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정한용 / 극단 연우무대 대표
관객은 연극의 필연적 요소
연극은 수많은 요소들을 포용하고 있어서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연극은 배우에서 시작하여 관객에서 마무리되는 예술분야인 것이다. 일찍이 그로토우스키는 〈가난한 연극〉을 통해 희곡이 없어도 극장이 없어도 훌륭한 연극을 창출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역시 연극에서 관객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연극의 특성 중에 하나로 일회성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배우의 그날 그날의 사정에다 관객의 참여도라는 변수가 가미되어 매 번의 공연이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똑같은 공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드라마라 할지라도 영화나 TV 드라마는 일방적인 전달매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극은 관객과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연극공연은 관객이 내는 입장료를 기본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나 같은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관객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연극제작을 지탱해 주는 관객이 최근 대단한 양적인 팽창을 이룩하고 있는 것은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서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내가 연극을 시작하던 1960년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내가 개인사정으로 연극계를 떠났던 1980년대 초의 상황과도 엄청나게 변화된 것을 최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최근 연우무대에서는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 시리즈를 진행하고있는데 〈국물 있사옵니다〉의 작가 이근삼 선생은 1966년 초연 당시의 상황을 '연기자들 모두가 무보수로 나오는 등 그때 우리는 연극이 좋아서, 친구가 좋아서 맨몸으로 뛰었다'라고 회상하신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으로 연극을 할 수도 없고 무작정 낭만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을 수만도 없는 계제에 이르렀다. 즉 좋은 연극을 제작하기 위해서라도 공연수익, 그리고 관객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하겠다.
여성관객에 의존해 온 연극
1960년대를 영화의 황금기라고들 한다. 바꿔 말하면 연극이 대중이 기호하는 예술 즉 대중문화에서 한발 물러서기 시작한 시대라고 하겠다. 그 전의 상황은 모르겠지만 이때부터는 확실히 연극은 일반대중보다는 여성관객 그것도 여대생에 대한 의존도가 무척 높아 왔다. 아직도 여성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연극으로 흥행할 생각은 않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여대생은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 연극을 꾸준히 지켜 줄 그룹이다. 친구끼리 오기도 하지만 극장을 데이트 장소로 애용하여 쌍쌍이 오는 경향이 많은데 우리는 아직도 이런 유형의 관객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이 그룹에 접근하려면 개인적인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극단을 시작하던 초기에 나는 정말 어렵게 이화여대 신입생 명단을 입수했는데 기획 담당자의 부주의로 그걸 그만 잊어버리고 빌려준 선배에게 백배사죄하고도 한동안 죄인처럼 지낸 것이다. 그만큼 각 극단마다 여대생층을 어떻게 극장으로 불러들이느냐 고심들을 많이 했었다.
다음에는 여자들의 사치 생활이 활발해지면서 기업의 여사원 그룹이 부각되어 왔는데,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는 여대생을 앞서는 파워를 행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몇몇 극단에서는 특히 대기업의 여직원을 조사, 정리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여직원회에 추파를 던지곤 한다. 그 명단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은 물론이다. 이 그룹은 개별적으로보다는 떼를 지어 극장을 찾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외에 여교사, 젊은 주부도 좋은 관객층으로 고려할 수가 있는데 이 그룹만을 분리하여 별도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직까지는 마땅치 않은 것 같다.
새로운 관객층의 개발
연극의 관객이 여대생에서 시작하여 여직원, 여교사, 젊은 주부로 확산되어 가던 추세에서 최근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관객층이 개발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주부층, 그것도 비교적 나이가 든 주부층인데 이는 산울림 극단의 커다란 성과라고도 볼 수 있다. 〈엄마는 나이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잇따른 공연을 통해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는데 물론 박정자, 윤석화라는 스타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타겟을 명확히 설정해 놓고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등 산울림의 기획방식은 진일보한 것으로 여타 극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나이 든 주부층의 성향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대체로 커서 그런 대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으며 처녀시절의 향수를 찾아 극장에 오지 않나 싶다. 최근 가까운 친구들에게 극단 연우의 후원인이 될 것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친구의 부인들에게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남편과 함께 극장을 찾는 것을 무척 즐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연우소극장에서는 자주 노년층의 부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외국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직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두 번째의 관객층은 엉뚱하게도 직장 남성층. 그것도 30대 이상 40대까지에 이르는 광범위한 층이다. 내가 엉뚱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흔히 말하는 마케팅 또는 광고 대상으로도 별로 마땅치 않은 계층으로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그만큼 설득이 어려운 집단이다. 그런데 〈불 좀 꺼주세요〉는 이층을 겨냥하여 1년 반 이상 롱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남성층은 연극의 예술성에 관심을 가졌다기 보다는 소위 '벗는 연극'에 몰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장기적으로 볼 때 연극 관객으로서 정착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층에 연극이 화제가 되고 또 시류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극장을 찾게 만든 것은 앞으로 연극의 상업성을 검토하는 상황에서는 유념해 두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두 가지 경향
앞에서 얘기한 새로운 관객층과 연결되는 내용이지만 두 가지의 경향이 지금 연극판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관객보다는 연극의 속성이란 측면에서 부연해 보고 싶다. 그것은 흔히 '페미니즘 연극', '벗는 연극'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나름대로의 내 의견을 피력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연극-연극의 관객 중 여성이 압도적이라고 할만큼 많다보니 이러한 여성관객을 겨냥한 연극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중에서 여성문제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루고 있는 연극이 많이 선보이고 있는데 〈자기만의 방〉이 장기 공연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연극은 여성신문사를 중심으로 여성학에 관심이 많은 여류학자, 교수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흥행면에서 제법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접근하는 방식이 여성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끼리끼리 모이게 할뿐이라면 오히려 여성문제의 해결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해 본다.
벗는 연극-얼마 전 3년 전까지 같은 직장에 있던 동료들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내가 좌상인 관계로 자연스레 연극 그리고 벗는 연극이 화제에 올랐다. 요즘 직장 사회에서는 〈불의 가면〉이 대단한 화제라는데 그 중의 한 명은 이미 연극을 보았다고 했다.
"그냥 벗는 연극이면 벗기는 데만 주력했으면 좋겠어요. 개똥철학 같은 얘기를 중언부언하니깐 귀찮아요."
남자들만 벗는 연극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불의 가면〉에서도 그렇지만, 몇 년 전 〈그 여자 이 순례〉에서도 기주봉이란 배우가 옷을 거의 다 벗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줌마 관객이 갑자기 몰려들어 혼잡을 빚은 사례가 있다. 남자든 여자든 옷을 벗는 다는 원초적(?) 상황에서는 서로가 무심할 수가 없는가 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 연극에 누드선풍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물론 나중에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 시작은 제의적 연극의 추구 또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구가를 위해서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객은 연극은 별로 이고 벗는 몸에만 관심을 갖고 화제에 올리고 있다.
나는 '페미니즘 연극', '벗는 연극'의 최근의 경향 사이에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여성학 학자들은 성을 상품화한다고 벗는 연극을 비난하고 나설 것 같고 반대편에서는 '여성문제'를 상품화한다고 반격을 하고 나설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극이 많은 관객을 흡수하고 있는 만큼, 단순히 효과적인 또는 일과성 현상에 그치지 않도록 긍정적으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흔히 말하는 흥행의 공식
내가 다시 연극계에 복귀하면서 그것도 연극 제작자의 일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면서 많은 충고를 들었고 실제로 여러 연극의 흥행형태를 눈여겨보아 왔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믿는, 또 실제로 상당부분 증명된 흥행의 공식이 있음을 깨달았다.
첫째, 연극의 내용이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관객은 쓸데없이 심각한 내용은 질색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 시리즈에 있어서도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국물 있사옵니다〉와 같이 웃음기가 살아 있는 연극에는 많은 관객이 찾아오고 특히 〈파수꾼〉은 내 생각에는 괜찮은 연극 같은데 관객의 괄시는 심각한 정도다. 여하튼 관객을 위해서는 가볍게 웃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등장인물이 적어야 된다. 이번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은 원래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나마 반 정도로 축소하여 공연하였는데도 의상, 분장, 하다못해 식대에 이르기까지 과다한 지출을 감내해야만 했다. 5명을 넘어서는 곤란하다는 공식은 최근 2인극, 더 나아가서 모노드라마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셋째, 소극장에서 최소한 2개월 이상 장기공연을 해야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있다고 한다. 요즘 연극활동의 중심이 완전히 소극장으로 옮겨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 대극장 공연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리를 들은 지 꽤나 오래된 것 같다. 관객들은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극장의 공연보다 가깝게 자연스럽게 배우를 대면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또한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기본 제작비를 적게 투입하기 때문에 부담이 경감된다는 이점이 있다.
이 밖에 '비싸더라도 이름난 배우를 선택하라' 등 몇 가지 더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요즘 연우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박상현의 표현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 이러다간 몇 년 내에 연극의 주류가 소극장에서 두 명의 연기자와 나와 가벼운 희극을 공연하는데 그 중의 여자는 옷을 벗는다는 식이 되지는 않을까요 ?"
프로듀서 시스템 그리고 뮤지컬
관객의 수가 늘어가면서 연극을 통해 돈을 벌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연극의 양적인 팽창으로 당연히 상업성 있는 연극을 검토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기획회사라는 형태의 프로듀서 시스템과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획회사의 일 솜씨는 확실히 전문적이다.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을 우선 확보하고 관객이 관심을 가질만한 배우와 비싼 돈을 주고라도 계약을 한다. 앞서 말한 흥행의 공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이름난 연출, 유명 배우에게도 흥행수입의 지분을 약속하기도 한다.
가장 압권인 것은 이들의 홍보방식이 개인적인 연고를 내세워 방송국의 가능한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출연자를 내세우고, 또한 지분 약속을 받은 연기자들 스스로가 홍보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온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포스터를 거리거리에 도배하듯 하는데 아무튼 포스터에 대한 이들의 확신, 그리고 자신감은 대단하다.
이와 같은 프로듀서 시스템은 프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동인제와 같은 아마추어는 발을 붙일 수 없을 만큼 확실히 강력하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가 몇몇 있기는 하지만, 연극판에 정착하였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소극장을 바탕으로 상업적 연극이 성공하기는 힘들고 또 보통의 연극은 자생능력이 부족해서 정부 및 기업 등의 지원이 필요한 만큼 이에 대처하는 새로운 프로듀서 시스템을 기대해 본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은 특히 미국과 영국의 경우 상업적 연극을 대변하는 형식이고 일본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다. 그래서 인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뮤지컬이 성공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 아쉬운 것은 그 대부분이 영미 뮤지컬의 수입이고 창작 뮤지컬은 〈동숭동 연가〉정도가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우리의 뮤지컬을 만들고자 오래 전 예그린이라는 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얼마 전부터는 88 예술단인가 서울예술단인가가 대단한 공을 기울였지만 그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또 듣자하니 모기업에서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한국적 뮤지컬을 개발한다고 한다. 그 규모로 보아 이것은 연극 또는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인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기업의 생리가 이윤의 추구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로 생각할 때 오히려 우려되는 바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독자적인 관객 개발
이제까지 나는 꽤 아는 척 하면서 지금의 연극계 전반적인 현상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내쪽으로 치우친 판단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객관적인 제삼자가 아닌 바에는 어떻게 냉철할 수만 있겠는가 ?
마찬가지로 관객의 만남에 있어 나는 보편 타당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관객이 자기의 기호에 따라 공연을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단도 다양해진 관객층 속에서 극단 성격에 맞는 관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어차피 모든 관객층을 수용할 수도 없고 더더구나 모든 관객층이 원하는 것을 모두 충족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극단이 관객을 선별한다는 표현이 건방지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 ? 극단이 관객에게 암내를 풍기는데 그 암내의 성향을 관객이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같은 맥락에서 가끔 관객명단이 상품화될 수도 있다는, 즉 돈을 주고 빌려서 이용해 보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같다. 요즘처럼 다양화된 사회에서 살아 남는 길은 오히려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함으로써 각 극단 극장마다의 자생력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객과의 진정한 소통
그런데 우리 연극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관객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 어렸을 때에 들은 얘기로 예술은 대상의 표피적인 욕망(want)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욕구(need)에 맞춰져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관객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도 의심스럽다. 우리는 공연히 장님 코끼리 더듬기식으로, 아니면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관객의 양적인 증가, 새로운 관객층의 개발 등 제반 현상은 분명히 분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전반에 나름대로 확고한 지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개인 또는 극단이 감당해야 될 일은 분명히 아니다. 이는 문예진흥원이든지 아니면 연극협회에서 감당하고 연극계에 공표해서 방향제시를 해야 될 일인 것이다.
아울러 좀 외람 된 얘기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관객은 좀더 관극 훈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소극장에서의 가벼운 연극보다 오히려 대극장에서의 진지한 연극이 연극의 본령임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국립극단 등 여건을 갖춘 단체에서 특히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우리의 연극예술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각 대학에 확산되어 있는 교양 연극강좌를 통해서도 진정한 연극예술과 진솔한 관객과의 관계가 보다 강조되어서 연극이 심심풀이 땅콩의 신세는 하루바삐 면했으면 한다.
그런데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의 연극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그만큼 다양하다 못해 우후죽순격의 무질서한 공연행위가 자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우리 연극인 자신이다. 무엇보다 현금의 공연양태를 정확히 분석하여 다양한 공연행위가 알기 쉽게 분류가 되고 왜 이런 연극이 공연되는가 하는 분명한 설명이 따라야만 장기적으로 관객과의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을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연극비평가들에게만 책임 지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노력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해야 되지 않을까 ? 나아가서 관객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제대로 된 '연극 정보지'를 기대해본다. 우리의 관객들은 자기가 원하는 연극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언제 어디서 공연되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과 관객이 만나는 시점에서 관객들 비교적 성실하게 이끄는 최소한 주간 단위의 매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모처럼 확보한 관객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관객을 흡수할 수가 있을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열렬하게 연극공연에 호응하던 그 관객들은 다 어디로 갔길래 지금 우리는 아직도 20대 관객의 비위만 맞추려고 허둥대고 있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