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연극

편역, 번안, 각색, 각색전 창작극? 혹은 에피고넨의 연극




김성희 / 연극평론가·한양여전 교수

번역과 편역, 번역과 번안, 각색과 창작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문화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 편역, 번안, '각색적 창작극'(이것은 나의 조어이다. 각색으로 볼 것인가, 창작이라고 볼 것인가, 그 경계가 모호한 연극적 글쓰기를 우선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의 문화적 유행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요즈음 우리 연극들에 특징적인 징후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한 연극에 여러 글쓰기가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여러 목소리의 뒤섞임이 작품의 완성도나 미학적 성취에 기여한다기보다는 무분별한 베끼기, 혹은 대중의 통속적 취미에의 영합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포스트 모던적 현상으로 텍스트의 겹치기, 얽힘, 페스티쉬 기법을 들고 있고, 이 경향은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문학, 방송, 가요, 영화, 미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논쟁과 분쟁을 낳고있다. 표절과 모방, 혹은 창조적 해체와 재구성, 원전을 밝힌 새로운 글쓰기는 그 논란의 여부를 떠나서 하나의 문화적 유행을 이루고 있다. 학문이나 사상, 예술 등에서 서로 모방을 하고 흔적을 지우려 애쓰는,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 사라진 에피고넨의 시대.

사실 어떤 '유행'이 그 시대의 특징적 조류를 이룬다 해서 탁월하고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그 유행이 전혀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엘리아데의 말처럼, '문화적 유행'이 가지는 매혹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는 그에 관계된 정황이나 해석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만들지 않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비판도 유행을 없애진 못한다.

그러나 우린 앞에서 말한 대로, 연극창조 작업에 서로 전범이 되면서 모방적 재생산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는 '유행'의 문화적 중요성과 그 의미를 최근의 구체적 작품들을 대상으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반성의 힘으로 창조작업을 수행해 나갈 때 모방적 재생산이나 통속화의 순환고리가 끊기고, 새로운 글쓰기가 진정 창조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사랑, 거짓사랑〉 편역은 '창조적 반역'인가 ?

연극을 희곡작품의 국적과 언어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분류한 것이 번역극과 창작극이다. 번역극은 우리 신극의 초창기부터 연극의 지평을 넓히고 문화적 체험과 보편적 공감대를 넓혀온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좋은 번역극이 우리 창작극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 중의 하나가 되어온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극은 그 희곡작품이 창작된 시간과 공간의 차이, 그 문화적 정서와 사회적 맥락의 차이로 인해 관객에게 이질감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제작의 과정에서 그 이질감과 문화적 단절의 폭을 메꾸기 위해 편집이나 수정작업이 불가피하게 요청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말'이 아닌 번역 투의 대사와 번역극의 연기는 배우들에게 자연스러움이 아닌 어떤 상투형을 부여하기도 했다.

번역은 반역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휘의 뜻보다는 어휘의 독특한 뉘앙스와 아우라를 중시하는 언어예술인 문학의 언어를 다른 나라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왜곡이나 수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으로 반역'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연극의 시청각적 공연의 특성상 관객은 희곡의 대사를 귀로 듣고 판단하지, 텍스트를 눈으로 읽으며 대사의 오역 여부를 확인할 입장에 있지 않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연극의 총체적 재미와 의미, 그리고 우리말화 되어 자연스럽게 구사된 대사의 묘미가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러므로 희곡의 번역자와 연출자의 '창조적 반역' 작업에 대한 문화적 책임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극단 민중의 〈진짜사랑, 거짓사랑(톰 스토파드 작, 정진수 편역·연출)〉은 역자이며 연출가가 다분히 역설적 표현으로, 우리 대중의 문화적 이해력과 '통속성의 수준'에 영합하기 위해 '편역'을 했다고 밝힌 작품이다. 편역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군소 등장인물 3명을 없애고 원작의 고도의 지적유희 부분을 상당히 절단하고 브로디라는 인물의 정체를 변조했다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원작을 통속화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창작극도 연출가의 손에서 수정되고 편집되기도 하는 것이 공연예술의 속성이기 때문에, 공연의 미학적 작품성이 보다 훌륭하게 구현된다면 이러한 편역이 그다지 나쁠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원작의 주제나 작품의 의미를 왜곡시키거나 열등하게 재창조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충족되어야만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에 충실한 번역극이 '편역'보다 반드시 작품성이 뛰어나다거나 관객이 즐기는 작품이라는 명제는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진짜사랑, 거짓사랑〉은 우선 사랑의 사각관계, 친구와의 아내 바꾸기라는 다분히 통속적이고 서구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우리 연극계에서 흔히 공연되는 비슷한 소재의 희극들과는 달리 매우 지적으로 인생과 사랑의 의미를 반추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이 연극의 기본 구조가 연극과 인생의 뒤섞임, 실제와 허구의 교차라는 이중구조와 순환적 결말로 부조리한 인간조건의 통찰을 보여주는 주제에서 드러난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에피그램을 연상시키는 이 연극은 사랑의 정열과 그 덧없음, 인생의 무의미성을 매우 지적인 대사로 전달해 준다. 중산층 가정을 간소한 사실주의 스타일로 재현한 이 연극은 특히 가로무대의 사용으로, 관객들은 극중 주인공들이 겪는 연극과 인생의 이중적 삶이 서로 스며들고 얽히는 과정 못지 않게, 무대 너머 맞은편의 관객들에게 서로 구경하고 구경 당하는 이중적 관극체험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극 스타일은 무대라는 거울로 서로의 모습을 비쳐보는 특수한 심리적 효과를 갖는 대신, 상당부분 배우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 행위를 상상해야 하는 불만족스러운 관극 또한 감수하게 한다. 그러나 연극의 내용이 가벼운, 혹은 통속적인 줄거리 속에 무겁고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심리적 사실주의 극이므로 배우들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무대가 더 적절했으리라 생각된다.

극은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아내(이재희 분)의 부정을 남편(김춘기 분)이 따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음 장면에서야 첫 장면이 실은 현실이 아니라 연극의 한 장면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연극의 극작가 헨리(박봉서 분)와 여배우 샬롯(이재희 분)에게 연극배우 부부인 맥스(김춘기 분)와 애니(김혜옥 분)가 찾아온다. 헨리와 애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애니는 그들의 사랑을 공표하자고 말하지만 헨리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헨리는 라디오에 출연하여 '들키면 표절이고 들키지 않으면 표절이 아니다'라는 그의 문학관을 얘기한다. 결국 그들의 사랑이 맥스에게 들켜, 그들 부부는 각자 이혼하고, 헨리와 애니는 결혼한다. 첫 장면의 연극이 맥스에게 현실화 된 셈이고, 그 희곡을 쓴 사람은 헨리이고, 샬롯도 이혼을 실제로 겪으므로 인생이 연극을 모방한 셈이다.

헨리 부부는 행복한 신혼생활을 갖기도 하지만 곧 사랑의 갈등을 겪는다. 사랑의 기쁨은 덧없이 흘러가고 애니는 브로디라는 반핵운동가(사실은 자신의 해외군대 기피를 위장하려는 사이비로 드러나, 애니의 사회운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구명운동을 하러 다니며, 헨리가 브로디의 엉터리 희곡을 고치도록 종용하는 등 날카로운 갈등이 그들 부부의 사이를 메꾼다. 헨리 역시 아내에게 배반당하는 맥스의 역을 실제로 겪게 된다. 마지막에 헨리는 맥스가 샬롯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이 연극은 사랑의 독점이 식민주의와 같은 허구라는 전언과, 서로가 경쟁자를 모방하는 심리를 여실히 보여 준다. 4명의 주인공이 결국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욕망이 대상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촉발된 것이란 걸 보여준다. 욕망의 뿌리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고, 사실은 타자 베끼기라는 모방욕구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 이 연극이 말하고 있는 '진실(원제목처럼)'인 것처럼 여겨진다.

헨리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우리들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살고 있는 삶의 실체는 사실 텅 비어 있지만,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스스로의 기만에 속으며 살고 있는 부조리한 인간조건에 대한 통찰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 연극의 주제와 대사는 인생의 무의미성에 대한 통찰을 가벼운 유머와 지적인 대사와 의미심장한 성격창조를 통해 보여 주고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편역의 문제를 거론해야 하겠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대중적 취향을 고려한 '창조적인 반역'으로 재미있고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공연이었지만, 과연 작품의 본질적 의미가 잘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관객의 수준이나 대중적 취향을 어떤 식으로든 단정짓고 만드는 경우, 창조적 작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술가가 대중의 취향과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 ? 체홉의 말대로, '고골리를 대중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아니라, 대중을 고골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예술가의 창조작업의 명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멋쟁이 신사〉 번안은 통속화인가 ?

번역작품을 번안하여 무대에 올리는 경우엔 더욱 심각한 통속화의 경향과 원작의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를 심심지 않게 볼 수 있다. 원래 번안은 번역작품의 이질적인 시공과 등장인물을 토착화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삶의 조건이란 보편성을 전제로 우리의 문화적 정서와 사회적 맥락이라는 용광로로 녹여내어 보다 관객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제시하고 동일시 심리효과를 얻기 위해 행해질 것이다.

근래에 공연된 〈어느 아버지의 죽음〉은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인 현실과 인물상으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Mr. 매킨도·씨 !〉는 다리오 포 원작을 거의 해체하여 새롭게 공동 구성한 번안작으로, 실험적 아이디어가 혼란스럽긴 했으나 분명한 메시지와 표현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번안의 유행에 대해 가장 우려해야 할 문제는 번안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분별한 왜곡과 통속성과 질적 타락현상이다.

우리극장의 〈멋쟁이 신사(하젠 클레버 원작, 김정 번안, 문영수 연출)〉는 통속적인 번안의 심각성을 느끼게 한 공연이었다. 원작은 현대적 기업가와 결혼 사기꾼의 결혼기업을 대비적으로 그리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배금주의, 사랑의 환상을 좇는 여자들, 자식들의 반항을 통한 신구세대의 갈등을 경쾌한 희극적 기법으로 그린다.

그러나 이 번안 공연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무대로 삼고 있으면서도 전혀 한국적으로 육화 되지 않은, 현실성과 일관성이 없는 성격설정과 통속적인 내용 전개로 희극적 재미도, 속물적인 현대적 생활방식에 대한 풍자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 연극은 원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극의 전개에 전혀 연관이 없는 패션쇼로 시작된다. 이러한 '쇼'는 단순히 관객에게 볼거리를 주자는 소위 '팬 서비스'로 급조된 듯하다. 그러나 연극적 효과를 갖지 않은 볼거리는 사실 보기에 얼마나 지겨운가. 정 회장(최상설 분)은 '커피타임'을 이용하여 바람을 피우고, 룸살롱의 호스티스를 돈으로 유혹하는 부패한 기업가로 그려져 있다. 그의 아들 역시 이혼한 실업자인데 빈둥거리며 골프연습이나 하고 바람기를 가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동생 아리(정진이 분)는 순진한 처녀로 묘사되지만 사실 그녀의 대사를 보면 백치에 가까울 정도이다. 정 회장이 딸을 당장 시집 보내겠다고 선언하자 그녀는 상업광고문을 본뜬 구혼광고를 내고, 그녀를 찾아온 결혼 사기꾼 이쟁머(최운교 분)와 사랑에 빠져 결국 결혼한다. 쟁머를 사랑한 여자들이 주주총회 같은 걸 열어 그를 사기꾼으로 고발하려 하지만, 막상 쟁머가 그녀들의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감싸주자 감동하여 그냥 떠난다. 정 회장의 아들은 쟁머의 사업을 인수하려 하고 가정부와 결혼한다.

이 연극은 한국적으로 육화 시키지 못한 가족 구성원의 성격창조와 상업광고 문안들을 거침없이 남발하고, 여자를 유혹하는 결혼사기사업의 장면 전환에 유행가나 시들을 부르고 읊음으로써, 또 개그 같은 말장난이나 유행어들, 외설전인 대사들을 남발함으로써 번안으로서의 의미와 연극의 기본적 품격을 갖추지 못했다.

외국작품을 번안하면서 인물과 극적 상황의 한국적 형상화, 한국적 정서와 시대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메시지를 가지지 못한 채, 왜 이 작품을 번안하는가의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정립하지 못한 채 함부로 원작의 본질과 작품성을 왜곡하는 것은 연극 자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

〈불의 가면〉 창작극인가, 각색인가 ?

무대를 위해 쓰여지지 않은 작품을 무대 매체를 위해 새롭게 글쓰기를 한 것을 통념적으로 각색이라 부른다. 그러나 각색은 원전의 구상과 인물, 줄거리를 충실하게 수용한 것에서부터, 거의 환골탈태라 할 정도로 새롭게 다시 쓰기의 형식을 포괄하고 있어서, 각색은 거의 창작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각색과 창작의 차이는 무엇인가.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완전한 독창성의 작품은 없는 셈이다. 아무리 새로운 작품도 암암리에 전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련성이나 영향관계가 있으며, 혹은 그 시대의 특징적인 예술적 취향이나 이데올로기가 스며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대 작가의 원전에서 대강의 줄거리와 인물구도, 극적 상황을 가져왔다면 그 작품이 아무리 다른 표현형식과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순수한 창작이라고 하긴 어려운 일이다. 물론 서구에서는 희랍극이나 셰익스피어 극을 토대로 새롭게 쓰기가 흔히 있는 일이고 순수한 창작으로 인정 받고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원전에 대한 '창조적인 배반'이 이루어져있다. 새로운 인물성격의 창조라든지, 소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시각과 문맥으로 재조명하기, 혹은 패러디 기법이 들어 있을 때 창작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극단 세실의 〈불의 가면-권력의 형식(이윤택 작·채윤일 연출)〉은 여러 논쟁거리를 안고 있는 가운데 흥행에는 획기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극에 대한 논쟁거리는 극의 예술성과는 무관한 작품 외적인 것으로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작품이 박상륭의 소설 「열명길」의 각색인가, 아니면 이윤택의 창작극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 연극이 대담 무쌍하게 보여 주고 있는 '완전나체' 신이 야기하는 소위 '예술적 필요에서의 벗기기인가, 아니면 상업적 계산'인가 하는 것이다.

이 연극은 어느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늙은 왕을 죽이고 대신 왕이 된 젊은 왕의 독재 철학과 광기, 근친상간, 지배논리로서의 인신공희와 제의, 마약과 섹스, 매독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극적 상황이나 인물설정, 줄거리 구도는 거의 「열명길」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형기의 시와 구전동요 「구지가」를 삽입하고 있다. 원전이나 이 연극은 신화적 상상력을 좇아가며 원초적 상황에서의 인간의 광기와 지배욕, 그 앞에 무력한 지식의 힘을 대비적으로 그린다.

이윤택이 이 소재에서 구축한 '권력의 형식'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이미지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는 '불과 얼음의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활용하였다고 작가가 밝힌 바와는 달리, 불은 배화교라는 샤먼적 제의로만 사용되었고, 얼음 이미지는 이성 혹은 지식에 대한 관념적 대사로만 나타났지 이미지로 시각화·상징화되어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극의 '권력'에 대한 메시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권력은 뺏는 것이다. 그리고 힘의 논리로 즉각적으로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②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강력한 상징조작이 필요하다. 폭력성을 성스러운 이데올로기로, 또 대중의 최면효과를 위해선 종교가 필요하다. ③ 권력이 있는 곳엔 저항이 따른다. 그러나 권력은 전략을 세워 저항세력들을 회유하거나 이용한다. 특히 지식을 이용한다. ④ 독재자는 나름의 왜곡된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⑤ 권력의 무너짐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권력의 형식이나 논리는 작가의 순수 창작이 아니다. 소재 원천인 박상륭의 소설에도 그것이 그 밑그림을 이루고 있다. 이 연극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는 신화적 상상력 역시 원작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 연극은 '금기 위반'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아버지 살해, 근친상간, 마약, 인신공희, 최음제, 무대에서의 성행위, 완전히 벗은 연기……. 이 연극에서 보여주고 있는 금기 위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 바타이유식의 인간 내부에 있는 폭력을 잠들게 하기 위한 위반인가, 아니면 성에 대한 억압을 풀어 그 욕망을 비틀린 형태로 보여주기 위한 위반, 특히 '선세이셔널리즘'을 위한 위반인가.

북소리와 함께 제의적 분위기 속에서, 한 사회를 지탱해주는 이성의 억압이 사라진 야만스런 광기와 성의 '저승길(열명길)'이 펼쳐진다. 왕(김학철 분)은 육지로 달아나려던 부부를 잡아 기우제 명목으로 불의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제물을 바칠 때 왕은 그들의 옷을 발가벗긴다.(제물은 꼭 알몸이어야 하는가 ? 여옥도 극의 마지막에 불의 가마에 떨어질 때 스스로 옷을 벗었지만, 왕은 벗지 않았다. 이 사실은 신화적 상징으로, 즉 예술적 필요에 의해 벗는 연기가 일관적으로 필요함을 입증하지 못한 사례가 아닌가) 왕은 새로운 경제부양책으로, 국민들에게 아름다운 환상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아편을 판매할 계획을 세운다. 시의(남명렬 분)는 부인 여옥(이미정 분)과 왕의 관계를 이용, 스스로 매독에 걸림으로써 왕에게 매독을 전염시킨다. 왕은 자신의 사악한 독재가 사실은 '개판 오분 전인' 세상을 불 싸지르고 싶었던 심정에서 온 것이라 하며, 그래야 새로운 역사가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이러한 독재자의 논리는 마치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도 되는 양 예언자적 비전을 담고 있다. 여옥은 시의가 매독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공중에 뽑아 버리고 불 가마에 몸을 던진다. 사악한 권력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모가 강보에 싸인 어린아일 안고 들어와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독재의 대물림이라는 어두운 암시가,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지겹도록 극장을 메운 아기의 그악스런 울음소리로 울려 퍼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야만스런 원초적 사회의 틀을 설정하여 권력의 속성과 형식을 극히 단순화시켜 보편적인 형태로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려는 시도는 이 연극이 시종 강하게 가지고 있는 샤만적 분위기와 성적 메타포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연극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와 연극적 효과는 이원적 형태로 유리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독재의 억압에 저항할 민중의 결집된 힘을 갖지 못한 사회 속에서의 무력한 지식의 역할과 역시 타락한 방법으로만 독재자를 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지식의 역할에 대한 관념적 추구가 한 줄기이고, 나머지 한 줄기는 칼리귤라처럼 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사회의 금기를 위반하여 무한대의 권력의 쾌락을 누리려는 비틀린 욕망의 추구로 형상화되는, 샤먼적 분위기로 위장된 성적 행위들이 주는 자극적 효과이다.

따라서 권력과 지식의 갈등이라는 '작의'는 그 자체가 명료한 갈등구조를 이루는 게 아니라 극 전체의 야만스런 어둠, 곧 성과 광기의 분출이 지배적으로 강조된 자극적 연극문법과는 유리되어 혼돈스럽게 나타난다. 이 극의 혼돈스러울 정도의 상상적 이미지 속에 실제 경험의 진정한 핵심이 들어 있는가 ? 무엇보다도 이 극은 극단적인 사회의 극단적인 독재자의 원형을 극단적인 금기 깨뜨리기의 형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권력의 형식을 보편적인 심상으로 창조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처음 얘기한 대로 작가가 박상륭의 원초적인 이미지에 너무 매달렸기 때문이 아닐까 ? 각색 즉 창작의 새로 쓰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목소리와 이질적인 타자의 목소리를 무리하게 겹치고, 때로는 원전의 흔적을 무리하게 지우려 했기 때문에 나온 혼돈의 결과가 아닐까. 여전히 각색과 창작의 차이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소재의 원천을 밝히고 새롭게 쓰기,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창작이 되는 것일까 ? 같은 소재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목소리와 비전으로, 소재를 전혀 다른 눈과 목소리로 '낯설게' 보여줄 때 비로소 원전의 탯줄, 그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

성공적인 공연작품은 전범이 되어 모방, 에피고넨의 순환을 끝없이 만들어낸다. 그것이 이 시대의 한 특징적 징후를 이루고 있는 '문화적 유행'의 성격이다. 그것은 '불의 신화'와 같은 성질 때문에 전범과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그 흔적들을 지워내며, 심지어는 비판까지 지워버린다.

그러나 반성의 힘을 가진 예술은 아름답다. 반성에서 모방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진정한 독창성이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