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점

한국 문화의 자생적 우상이 필요하다




박정진 / 세계일보 문화부장·문화인류학

경험론 철학을 창안한 영국의 베이컨(F. Bacon)은 자연 과학에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주장하면서 네 가지 우상(偶像)을 경계할 것을 제시했다. 그 네 가지 우상은 ① 종족의 우상 ② 동굴의 우상 ③ 시장의 우상 ④ 극장의 우상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우상은 문화 인류학자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다가오기 일쑤다. 베이컨이 경계토록 한 우상은 영락없이 지구상의 어떤 문화도 빠지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특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주장을 기준으로 할 때 대개의 문화론자들은 역시 관념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물론 문명을 그 도구적 성격 때문에 좀 뉘앙스가 다르다.)

상징과 적응의 함수 관계인 문학

문화는 왜 궁극적으로 관념론인가 ? 그 일차적 원인은 역시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때문일 것이다. 자연에 생각을 가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문화가 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문화는 자연 과학(기술)의 힘을 내포한다고 하더라도 관념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사실 경험론도 알고 보면 하나의 관념임에는 틀림없다.

문화는 왜 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 문화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있다. 먼저 특수성이란 지역성, 역사성을 내포한 '종족의 우상'을 말한다. 어떤 문화도 그런 의미에서 특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한 문화에는 언제나 보편성이라 할 수 있는 기원인 '동굴의 우상'을 갖고 있다. 인류의 많은 신화와 전설들은 이런 우상을 갖고 있다. 동굴은 인류의 원시 시대에 보금자리로 적당했다. 이 보금자리를 나오면 빛(태양·달·별)이 존재한다. 여기서 '동굴 안=어둠', '동굴 밖=밝음'이라는 이분법이 가능하게 된다. 태초의 이분법은 물론 낮과 밤이었겠지만 동굴과 관련해서 인위적인 이분법이 발생한 셈이다.

인간의 문화는 처음엔 물질적 도구로 시작했지만 점차 이것이 언어적 도구로 변형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활발히 하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언어사용이 '시장의 우상'을 탄생케 한 것이다. 인류의 시장은 물물 교환을 초기 형태로 하고 있으나 화폐라는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물건과 교환되는 보다 편리한 물건(화폐)을 갖게 된 셈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물질의 언어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을 대신하는 화폐 이외에 정신을 대신하는 화폐(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시장의 우상은 완성된다.

그런데 시장의 우상은 기본적으로, 등가 교환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너무 일상적이고 공통의 가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을 단조롭게 한다. 인간의 사회(문화)는 그것의 특성 자체가 복합성(complex)이기 때문에 활발한 교환을 위해서는 예컨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교환을 비롯하여, 서로 이질적인 것의 교환, 나아가서 때로는 부등가 교환도 허용해야 보다 활발한 소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일종의 의례(ritual)가 필요하고 보다 다원적인 가치(의미)를 담는 상징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극장의 우상'을 탄생케 했던 것이다. 시장과 극장은 종족과 동굴에 이어 인류의 활동 무대를 대표한다. 거기에서 교환되는 것은 식료품에서부터 사랑의 고백 등 다종 다양하다. 어떤 종족의 문화도 시장과 극장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가지며 살아가고 있고, 또한 그 종족과 동굴이 있기 마련이다. 베이컨은 과학을 이 우상 속에서 제외시켰지만 실은 과학(기술)도 이 문화의 네 가지 우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늘날 인류학의 결론이다.

문화는 결국 특수성(종족)과 보편성(동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시장·극장) 체계로 파악이 가능하다. 이것은 또한 순환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인류의 보편성(보편적 문법)은 무엇이고, 이것은 지역(종족)별로 어떤 특수성(지역적 방언)을 갖는가 ? 또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그물 사이에서 정신과 물질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 ? 이는 문화를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문화의 물적 토대(자연 환경)와 그 위에서 프로그램 된 상징적 기호 사이의 다원 다층의 의미망(webs of significance)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의미이며 그러한 의미는 의미를 나타내는 물적 대상을 가짐으로써 '정신-물질', 즉 '음-양'이라는 음양적인 나선형 구조를 갖는다. 이 나선형 구조는 마치 DNA의 이중 나선 구조처럼 대립항의 연속이다. 이것은 바둑의 흰 돌과 검은 돌의 조합이 이루어 내는 장관(壯觀)과 같다.

동굴의 우상은 문화의 상징성이 높은 부분이고 종족의 우상은 문화의 적응성의 지표가 되는 부분이다. 문화는 상징과 적응의 함수 관계인데 상징과 적응은 서로 평행일 수도 있고 상반될 수도 있다. 상징은 적응을 내포하고, 적응은 상징을 내포하는 것이 문화 생태학의 일반론이다.

문화는 궁극적으로 우상의 것

그러나 위의 어느 쪽이든 일반 민중(people)의 입장에선 상징, 즉 '우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다. 나머지 과학적인 분야나 전문적인 분야는 과학자(scientist)나 전문가(specialist)의 몫이다. 문화는 결국 총체성을 상징적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다. 그 상징성을 보다 세분화한 언어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문화와 수렴의 과정이 문화의 역동성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문화를 이원성(dualism)과 상호 호혜성(Reciprocity)으로 규정했다. 그의 말대로 문화는 이원성을 어떻게 일원화시키고 일원적인 것을 어떻게 이원화시키느냐의 문제이다.

문화는 어느 부분을 떼어서 보아도 대립항을 찾을 수 있고 전체(culture complex)를 대립항으로 볼 수 있다. 이 문화의 대립항은 종적으로 찾을 수도 있고 횡적으로 찾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문화의 세포는 이원 대립항(음양)의 연속인 셈이다.

동양의 음양론은 정신 활동, 사회 활동에 이어 인간의 신체 활동, 우주의 운행까지도 포괄한 거대한 음양 체계론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정신과 사회 활동에서 대립항(음양)을 발견한 셈이다.

서양의 학문적 전통은 인간의 신체 활동은 의학, 우주의 운행은 물리학으로 따로 발전시켰는데 여기에 과학의 '레테르'를 붙인다. 서구 문명권과 같이 문화와 문명, 문화와 과학을 이원적으로 보는 배경 하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한 존재이다.

인류 문화의 대이론(grand theory)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서구 문명이 자연 과학 분야에도 음양 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동양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요행히 관념에서 문화를 보았다. 이것을 물질 문화에도 확대, 적용하는 문화학자가 필요하다.

한편 위의 네 가지 우상을 진, 선, 미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굴의 우상은 그 근원과 보편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진'이다. 시장의 우상은 그것의 유통 품목이 정신(의미)이든, 물질(도구)이든, 또한 그 중간물이든, 대중적 공감을 얻어야 유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선'에 해당한다. 극장의 우상은 이 같은 유통을 더욱 활발히 하는 한편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미'에 해당한다. 이것은 또한 '동굴의 우상=학문', '시장의 우상=종교', '극장의 우상=예술'이라는 도식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모든 항목(종류)들은 동굴, 시장. 극장의 우상화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생산과 소비(소통)를 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일상적, 또는 비일상적으로 교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요람기(동굴), 성장기(시장), 난숙기(극장)가 있고 나아가서 쇠퇴기라는 특정 문화의 멸종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인간 의지의 것이든, 도구의 것이든, 정신의 것이든, 물질의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서구 문화는 동굴의 우상이며 유심론과 유물론의 이원론을 만들었고, 이것은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으로 이원론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오늘날 시장의 우상에서 자본주의는 사물의 우상을, 공산주의는 말의 우상으로 극적인 양상을 통해 극장의 우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문화를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오히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론자들은 도구를 물질로 보지 않고 상징·기호로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기호밖에 없다. 기호는 소통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마치 무기가 전쟁을 원하듯이. 그러나 그러한 기호도 생명체의 특성처럼 생멸한다. 기호도 생물로서의 인간의 특징과 종족의 기질 위에 성립한다.

흔히 인류 문화가 종족적 국가적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며, 각 문화마다 고전(古典, 聖經)을 가지는 것은 바로 문화의 종족성, 동굴성 때문이다.

인류 문화는 저마다 동굴이 있다. 동굴 밖에서 활개치다 허기가 지면 동굴로 다시 들어간다. 비, 바람이나 천둥, 번개가 칠 때도 마찬가지다. 동굴에서 원기를 회복하면 또 다시 시장에 나와 큰소리를 치며 교환을 한다. 때로는 그 교환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효용성 때문이 아니고 교환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즉 상징성 때문이다. 상징적 교환에는 저마다 필요로 하는 의미를 넣을 수 있다.

개인의 하루 생활(daily life)도 동굴에서 나와 시장을 거쳐 극장에 들렀다가 동굴로 다시 돌아가서 자기종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가 바로 우상의 것이라면 우리 국민은 어떤 동굴과 시장과 극장을 갖고 있는가.

한국 문화가 결여하고 있는 우상들

혹시 우리의 삶이 동굴과 극장은 없고 시장만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시장도 살벌한 시장이 아닐까, 꿈과 희망도 없이 등가 교환 자체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또한 기호적 도구의 물질주의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시장에선 우리의 상징적 기호가 들어설 빈 공지도 없는 것은 아닐까 ?

인류 문화가 기호적 도구, 도구적 기호의 선택과 조합을 통한 통사(syntax)의 구성이라면 문화의 문법은 각 문화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상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의 문화 상황은 어떤지 살펴보자.

첫째, 동굴의 우상이 잊혀졌다.

우리 문화는 단군 신앙을 아직도 제대로 복원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토착화가 되지 않은 상황과 역사의 정리가 주체적으로 되지 않은 탓이다. 과거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에도 각 가정에서 가계와 가통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고 있음과 맥을 같이한다. 부계적 전통은 여성의 권익 운동과 전혀 마찰되지 않으면서도 계승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설픈 부계 포기와 여성 운동의 남녀 대립적 운동으로 동굴의 신화만 훼손한 셈이다.

둘째, 시장의 우상이 해외 의존적이다.

우리 문화의 외래 종교 범람은 문화의 가장 큰 시장인 종교 시장-상징 기호 체계-의 수입 일변도(간혹 토착 종교의 수출이 있긴 하지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고급문화의 해외 의존으로 인한 모방 문화로-특히 학·예술에 있어서-종교와 더불어 문화 상부구조의 종속적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은 신체적 하부구조(저임 노동력), 기술적 하부구조(저급 기술)에 의존하는 시장 구조에 봉착해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문화의 질(자립도)이라는 측면에서 하부 구조의 빈약화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의 해외 의존도가 높고 과학 기술의 첨단화가 약하기 때문에 시장 단위 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가 독립적 단위가 되기에 부족하다면 더더욱 기술의 첨단화와 상품의 문화화(문화 상품의 개발)가 시급하다. 이는 문화 상부구조인 기호적 도구와 하부구조인 도구적 기호의 수출입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얘기다.

셋째, 극장의 우상이 전도되어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문화의 영재(스타)가 부족하다는 의미와 상징적 기호의 활성화가 제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아가 문화의 상징성이 떨어져 상·하부 구조간에 소통(활발한 대화)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현재 대중문화의 스타는 양산되고 그 수명이 너무 짧은 반면, 고급문화의 스타는 소외되고 있고 전통문화 가운데도 민속문화에 비해 양반문화가 소외되고 있다. 문화 상·하부 구조의 폭 넓은 교류와 공감을 통해 문화적 능력을 확대시키고 문화 기층을 두텁게 함으로써 문화의 안정도를 높여야 한다. 즉 문화입국을 하려면 극장의 우상을 보다 다양화,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의 보다 자유 분방함이 요구된다.

끝으로 종족의 우상은 문화의 기본적 토대이다. 한국 문화에서 종족의 우상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일제 때로 국가가 식민으로 전락했으니 그 회복을 위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 후 광복, 6·25를 통해 종족의 우상은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지금은 '민족'이 서구의 시장의 우상-공산주의는 말(言)의 시장, 민주주의는 물(物)의 시장-에 짓밟혀 있는 셈이다.

서구는 그들의 '시장의 우상'을 우리나라에서 소비 지향적인 '극장의 우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6·25는 물론 그 후 남북 관계는 계속 세계에 볼거리를 제공했고 지금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상끼리의 전쟁에서 우리의 동굴의 우상과 종족의 우상은 서구의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에 점령당해 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서구는 시장과 극장의 기호(도구)를 부리는 주체의 입장이고 우리는 교환의 기호에 불과한 셈이다.

우리 문화가 기호의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문화의 주체화, 토착화, 선진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서구 문화가 생산한 기호의 읽기와 해독에 급급한 실정이다. 또 그 해석에 있어서 조차 주체적인 입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문화는 현재 서구의 동굴의 우상과 종족의 우상을 담는 시장과 극장에 불과하다. 우리 문화는 자생적인 우상의 결핍증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