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다 복을 비는 민간 신앙, 산 메기
황루시 / 관동대 교수
'산 메기'란 말은 강원도 지역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것이다. 산 메기는 문자 그대로 산에게 무엇인가를 먹이는 신앙이다. 즉 산을 대접하는 의례인 것이다. 그렇지만 발음이 불분명하여 '산 에기'라고도 들린다. 그 경우에는 동해안 지역의 골매기 신이 고을을 막아주는 것으로 이해하듯 산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은 영동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태백산맥을 의지하고 사는 마을들, 즉 태백이나 정선 등지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산 메기는 거의 모든 민속이 그러하듯이 최근 급격히 전승이 끊어져 지금은 하고 있는 마을이 많지 않은데 가장 활발히 전승되는 지역은 삼척군 일대이다. 삼월 삼짇날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등 주로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경우도 있다.
산 메기는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주부가 제물을 준비해 혼자 산에 올라가 절을 하고 비는 약식 의례이다. 현재 명주군 옥계면 심곡과 도직 마을에서 단옷날 아침에 행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또 하나는 무당이나 경을 읽는 복자 등 전문가를 데리고 가는 것인데 이때에는 집안이나 한 마을에 사는 서너 집이 모여서 단체로 가는 것이 보편적이다. 삼척군에서는 대개 이런 방법으로 산 메기를 한다.
도계읍 신리는 삼척군 안에서도 무척 외진 마을이다. 최근 태백의 통리를 거쳐가는 산길이 포장되어 교통이 좋아졌다. 신리 마을에서는 사월 초파일(양력 5월 28일)에 산 메기를 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전화를 했는데, 마침 이장님(김종길·48세)댁에서 산 메기를 간다고 하여 운이 좋았다. 약속 시간을 내어가기 위해 새벽길을 달렸다. 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는 신록이 신선하고 아름답다.
아침 7시 20분, 이장님 댁에 도착하니 집안 어른들 세 분이 담소를 할 뿐 가는 사람은 아직 안 왔다고 한다. 먼저 자기네 산을 모신 후에 오기 때문에 좀 늦는다는 것이다. 통통하고 연한 고사리에 콩가루를 묻혀 끓인 국을 달게 먹으며 노인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장님은 김해 김씨인데 큰집이다. 그리고는 가운데 집안의 어른 두 분(김상배·73세, 김연배·63세)과 작은 집안의 숙부 한 분(김상렬·72세)이 요즘 몸이 좀 좋지 않은 둘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세 집안이 모여 산 메기를 가는 것이다. 산 메기는 그저 아이들 무병하게 잘 크고 자손 잘되라고 산에 가서 비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조상을 대접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산에 가서 베 조각을 갈라 주며 각 조상들을 쳐들었는데 이는 조상의 길을 갈라 주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신체인 '산'은 대개 부엌 한구석에 베 조각을 걸어 두는데 요즘은 베를 안 짜기 때문에 그냥 한지를 접어 모신다. 이장님 댁 역시 부엌에 한지를 접은 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산은 산 메기를 다녀온 후에 새 종이로 갈아 모신다. 그런가 하면 왼새끼를 꼬아 부엌에 걸어 두고는 육고기나 어물을 먹을 때마다 한 점씩 걸어 두는 곳도 있다.
또한 산 메기는 소와도 연관이 깊다고 한다. 산은 예로부터 부엌에 있는 소 여물통 위의 기둥에 모셨었다. 삼척 지방의 부엌은 원래 외양간과 붙어 있었다. 부엌에서 쇠죽을 끓여 여물통에 부으면 반대편에 있는 외양간에서 소들이 먹을 수 있게 된 구조였다. 신리는 쌀 서되 먹고 시집가면 부자라고 할만큼 궁핍한 마을이었다. 그 옛날 목돈을 쥐는 방법은 소 키우고 아낙들이 베 짜는 일밖에 없었다. 소는 산에 매인다고 하여 소가 아프거나 새끼를 낳을 때면 으레 산 앞에 가서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 상례였다는 것이다.
"조금 빌어나 두지 뭐, 귀신같이 안다는 말도 있는데……"
신리는 70여 호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산간에 있어 당귀와 도라지가 주된 산물이고 고추도 조금 한다. 옛날에는 마늘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지력이 달려서 이젠 못한다. 작년까지 당귀 값이 좋았는데 올해는 중국에서 수입이 되는 바람에 과연 어떨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불안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어 올해도 그냥 당귀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외고종 사촌이 된다는 복자가 온 것은 거의 9시가 되어서였다. 엄재진(64세)씨는 아주 활달한 성품으로 보였는데 열 여섯에 장가가서 앓는 바람에 빌기를 시작했다. 약도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오직 비는 것으로 아들의 병이 낫게 되어 결국 복자가 되었는데 옛날에는 독경도 했으나 요즘은 찾는 사람이 없어 안 한다고 한다.
산 메기 하는 곳은 바로 집 뒷산이고 불과 10여 분 거리이지만 몹시 가파랐다. 솔가리를 긁어 가는 사람이 없어 한 걸음 올라가면 두 걸음 미끄러지는 판인데 할아버지들은 제물을 지고 잘도 올라간다. 잡목이 우거진 가운데 멀리서도 잘 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곧게 하늘을 향해 올라간 소나무들이 힘차게 생명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가운데 나무가 산신이고 왼쪽의 나무는 삼신이라고 믿는다. 남자들은 가운데 소나무와 오른쪽 나무사이에 자리를 골라 제단을 만든 후 제물을 진설 한다. 산을 향하여 왼쪽부터 큰집, 둘째 집, 작은 집 순으로 상을 차리는데 메 네 그릇, 잔 네 개, 어물, 적, 편, 과일, 삼색 실과 등으로 푸짐하다. 저 건너 산에서도 산 메기를 하는지 징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이장님의 부인과 작은집의 부인, 그리고 노인의 며느리가 함께 왔으나 남자들이 제물을 진설 하는 동안 제단 아래쪽에 그저 앉아만 있다.
함께 절한 뒤 메에 수저 꽂고 음식을 권한 뒤 복자는 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축원을 한다. 먼저 부정경으로 제당의 부정을 물리고 이어 조상들을 축원한 뒤 태을보신경으로 신들을 모신다. 그리고는 산왕경을 외우는데 이는 산신으로 살령대신이라고 한다. 마지막에 불설명당경을 빠짐없이 외우고는 축원경을 한번 더 외운다.
"조금 빌어나 두지 뭐, 귀신같이 안다는 말도 있는데……."
그리고 나서 사람 좋게 웃는다. 그러나 섭섭했는지 소주를 한 잔 마시고는 다시 쭈그리고 앉아 잎 달린 나뭇가지를 흔들어 파리를 쫓으면서 축원을 계속한다.
"재차 축원 드리옵기는 명당이면 밝히시고 터전이면 밝히실 때 다 크게도 보옵시고 김씨에 권명대주 반가이도 보옵시고 즐거이도 흠향하시어 크게도 도웁소사 섭섭다는 말씀 엿지마시고 그르다고 글문 엿지 마옵시고 봄이 되면 꽃맞이 잎이 피어 잎맞이 정성이오니 그 아니도 반가웁고 그 아니도 귀여우랴……."
그리고는 식구마다 소지를 올리면서 축원을 했다.
"신유생의 권명대주 명소지 복소지가 되옵니다. 일년 열두 달 삼 백 육십 오일 다 지나가더라도 삼재팔란 관재귀설 고뿔 물알로 소멸시켜 주옵시고 먹을 녹을 점지시켜 주옵시고 입을 녹을 점지시켜 달라고 들에 가면 들소망시키시고 산에 가면 산소망시켜 달라니 상천시켜 주옵시면 그 아니 반가우랴 그 아니 기쁘리까."
소지 올리기가 끝나자 식구들은 철상하고 복자는 삼신나무에 폐백을 건 후 아래에 메 한 그릇을 놓고 앉아 다시 빌기 시작한다. 삼신제왕을 모시고 역시 태을보신경을 외운다. 철상이 끝나자 산신 목에 50센티미터쯤 되는 길이의 베와 실 한 꾸러미를 나무에 건다. 이를 위목으로 모신다고 하는데 실은 명 길라고 거는 것이요, 베는 산 줄이자 조상님과 산신에게 드리는 폐백인 것이다. 상에서 조금씩 던 음식을 신문지에 펼쳐 놓고 복자는 한쪽에 돌아앉아 거리를 멕인다.
조상은 극락으로 보내고 잡귀는 위협하고 달래서 보내는 의례이다. 잡귀를 풀어 먹이면서 '너 이렇게 대접해도 만약 안 돌아가면 옥갑경으로 묶고 각살경으로 박살내서 철망경으로 꼼짝 못하게 하며 칼산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위협이 무시무시한데 정작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 평안하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퉤, 침을 한 번 뱉고는 마친다.
"농사 짓는데 언제 소리할 새가 있소, 이만하면 잘하지요."
이제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이 떡 얻어먹으려고 모두 올라와 법석을 떨었는데 이젠 아주 단출하다. 어른들은 걸진 안주에 소주를 마시면서 농사일을 얘기한다. 일 년 소득은 대략 5백만 원 정도인데 품값을 계산하면 사실은 밑지는 것이다, 지을수록 손해보는 것이 농사지만 그렇다고 안 지을 수 있느냐, 지난 정월에 서낭 고사 모신 후 남자 3만원, 여자 1만 3천 원으로 품값을 정했는데 워낙 일손이 딸리니 그게 말뿐이지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끝에 좋은 날 소리나 한자리씩 하자는 쪽으로 돌아갔다. 역시 말 잘하고 술 잘 먹고 놀기도 잘하는 복자 할아버지가 아라리를 한 자락 낸다.
"사금산 불밤나무야 밤 많이 답싹 열어라. 지난 8월에 만났던 그 님을 또 만나 보세."
"육합산 곤드레 개미취 내 다 뜯어줄 것이니 잔솔밭 한줌 알루만 뒤따라오게."
워낙 목이 걸걸해서 듣기 좋다. 소주 한 잔도 채 못 마시고 흥이 난 아주머니 한 분이 따라 부른다.
"한치 뒷산에 곤드레 개미취 맛이나 맛만 같아야 고것만 뜯어먹으면 숨 살아나요."
"꽃 본 나무야 물 본 기러기 탐화 봉접인데 나부가 꽃을 보구서 수수이 갈소냐."
"내가 농사 짓는데 언제 소리할 새가 있소, 이만하면 잘하지요 뭐."
"우수야 경첩에 대동강이 풀리고 오늘날에야 강릉에 오신 손님 말씀에 내 속이 풀린다."(웃음)
한동안 술잔이 돌아가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을 때 집으로 내려왔다. 복자는 집에 오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가 청수와 메 한 그릇, 수저를 소반에 받쳐 놓고 삼신 축원을 한다. 부정경으로 부정 물린 후 삼신경을 읽는 것이다. 터주와 지신도 위하고 조왕경으로 조왕신을 모신 후 태을보신경을 외우고 마친다.
아이들이 호기심에 차서 기웃거리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외우니 그만 가 버린다. 그사이에 이장님은 새로 산을 부엌에 걸었고 청수 한 그릇 받쳐 놓고 절을 했다. 삼신 축원이 끝나자 싹싹한 이장 부인은 다시 술상을 봐 오고 이제부터 다시 풍류가 시작될 참인데 우리는 아쉬운 인사를 챙기고 일어났다. 정오였다.
산 메기의 기원이나 목적은 상당히 복합적이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먼저 기원을 보면 '산'이란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호환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예맥(濊貊)에서는 호랑이를 제사 지낸다고 되어 있어 남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비린 것을 먹을 때마다 산에 거는 행위 역시 호랑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소가 산에 매여 있다는 말도 호랑이가 물어 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서 나왔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산 메기는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의 발복을 기원하려는 신앙이 지배적이다. 소 역시 민간 신앙에서 조상으로 모셨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산신과 삼신, 그리고 조상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간 산 메기는 집안 잔치의 성격이 더 강했다. 조상님들 화전 놀이시키면서 자손들도 좋은날 골라 잠시 바쁜 일손을 쉬고 모여 놀면서 집안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