난무하고, 또 우리의 삶이 저질 비디오와 하등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강변할는지도 모른다. 또 우리의 한 맺힌 정서가 담긴 노래인 '한오백년'과 같은 의미심장한 노래와,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에 대한 심미적 성찰과 같은 것이 저질 문화의 홍수에 의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음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강변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이러한 시에서 우리는 유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섹스와 욕설의 난무 외의 그 어떤 시적 전언도 전달받을 수 없다. 시인은 오로지 가볍고 장난기 어린 태도로 섹스와 욕설적 어법을 무차별적으로 진술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의 이면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거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으로서 옹호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에 적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이 후기자본주의의 삶은 모든 것이 욕망 충족에 의한 소비의 문화로 물들어져 있다. 그러한 타락한 소비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미 우리의 사회는 그러한 영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더 이상 엄숙하고 근엄한 자세로 그러한 문화를 비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비적 문화를 수용하여, 안으로부터 자체의 모순을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시적 어법은 시정의 그것을 닮아 가고 시적 태도 역시 시정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가볍고 장난기 어린 방식을 취하며, 그러한 시적 태도를 통해 이 자본주의적 삶의 모순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창출된 최근 시의 파괴적 양식은, 인용한 시에서 단적으로 확인한 그대로 시를 세속적 유희의 차원으로 타락시키고 시적 진정성을 훼손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자아·주체·중심의 소멸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 양상으로 '자아의 소멸'을 들 수 있다. '자아의 소멸'은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다. 이승훈은 제임슨의 이론을 빌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나타난 주체의 소멸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고전적 토대는 개인간의 상호 경쟁에 있었던 만큼 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적 사고를 중시한다. 하지만 후기자본주의의 삶은 모든 것이 조직되고 관리되기 때문에 주체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동안 믿고 있었던 개념인 주체라는 것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적 인식에 대한 전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이 '자아의 소멸'현상은, 그러한 이론 자체의 타당성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그것의 시적 적용에 있어서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실내에 샘물이 걸어 들어온다 가
녀렸던 샘물이 번쩍이는 잉어 떼와
山을 두 팔에 안고 가득 차 오른다
성큼 미친 걸음으로 山이 불타 오
른다 타는 山 한 정적에 수억 년
꽃밭이 밀려온다 단정한 꽃밭이
……(중략)…… 채송화 봉숭아
다알리아 맨드라미 손을 휘 젓자 머
리칼이 미친 빛으로 헝클어진다 뒤
돌아보지 마라 불씨가 꺼지기 전에
이윽고 연주되는 악기처럼 자물쇠
가 열린다……(중략)…… 눈시
울처럼 뜨겁게 마르는 샘물의 손에
어느덧 들어찬 새벽 숲 넓은 이파리
들이 어깨를 들썩인다. 흰 천사의
속치마가 몰래 몰래 펄럭거리고 누
군가의 곤충들이 교미를 한다 아아
뜻밖의 고통 눈감지 마라
-박서원의 「어떤 황홀」 일부
인용한 시는 정상적인 의식의 주체가 어떤 뚜렷한 대상에 대해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인용한 시에서 정상적인 의식의 주체는 소멸돼 있다. 무의식 상태에서 떠오르는 어떤 환상적인 느낌, 혹은 이미지들을 정신없이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환몽적인 이미지들은 그저 두서없이 나열되고만 있을 뿐, 그 내적인 의미망의 연결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이 환몽적인 이미지들의 두서없는 나열이 무슨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이 환몽적인 이미지들은 의미의 연결은 안되지만, 어떤 분위기는 환기시키고 있다.
그 분위기는 다분히 성적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도 「어떤 황홀」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적인 분위기의 창출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협소한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다. 인용한 시는 결국 한 개인의 의식적 주제가 소멸된 상태에서 출발되는 환몽적인 이미지들을 다소간 성적인 분위기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시적 인식은 우리 삶의 보편적인 지평에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틀에서 '주체의 소멸'은 후기자본주의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체의 소멸을 통해서 빚어 낸 시는, 당대의 삶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무의미한 무의식 도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에 있어서 '주체의 소멸' 현상이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주체의 소멸은 결국 정신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치열한 정신 활동의 소산인 문학은 그 존립 근거가 없어진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주체의 소멸이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될지 몰라도, 문학 행위에 관한 한 주체의 소멸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비판적 수용이 당면 과제
지금까지 최근 우리 문학의 시류적인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시에 영향을 준 부정적인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인 양상들은, 문학을 세속적인 유희의 차원으로 타락시키고 문학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것이다. 요즘의 시류적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무분별하게 편승하는 것은, 결국 독자적인 개성
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문학성'을 잃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 후기자본주의사회를 규명하는 이론적 틀이고, 전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이 시대의 문화 사조다. 문화란 고립적이고 독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보편적인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은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사실상 어느 정도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러한 사회, 문화 구조를 설명하는 서구의 앞선 이론적 틀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까지 무분별하게 그대로 수용하여 우리 '문학'에 적용하는 것은, 우리 문학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것은 물론 위해한 일이다. 이 글의 구체적인 사례에서 우리는 그 위해성을 분명히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1930년대 서구의 모더니즘 수용의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실패는, 우리 문학의 전통성과 당대의 경험적 현실을 무시한 채 서구 모더니즘의 정신과 기법을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김기림의 시는 그 단적인 예에 해당되며 새로운 언어 감각을 선보였다고 평가받는 김광균의 그 감각적인 이미지들도, 실상은 시적 실감이 결여된 채 표피적인 감각성 만이 돋보일 뿐이었다.
이들에 비해 똑같이 모더니즘의 세례 속에 시를 쓴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우리의 전통적 토양 위에서 받아들임으로써 탁월한 시적 성취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1930년대의 문학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세계사적 문화 사조라면,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정신과 기법 모두들 무분별하게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문학적 전통과 보편적인 경험 현실의 토대 위에서 비판적으로 소용, 융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지만, 그러나 이에 대한 진지한 노력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