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점

우리시대 재인의 계보학 ①




박정진 / 세계일보사 문화부장·문화인류학

조사목적과 방법

필자는 오늘의 '예술'을 인간 문화를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학술용어로, 나아가서 인류학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몇 해 전 「예술 인류학」이란 인류학 저술을 낸 적이 있다. 여기서 필자는 예술 인류학은 무교 인류학이라고 선언 한 바 있다.

'예술 인류학=무교 일류학'이란 등식의 성립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술 인류학은 연구대상에 대한 의미(anthropology of art)라기보다는 연구 접근방법에 초점(artistic anthropology)이 맞추어진 작명이었지만 굳이 연구대상을 거론할 경우 차라리 무교 인류학(shamanistic anthropology)이 적합하다는 뜻이다.

둘째, '예술'이 문화의 포괄적 의미를 갖는 경우 무교(shamanism)에서 그 원형을 찾기 쉽다는 점이다. 특히 무교의 굿(ritual)의 구조가 풀이(logomenon)라는 상부구조와 놀이(dromenon)라는 하부구조로 구성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 문화의 큰 특징인 언어(노래)와 행위(극)를 포괄하면서 문화의 원형적 의미와 함께 문화의 통합적 의미를 동시에 갖기 때문이다

그림 1: 굿의 구조



문화를 인류학자들은 흔히 문화복합(culture complex)이라 부른다. 또는 문화체계(culture system)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문화가 복합적 총체(Complex whole)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인류문화의 다양화·복합화는 오히려 문화의 총체적 연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특히 문화의 상징(symbol)과 적응(adaptation) 사이에 내재하는 메커니즘(mechanism)을 밝히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인류문화의 총체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또 그 속에 내재한 원리를 찾아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다른 문화(other culture)를 비교 해석할 어떤 선명한 방법이 없을까.

필자는 전통적인 이기(理氣) 철학을 통해 학문·예술·종교의 상관관계를 밝히면서 '예술'을 징검다리로 해서 예술 인류학을 주장했다(박정진,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 미래문화사. 1992). 무교야 말로 그것의 구조 즉 '주문+몸짓+공수'로 인해 문화의 총체성과 내재적 원리에 접근케 하는 한편 인류문화의 분화 또는 문화권적 특징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인류문화는 크게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로 나뉜다. 유목문화는 후에 산업문화를 낳고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문화적 원형으로서 원리를 제공한다. 유목문화는 그 무적(武的)특징으로 농경문화를 공격하고 식민지 경영이라는 오늘의 제국주의 질서를 확립한다. 이것은 바로 '전쟁의 문화'라는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유목문화 지역은 기본적으로 식량(빵)이 부족하여 언제나 식량의 분배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외부와의 전쟁으로 식량(경제)과 민주(정치)를 도모한다.

이에 대해 농경문화도 만만치 않게 저항하고 있다. 그 문적(文的) 특징으로 인해 '평화의 문화'를 신화로 한다. 농경문화는 식량의 자급으로 제국주의 경영 전략보다는 덕치(德治)를 지향한다.

농경문화는 자연과의 순응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려고 노력하고 천(天)과 지(地)의 조화를 달성하려고 한다. 오늘날 서구 선진제국의 민주주의와 풍요는 바로 후진국의 희생 위에 건설된 것이며 사실 그들의 정책의 뒤엔 언제나 유목민족의 전쟁신화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이 글은 이러한 유목·기마 문화, 농경문화의 거대한 맥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만나고 융합되고 있는가를 인류문화의 원형인 무(巫)의 분석을 통해 파악함으로써 예술의 원형·종교의 원형·과학의 원형을 밝히는 것을 첫째 목표로 한다.

둘째 세습 당골에서 판소리의 발생을 학계에서는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 유명 소리꾼과 재인들은 과거 자기 신분을 밝히기를 꺼리고 심지어 출신을 은폐하려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과거 판소리 명창 가운데 양반이나 아전 계급이 참여한 사실이 있고 현재 재인들이 전문예능인, 교수 또는 인간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는 분위기와 맞물려 묘하게도 재인들의 계보와 역사성을 해명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무와 세습무, 재인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척되어 왔다. 그러나 거시적인 문화의 틀을 기초로 접근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고 사려된다.

따라서 무의 문화적 특성을 기초로 유목·농경문화를 바라보는 한편 미시적으로는 전라도 판소리의 구체적 생성동인과 발전과정을 사례조사를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세습 무당에서 파생된 소리꾼·악공·재주꾼을 통칭하여 '재인'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들 민속예능인에겐 광대·재인·소리꾼·재주꾼·창부·잽이·재백정(才白丁) ·명창·명인·명무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탤런트' 개념과 동의어로 재인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재인 1백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계보-혈연 계보와 학연 계보-를 파악하는 한편 그들의 지역적 분포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속예술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세습 당골과 판소리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표1)


현재 판소리꾼은 4세대로 구분되어진다. 각 세대별 재인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세대: 모흥갑(牟興甲), 송흥록(宋興錄), 권삼득(權三得), 신만엽(申萬葉), 황해천(黃海天), 고수관(高壽寬), 김제철(金滓哲), 송광록(宋光祿), 주덕기(朱德基), 염계달(廉季達), 이상 18세기말∼19세 기초.

2세대: 박유전(朴有全), 박만순(朴萬順), 이날치(李捺致), 김세종(金世宗), 송우룡(宋雨龍), 정창업(鄭 業), 정춘풍(鄭春風), 김창록(金昌錄), 장자백(張子伯), 김찬업(金贊業), 이창윤(李昌允).

3세대 이하는 송만갑(宋萬甲), 유성준(劉成俊), 정정열(丁貞烈), 이동배(李東排), 박기홍(朴基洪), 장판개(張判介), 박초월(朴初月), 박녹주(朴錄珠), 배설향(裵雪香), 김녹주(金錄株), 김소희(金素姬), 박봉술(朴奉述), 정권진(鄭權鎭), 김정문(金正文), 박동실(朴東實), 박봉래(朴奉來), 임방울(林芳蔚), 조몽실(曺夢實), 김연수(金演洙), 정광수(鄭珖秀), 김여란(金麗蘭), 이화중선(李花仲仙), 장수향(張秀香), 성우향(成又香), 성창순(成昌順), 박동진(朴東鎭), 조상현(趙相賢), 조통달(趙通達), 강도근(姜道根), 한승호(韓承鎬), 장월중선(張月仲仙).

신영희(申英姬), 남해성(南海星), 한농선(韓弄仙), 박송희(朴松姬), 안채봉(安彩鳳), 김수악(金壽岳), 김계화(金桂花), 김녹주(金綠珠), 오정숙(吳貞淑), 조통달(趙通達), 성창순(成昌順), 이용배(李龍培), 김수연(金秀姸), 전정임(全貞任), 은희진(殷凞璡), 안숙선(安淑善), 정회석(鄭會石), 정순임(鄭順任), 임향림(任香任), 김형기(金亨基), 전인삼(全寅三) 등이 있다.

이들 중 3세대 이하가 조사대상이 됐다.

우리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사대상이었던 9명이 작고했다. 인천의 장보배(張寶拜: 황해도 강신무, 1992년), 강릉의 신석남(申石南: 동해안 세습무 단오굿, 1992년), 한진옥(韓振玉: 승무·검무, 1991년), 김재원(金在元: 남사당, 1992년), 김애정(金愛貞: 동편제, 1992년), 김숙자(金淑子: 경기도 살풀이, 1991년), 박동신(朴東信: 황해도 무악, 1991년), 우옥주(禹玉珠: 황해도 강신무, 1993년), 박귀희(朴貴熙: 가야금 병창, 1993년) 등이 그들이다.

이 조사는 1990년 7월 19일∼1993년 9월까지 진행되었다. 예술인들의 가계(혈통) 세습은 인류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분명 유전(체질)과 교육(학습)이라는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분야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가 특히 민속예능 분야의 본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습무가(世襲巫家)에 대한 연구는 항상 매력적인 주제로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로 이 방면에 다년간의 관심과 정보를 가진 사진작가 정범태 선생(65세, 세계일보 사진부장 대우)을 만나게 되고 우리나라 하층민, 즉 민초들의 한을 이해하는 탁월한 이규원(세계일보 문화부 차장)씨가 같은 신문사의 동료로 근무하게 됐던 것이다.

정범태 선생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주요 정보 제공자(key informant)였으며 이규원씨는 안성맞춤의 조사원(co-researcher)이었다.

이 글은 위 두 사람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정범태 선생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정 선생이 국악과 민속예능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40년대(1942년). 그는 평소에도 굿이나 서커스, 연극 등이 벌어지는 곳이면 구경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으며 하마터면 재인의 길로 들어설 뻔한 적도 있었다. 6·25 후 지리산 공비 토벌 당시(백선엽의 백 사령부, 지리산 전투 사령부) 문관으로 참여, 기록사진을 찍었던 그는 남원·군례·곡성·담양, 함양 ·산청 등 전라·경상도 일대에 머물면서 국악과 판소리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한다.

1952부터 1년간 남원·순창·곡성 지역을 현지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명창 장판개가 살았던 순창군 샛깥티, 곡성군 옥과 면에서 명무 한진옥씨가 살던 곳을 조사했다. 또 곡성군 입면 약천에서 국창 송만갑, 유성준씨가 소리 가르쳤다는 집을 수소문해 찾기도 했다.

특히 50년대에 남원에 체류할 때 여류 국악인과 깊숙한 관계를 맺으면서 소리판, 굿판(어정판), 춤판의 은어까지 이해하게 된다. 정 선생은 당시 다음과 같은 사실도 조사했다.

전남 곡성군 입면(立面) 소재 1백 20호 크기의 마을 약천(藥川)리 약내 당골(명무 집안) 정창석(鄭昌碩: 1960년 생)씨가 7세 때 남원 수지면(남창)의 김광옥 문하 판소리에 입문, 7년간 춘향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흥부가 등 다섯 바탕을 뗀 후 13세 때 결혼(김씨 부인), 14세 때 송만갑 선생을 독선생으로 약천에 모셔 '송만갑제'를 굳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 15세 때에는 '유성준제'를 굳히는 것도 확인했다고 한다. 정씨(동래 정씨)는 장판개와 친척이었다. 그후 장판개를 모셔다 흥부가의 박 타는 대목을 '장판개제'로 배웠다. 송만갑제에서 춘향가·적벽가, 유성준제에서는 수궁가·적벽가 그리고 흥부가는 '송만갑·유성푼제(판)'를 같이 익혔다. 정씨는 당시 학채(學債)로 1년에 쌀 4가마니를 주었고 사계절 옷을 한 벌씩 스승에게 해 올렸다. 김광옥씨, 송만갑씨, 유성준씨 모두에게 그렇게 했다고 한다.

정 선생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한진옥(현 광주 문화재 한애순씨 오빠)씨도 장판개한테 소리와 춤을 배운 것을 조사했다고 한다. 한애순씨는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웠다. 김소희씨도 당시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웠다. 당시 학채는 박석기(朴錫基: 朴倫初의 아버지)씨가 부담했다. 그러나 정 선생이 조사한 정창석씨는 배운 소리를 풀어보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고수 김명환(金明煥: 작고)씨에 따르면 정씨가 살았으면 당대 그만한 명창이 없다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정 선생은 이밖에도 박초월(전남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 박봉술(전남 구례군) 등 많은 인간문화재와 교류하면서 40여 년간 재인의 세계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인간문화재 이동안(李東安)씨는 정 선생에게 춤판에 같이 다니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정 선생은 또 인간문화재의 춤을 담은 사진집 「춤과 그 사람(열화당, 1992)」을 펴내기도 했다.

정 선생은 "처음엔 막연히 우리 것이라는 데에 반해서 접근했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창이나 기악, 춤이 세습무에서 나온 것만이 진짜(진수)라는 느낌을 얻게 됐다. 나름대로 예능의 진위(眞僞)와 피(세습)를 속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판을 보고 '저것이 진짜다'라고 할 경우 그 족보를 캐보면 반드시 세습무가 출신이거나 전통예인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최근 민속예능 국악계는 관(官)의 간섭과 잘못된 문화재 정책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거나 퇴색·변질되는 종목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학자·전문가들도 암체어(armchair) 연구로, 실제와 거리가 먼 연구를 발표하기 일수다. 창작도 아니면서 민속만 변질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경기 무악-올림채, 도들이 장단-이 지갑성(池甲成), 지영희(池瑛熙), 정일동(鄭日東)씨가 작고하면서 사라진 것이 아쉽다.

판소리는 처음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 여성의 수가 더욱 늘어나고 춤도 노래에 비해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경기 무악에서 장고가 없어지고 진도 씻김굿도 젖대가 없어진 것도 문제이다.

민속예능은 악(樂)·가(歌)·무(舞)에 의해 움직이는데 악이 사라지면 가무가 뒤따라 사라지게 마련이다.

판소리는 지금까지 동편제·서편제, 중고제 등의 지역적 분류가 있었으나 그후 새로운 변종(variation)들이 나오고 실제 진동편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판소리의 분류를 지역과 음조에 의해 분류할 것이 아니라 특히 동·서편제의 경우 선후 관계로도 따져볼 필요가 대두되고 있다. 판소리는 분명히 놀이 중심의 '굿'이 소리 중심의 '판'으로 변하면서 생긴 민속예능 장르이다. 또 이것이 추석권과 추석·단오 복합권에 산재한 것을 보면 더욱 놀이가 풀이로 변한 것 같은 예감을 갖는다. 복합권에는 단오권의 산대놀이 대신에 들놀이가 있어 놀이와 풀이가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판소리 동편제가 발생한 곳은 추석권(전라도)과 복합권(경상도)의 경계지역이다.

이와 관련해서 판소리에 대한 조금이라도 진전된 가설이 요구되기도 한다. 적어도 판소리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가장 한국적인 퍼포먼스임이 확실하며 이에 대한 세계문화사적인 조망이 필요하다. 특히 호남지역의 경우 '남종 문인화-판소리'가 갖는 공통점도 지역문화 특징연구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힘 자라는 데까지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번 조사 결과 소위 정악(正樂)·시조·가사·창·궁중무 등 궁중이나 선비음악 등에 속하는 재인은 해금 명인 김천흥(金千興)을 비롯하여, 줄 풍류의 김무규(金戊圭), 종묘 제례악의 이강덕(李康德), 여창 시조의 김덕순(金德順), 내포제 시조의 소동규(蘇東奎), 일무(佾舞)의 박정수(朴貞洙), 남창 가곡의 이동규(李東圭) 등 7명에 불과했다. 이 같은 결과는 조사자의 편견이 아니라 '누가 진정한 재인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한 까닭이다. 역시 한나라의 생동감(생명력) 있는 예술은 민(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것만이 긴 생명력을 갖는 것인가 보다. 1백여 명의 조사자 중 93%(93명)가 민속악 계열인 것은 이를 역으로 증명한다.

또 산대놀이나 야유 중 춤꾼을 발굴한 것은 '의(戱)'에 속하는 놀이는 소리보다는 동작에 중점을 두는 까닭에 독무 형태는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다루었다.

무교(巫敎) 인류학에서 본 인류문화의 원형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무(巫)또는 무교의 인류문화사적 의미를 파악해 보자.

인류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출현은 아프리카의 적도(지금의 탄자니아 부근)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퍼졌지만 적어도 오늘날 문명이라는 것이 성립한 것은 북위 20도∼30도(또는 10도∼40도)선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를 지나 중석기 시대(1만년 전∼5천년 전) 후반부터 수렵(어로)·목축이 서서히 시작되고 신석기 농업혁명이 문명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된다. 인간집단(human population)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하고 생태적인 적응이 일단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인류는 상징을 생각하게 된다.

망망한 대자연에서 신을 떠올리고 의례(ritual)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의 의례는 대상에 대한 상징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사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을 '무'라고 한다. 무가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적 성격으로 발달하기 전에도 크고 작은 인간집단에서 무의 기능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술(呪術)을 행하며 인간집단의 중심적인(정치적 의미) 역할을 했다. 이 무는 부족국가, 국가시대에 접어들면서 왕으로 정치적인 변신을 하지만 왕에게 제관으로서의 기능도 일부분 남는다. 무의 제정일치(祭政一致)적 성격이 분리된 후 종교적인 의미의 무교가 성립된다. 이것은 특히 시베리아 지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소위 추축 시대 (BC 5C∼7C)에 들어 불교·유교·도교 등의 고등 종교로 발달하기까지 무교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된다.

무는 그후에도 왕의 치세에 보조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한편 민중 속에서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무의 종교적 기능은 고등 종교가 출현한 후 주도적인 자리에서 주변적으로 밀려나지만 아직도 그 기능은 계속되고 있다. 요컨대 오늘의 무당은 바로 이무가 가장 축소·왜곡·타락한 형태이다.

그러나 무야말로 인류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는 문화의 살아 있는 화석이며 그것의 이데올로기와 굿(ritual)은 문화의 원시적 구조를 나타낸다. 무교는 '신선교(神仙敎)' 또는 '선도(仙道)'로 불리기도 했다.

종교는 어느 것이든 권선징악(勸善懲惡) 이외에 제액(除厄), 초복(招福), 점복(占卜)을 주 기능으로 하며 오늘날 무당이나 불승들의 이와 유사한 행위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기복(祈福), 안수(按手)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생물로서의 인간이 죽음과 불행과 싸우는 마지막 방법이자 과학이 배제된 인문학의 가장 타락한 형태이다. .

종교의 타락한 형태는 무당만의 것이 아니며 구태여 점복 기능을 들어 무교 전체를 평가절하 할 필요가 없다. 무교의 주술은 일종의 종합예술에 가깝다. 무의 기본적인 개념은 천·지 ·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 하늘(天)과 땅(地)을 연결시키고 영령들과 인간(人) 사이의 원(怨)과 한(恨)을 풀어 주어 결국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꾀하는 역할을 한다.

무의 문화적 내용은 주술(呪術)인데 여기에 형이상학(이데올로기), 형이하학(과학) 그리고 예술적 형태들이 미분화 상태로 혼합되어 있다. 오히려 이 문화내용은 예술적 형태가 표현형이었다고 하는 편이 적합하다. 이데올로기와 기술과 예술의 개념이 혼합된 주술(呪術), 그것은 문화의 총체적 이해의 한 단서를 제공하며 나아가서 모델이 된다.

이러한 주술의 문화적 특징은 현대의 인류문화를 일관성 있게 보게 하는 길을 열어 준다. 다시 말하면 인류문화의 과학(학문)·예술·종교의 상관관계 이들 3자의 순환성을 파악케 해준다(그림 2)

표 2: 풀이와 놀이의 예술적 원형

굿의

구조

문화예술의 특징

시공간

보편적

구 조

구조언어학적

특징

풀이

음악

(청각)

시간적

수평적

(통사적)

순차적

(syntagmatic)

놀이

무용·회화

(시각)

공간적

수직적

(건축적)

범형적

(paradigmatic)


예컨대 주술, 굿의 특징인 풀이와 놀이를 오늘의 예술적 원형으로 확대해 보자(표 2).

위의 표의 검증작업으로 춤 예술을 들어보자. 춤은 음악을 동반하기 때문에 자연히 음악에 대한 비교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춤과 음악은 서로 가역반응의 관계에 있다.

서양 춤의 대표적인 것으로 발레를 보자. 발레는 우선 수직적 비상을 그 특징으로 한다. 또 신체적으로는 하체를 많이 사용한다. 결국 수직과 하체적 특징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하는 정도에 따라 춤의 가치가 평가된다. 여기엔 물론 심한 근육운동이 수반된다.

이러한 춤을 가진 서양은 음악이 음정(화음)이라는 수직적 묶음을 기본으로 한다. 이것은 매우 건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 춤에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다. 문무는 선비를 나타내는 약(榙)이나 적(翟)을 손에 들고, 무무는 검(劍)이나 창(槍), 간(干: 방패)이나 척(戚: 도끼)을 손에 든다. 문(文)은 날개(새)나 책으로 상징되고 무(武)는 무기로 상징된다. 무무는 단순히 '무(武)'라고도 한다. 날개 춤과 무기 춤은 부지불식간에 습합된다(宮尾慈良, 沈雨晟 옮김, 「아시아 무용의 인류학」, pp. 180∼181. 동문선, 1991).

서양무용은 양다리와 양팔을 신축하는 형식을 많이 갖고 있다. 한편 동양(아시아)의 무용은 팔다리의 굴절과 신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수렵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적 표현양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宮尾慈良, 沈雨晟 옮김, 「아시아 무용의 인류학」, p. 203, 동문선, 1991).

서양의 발레는 전체적으로 공간의 활용과 함께 시각에 호소하는 경향이 농후하며 클라이맥스는 범형적(paradigmatic)으로 나타난다. 이때의 범형적이라는 말은 춤의 흐름 속에서 시각적으로 건축적인 이미지(새의 이미지)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동양 춤 가운데 한국 춤은 수평적 흔들림을 위주로 한다. 또 신체적으로는 상체 예컨대 어깨나 팔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 춤의 수평과 상체적 특징은 중력보다는 마음의 표현을 추구하며 흥에 겨운 정도에 따라 춤의 가치가 평가된다.

이러한 춤은 한국 음악이 장단(리듬)이라는 수평적 단위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결국 통사적(統辭的)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춤은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중시하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는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흥(興)의 고저에 좌우되는 율동적 이미지(나비의 이미지)를 보인다.

서양의 가무는 그 건축성 탓에 그 시각적 구조를 놓치면 실패하기 때문에 고된 신체적 훈련이 성패의 판가름이 되기 쉽고 동양의 가무는 연회자가 흥에 겹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다.

판소리와 오페라도 대조적이다. 판소리가 시간적·선(線)적이라면 오페라는 공간적 입체적이다.

서양화는 공간의 원근이나 화면의 건축성(덧칠하는 것)을 통해 그림의 깊이를 더하고 동양화는 선(線)의 흐름을 중시한다.

서양화는 표현의 태도에서 리얼리즘(realism)을 바탕으로 하여 입체성(오브제 작업도 포함)을 추구하며 동양화는 추상성(寫意性)을 바탕으로 하여 관념주의(idealism)를 추구하는 경향

이 있다.

이러한 도식적 분류는 동서양의 문화예술의 전체를 말하기보다 특징적인 것을 잡아내는 데 불과하다. 이것은 문화의 표현형일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은 대개 상반되는 내용의 이면형에 의해 상호 보완되는 게 상례이다. 예컨대 시간과 선의 예술인 판소리가 끝내 격렬한 입체적 다이너미즘을 획득할 때 성공한 것이라면 공간과 입체의 예술인 서양화가 고도의 추상주의를 통해 정상을 도달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추상과 구체, 평면과 입체의 융합이며 순환을 말해 준다.

결국 인간의 언어(용어)는 수단(도구)에 불과하며, 그것의 권력기간이 지나면 힘을 잃는 상징의 세트(Set)에 불과한 셈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기한 '풀이/놀이, 시간/공간' 등은 인류 문화사로 볼 때 남방 문화적 성격과 북방 문화적 성격과도 일치함으로써 우리에게 문화를 구조적인 맥락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는 유효성을 갖는다.

오늘의 동서양 문화는 무교(巫敎) 문화의 복합적 성격이 두 갈래로 이동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북방·유목·서양을 연결하는 '무(武)의 원형'과 남방 농업·동양을 연결하는 '문(文)의 원형'을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무(巫)의 놀이와 풀이에 해당한다 (표3) .

표 3: 무교와 동서양 문화의 원형

굿

歌舞

문화권

남· 북방문화

文武

공간성

매체

풀이

노래

동양

남방

평면성

인쇄매체

놀이

서양

북방

武(物)

입체성

영상매체


노래가 신체보다는 마음을 위주로 하고 춤이 마음보다 신체를 위주로 하는 일반성과도 맞아떨어진다. 노래는 풀이의 의미, 춤은 놀이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의 굿은 풀이와 놀이로 구성되었듯이 수평성과 수직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수직성은 '북방-기마-무(武)'의 특성이고 수평성은 '남방-농업-문(文)'의 특성으로 결국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혼합된 탓이다.

원래 시베리아 무교(巫敎)는 북방적 특성이 강했으나 점차 남방화 되었으며 이것은 강신무 지역인 한반도의 북쪽과 세습무 지역인 한반도 남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남방과 북방문화의 특성은 북방족과 남방 한족이 종적(縱的)으로 교체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인다.

오늘날 북한의 춤과 음악이 전반적으로 북방적 전통을 보이고 남한의 그것이 남방적 전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북화의 채색과 남종 문인화의 수묵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습무 집안 출신의 재인들이 전반적으로 남방적 특성을 보이면서 춤보다는 노래(사설)를 중심으로 굿을 풀어 가며 그 가무의 특징이 평면성과 문(文)의 특성으로 요약되는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거대한 인류문화의 두 흐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연희(演戱)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노릇'이나 '짓'에서 찾을 수 있고 여기서 '놀이'나 '노래'가 연유되었다고 보여진다. 굿은 '굿것(귀신)'에서 유래됐다. 판(舞臺)의 소리(歌), 판소리는 '아니리'라는 사설부분과 창(唱)의 완급과 발림, 고수(鼓手)의 추임새에 따라 진행되는 독연 형태의 연희이다.

동양에서 희곡(戱曲)이라는 말 자체가 '잡희(雜戱)의 가곡(歌曲)'의 축약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극의 3요소, 과(科: 동작)·백(白: 說話(설화))·곡(曲: 歌唱(가창)) 중 곡(曲)을 제일로 보며 곡(曲)이 극적 내용을 대표한다. 이것은 역시 '풀이'의 전통이다. 이에 비해서 서양의 '드라마(drama)'라는 말이 '행위(acting)'의 뜻으로 동작에 역점을 두는 것은 '놀이'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동양연극의 시어트리컬리즘(theatricalism)을 나타낸다(이두현, '한국연극사', 「한국문화사 대계·4」, pp. 959∼960. 1965). 이것은 무교(巫敎) 문화의 굿이 남방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열거된 문화예술의 유형을 보면 북방·유목문화의 '기마(騎馬) 이미지'와 남방· 농업문화의 '농사(農事)이미지'가 문화·예술의 특징과 '놀이(몸짓·춤)'과 '풀이(사설·노래)'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북방·유목문화의 공간적 특징은 3차원 속에서 1차원적 표현을 하고 남방·농업문화의 시간적 특성은 1차원 속에서 3차원적 표현을 하고 있다. 전자의 1차원적 표현은 3차원을 1차원의 연장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의 3차원적 표현은 1차원 속에 3차원의 운동을 내포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적분적이고 후자는 미분적이다. 전자가 '자연과학·변증법(3단 논법)'으로 대변된다면 후자는 '음양오행학·태극논법(2원적 변증법)'으로 대변된다.

문화 속에서 흔히 과학(학문), 예술, 종교가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문화의 일관성은 비단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문화의 과학적 원형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무교(巫敎) 문화는 시공간을 일원적으로 보면서 시간적 풀이와 공간적 놀이를 통합하는 형태(미분화성)를 보였다. 이 원형에서 오늘의 서로 다른 과학체계, 즉 음양오행학과 자연과학의 성격을 동시에 발견 할 수 있다(표 4) .

표 4: 과학적 원형에 대입한 굿의 구조

굿의 구조

시공간

과학모델

과학원리

운동법칙

이론

학문적특징

풀이

시간적

음향오행학

음양

(태극)

교체

(순환)

상대론

생물학

놀이

공간적

자연과학

변증법

(삼단논법)

진화

(직선)

절대론

물리학


무교(巫敎) 문화의 특징인 '풀이/놀이'를 과학적 원형으로 확대해 보자. 위의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북방·유목문화는 삶에 있어서 공간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공간의 이동생활은 세계를 운동체로 보게 하고 이는 자연과학→절대론→직선→물리학으로 발전한다.

공간 위주의 문화는 목표와 목표에 도달하는 직선적 방법,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신념(신앙)과 원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공간의 연장(두께·부피)을 통해 자연히 물리학적인 우주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공간 위주의 문화는 또한 문화의 진화를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도 '기마의 이미지'는 여전히 나타나는데 말을 달리는 수평적 공간은 하늘을 나르는 수직적 공간으로 확대되고 말하자면 오늘의 뉴턴적 천체공간을 예약하게 된다.

절대 공간은 절대적 입자(원자)를 바탕으로 한다. 오늘의 서구과학이 이룩한 물리·화학적 세계구성은 바로 그 증명들이다.

이에 비해 남방·농업문화는 농사의 계절 주기로 시간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전제한다. 부양인구의 증가와 생태학적 적소(適所)의 확대와 정주(定住)의 생활은 한 지점에서 세계를 변화체로 보게 한다.

이는 음양오행학·상대론·순환·생물학으로 발전한다. 시간 위주의 문화는 목표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자연의 변화에 적응토록 하는 한편 공간 자체도 생명의 형태로 보게 한다. 음양(陰陽)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몸과 우주 전체에 해당되며 몸과 우주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우주는 공간의 연장이 아니라 몸의 확대판이며 몸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여기는 것이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서로 교체·순환하며 상대적인 세계를 이룬다. 이것은 바로 생물학적 세계이다. 여기에선 우주는 하나의 절대법칙보다는 선택과 조합을 통해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

과학(학문)의 의미는 고대와 현대가 매우 다르다. 옛 학문이 주로 인문학의 경전(經典)을 의미했다면 오늘의 과학은 주로 자연과학을 말한다. 경전은 오늘날 바로 종교로 취급되며 과학은 오히려 반(反)경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이 과거의 큰 가르침이라면 과학은 미래에 발견될 법칙을 추구한다.

생물학의 과학은 상대적 세계의 균형(balance)에 관심이 많으며 물리학의 과학은 일반이론(general theory)에 관심이 많다. 경전·생물학의 과학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며 오늘의 자연과학·물리학은 미래의 이론만 살아 남는다. 경전·생물학의 과학의 핵심내용은 생명현상(becoming의 철학) 또는 기(氣)-에너지의 균형(balance of energy)-이며, 자연과학·물리학은 운동현상(being의 철학) 또는 이(理)-절대적인 법칙(absolutivism)이다.

이(理)의 각 단계는 닫힌 상태의 기(氣)의 운동법칙이다. 반대로 기(氣)는 열린 상태의 각 단계의 생명현상이다.

경전과 과학은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와 과학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 유교, 기독교, 이에 앞선 무교 조차도 경전의 철학적 원리를 파헤쳐 보면 생명 즉 생사(生死)의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이었으며 생(生)으로써 사(死)를 이해하고 사(死)로써 생(生)을 다스리며 균형 잡기를 한 내용들이었다.

오늘날의 과학은 물론 생명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 대상의 구조(크게는 우주의 구조)의 해명에 관심이 많으며 그 구조를 간명하게 설명할 이론을 찾는 게 그 목적이다. 전자 즉 경전(經典)은 주체적 과학의 소산이며, 후자 즉 자연과학은 객체적 과학의 소산이다.

경전과 자연과학이, 종교와 과학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주체·객관의 과학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주관·객체의 과학이 배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신주술(神呪術)의 특성이다.

인류문화가 외형적(구조적)으로는 주술의 모형으로 축약될 수 있지만 오늘날 주술이 갖던 문화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주술(神呪術)'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그것의 세련미가 문제일 뿐 문화의 높낮이는 없다는 원초적인 명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주술(神呪術)은 '과학×예술'이다(신주술=과학×예술).

종교와 과학이 순환적인 관계에 있고 예술이 종교와 과학의 가교 역할을 한다면 결국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과 같다(천=종교, 지=과학, 인=예술).

인류문화의 종교와 과학은 결국 인간의 활동무대(조건)인 자연을 생명(氣)으로 보느냐, 물질로 보느냐의 문제일 뿐으로 결국 인간에게는 자연의 모방(모방성)이든, 영감의 표출(영감론)이든 예술적인 이미지만 남는다. 이것을 보다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이 유희론(일종의 performance)일 것이다. 유희는 종교와 자연과학, 기(氣)와 이(理)의 중용인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용어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을 조정하는 문화적 존재이다. 이것 자체가 이(理)와 기(氣)의 상충이며 따라서 자연과 문화의 조화는 이(理)와 기(氣)의 조화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신주술은 자연과 문화의 조화가 된다(신주술=자연×문화).

무교의 문화적 성격을 문화구조(체계)론에 의해 '상부구조+하부구조'로 보면 '무교+기(氣)적 세계관'이다. 이것을 흔히 무교(shamanism)라고 불러 왔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이(理)적 세계관'='기독교+물리적 세계'와 대응된다.

'무교+기(氣)적 세계관'은 다시 '무교+물활론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문화=무교=무교+기적 세계관=무교+물활론적 세계=기독교+이(理)적 세계=기독교+물리적 세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문화는 그 능력을 상실할 때, 즉 퇴보할 때 항상 하부구조가 약화되고 상부구조가 관념론으로 흘러 현실성(reality)을 도외시한다.

무교도 마찬가지로 하부구조인 기(氣)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단지 그 이데올로기만 남아 그 이데올로기의 틀이 점복(占卜)에 이용되고 있다. 오늘의 무당은 바로 문화의 현실성(reality)을 상실하고 점복 기능과 그 예술적 형태만 남은 원시 고대 인류문화의 잔해라 할 수 있다.

무교가 주도적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상실한 뒤에도 그 예술적 형태인 굿이 의미를 갖는 까닭은 이데올로기(理)와 실제(氣)가 만나 이루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중간적 형태인 까닭이다. 예술의 형이중학적(形而中學的)-이것은 형(形)자체의 중간적 성격을 말한다-성격은 언제나 인류문화의 중간적 형태 즉 이(理)와 기(氣)가 만나는 역동성을 회복하여 주는 힘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나 그 실제성 때문에 추앙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써 생명력을 갖는 상징적 문화형태이다.

오늘의 무당, 특히 세습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예술성 때문이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교+물활론' 체계에 이어 '유교+음양오행학(한의학)' 체계가 동양문화권을 주도하고 근대 서양문화권의 '기독교+자연과학(물리학)' 체계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선도(도교)+양생학', '불교+요가학'도 하나의 문화체계(culture system)로 인정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상의 4가지 문화체계 가운데 유교, 불교, 선도(도교), 무교는 기(氣)적 세계관을 전제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물(物)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기독교가 절대적 신관과 자연관을 바탕으로 문화의 상·하부 구조를 합리화한 때문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신관이 어떻게 합리적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분명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에 의해 합리적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기독교가 문화의 상·하부 구조에서 이(理)를 추구했다면, 불교는 하부구조에서, 유교는 상 하부구조에서 이(理)를, 선도(도교)·무교는 상·하부구조에서 기(氣)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① 무교(선도·도교)=氣/氣 ② 유교=理/氣 ③ 불교=氣/理 ④ 기독교=理/理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유교의 이는 관념의 절대주의이고, 불교의 이(理)는 자연의 상대주의이고, 기독교의 이(理)는 관념의 절대주의(상부구조)이고 자연의 절대주의(하부구조)였다. 한편 기(氣)는 상대주의 또는 해체주의를 나타낸다. 위의 네 유형을 합리성의 순서로 보면 기독교·유교· 불교·무교의 순이다.

그러나 비합리성의 순으로 보면 그 반대이다. 근대(modern)가 지나고 후기 근대는 상대주의(relativism)나 관계주의(relationism) 또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를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무교는 가장 해체주의에 가깝다. 이것은 매우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현상과도 통한다.

무교의 상·하부구조가 기(氣)로 구성된 것은 해체주의가 결국 기(氣)를 추구하는 것임을 말한다. 흔히 기(氣)는 상대주의 즉 음양(陰陽)으로 구성되는데 기(氣)의 합리적 표현인 셈이다.

결국 음양은 이(理)와 기(氣)의 중간적 존재로 결정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표류하는 대립적인 의미를 생산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수단이며 존재양태이다.

유교와 불교는 음양론과 상대주의로 이(理)를 달성했다. 그러나 무교는 그것마저 부정하는 기(氣)를 핵심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 경학(經學)과 자연 과학(科學)은 한편에서는 차별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통일적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초의식(superego)과 무의식(libido)의 일치에 비유할 수 있다. 자연은 때때로 초자연성을 갖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화의 이중성은 상호보완적이다. 기독교가 성령(일종의 氣)을 존중한다던가 무교가 기독교의 원형을 공유하는 것도 주의할 만하다.

무교에서 기독교까지의 과정은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무교의 신(神)이 생성 소멸을 거듭하는 것은 오히려 신(神)의 주체성 때문이며 기독교의 절대신은 신(神)의 객체성 때문이다. 신(神)은 인간의 주체에서 객체로의 과정이며 이것은 문화구조에서 인간 경학(經學)과 자연 과학(科學)과 일치한다.

경학은 인간의 생명(生命)을 위주로 한 과학이고 자연과학은 물질의 운동(運動)에 대한 과학이다.

이(理)와 기(氣)는 궁극적으로, 전자는 우주의 원리(原理)를 말하고 후자는 우주의 실재 (reality)를 뜻해 결국은 하나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理)와 기(氣)는 '이(理)=기(氣)'라는 등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학(인문학)은 교(敎) 중심의 것이고 과학의 학(자연과학)은 학(學) 중심의 것이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가 있다.

경전의 과학은 자연을 생명체로 즉 주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따라서 신(神)의 성격도 합리성(정신의 극대치)과 야수성(진화의 과거)을 동시에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응한다.

흔히 범신의 신들은 사람과 동물의 이중(二重)의 모습으로 신화 속에 나타난다. 이것도 의식과 무의식의 합작품(미분화)이다.

확실히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존재로 역치성(liminoid)을 갖는데 언제나 진보와 퇴보의 기로에 서 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할 때 합리적으로 외형(형식)을 취하는 것은 모방이고 느낌으로 내용을 취하는 것은 생명(에너지)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은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형식은 내용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형일 따름이고 이는 '이(理)가 기(氣)의 표현'임을 말한다.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이며 기(氣)의 일분수(一分殊)이기 때문이다.

기(氣)의 일분수(一分殊)인 인간의 이(理)는 기(氣)로 돌아가려는 힘과 이(理)를 유지하려는 힘의 균형 잡기를 한다. 이는 기(氣)와 기일분수(氣一分殊) 즉 기(氣)의 부분과 전체의 힘 겨루기이며 이것을 음양(陰陽) 이라고 동양 사람들은 갈파한 바 있다.

음양은 태극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듯이 기(氣)와 태극(太極)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神)은 때로 이(理)의 신(神)이기도 하면서 기(氣)의 신(神)이기도 하다. 이신론(理神論)이 전자이고 범신론(凡神論)이 후자이다. 이(理)와 기(氣)의 초월신은 유신론(唯神論)이다. 이(理)와 기(氣)를 포용하는 것은 유기신론(唯氣神論)이다. 유기신은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적 자연관의 산물이다.

인문학(종교)과 자연과학(과학)의 통일은 이 지기일원론에 의해,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학(學)을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이(理)로 봄으로써 지평이 열린다.

이 같은 분류들은 문화체계(구조)로 보면 그 원형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표 5) .

표 5: 이(理)와 기(氣)의 문화체계

굿

상부구조

정신(마음)

양반체재(덕치)

2박자

하부구조

武(物)

신체(몸)

민중반체재(민주)

3박자


문화의 구조도 인간의 신체구조나 컴퓨터의 구조처럼 상·하부구조로 나눌 수 있다. 문(文)이 상부구조, 무(武)가 하부구조로 나누어지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상부구조, 신체가 하부구조로 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흔히 사회계급(계층)적으로 볼 때 양반이 상부구조, 민중이 하부구조, 정치적으로 볼 때 체제 지향적 정치는 덕치(德治), 반체제지향적 정치가 민주(民主)정치이다.

이 같은 문화·사회적 구조는 서양과 동양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특이한 점은 동양은 체제에서 정치적 비중을 더 두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유교의 덕치(德治)주의의 영향이다. 이것은 또한 문치(文治)주의, 인치(人治)주의, 그리고 역사의 발전보다는 정체(停滯)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와 반대로 서양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민중(民衆)의 힘에 의해 정치적 발전을 달성해 가는데 서양의 양반 계급은 기사도 정신에서 보듯이 무반지향(武班志向)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반체제의 정치적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맥락으로 끊임없이 제도(制度) 개선이 수반된다.

동양은 크게 상부구조, 서양은 하부구조에 문화 사회적 힘의 중심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경우 동서양의 세계사적인 흐름이 묘하게 역전되고 있는데 남북문화의 공존이 신라의 삼국통일 후 문치화(文治化) 되면서 덕치(德治)를 지향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강역의 반(半)통일에 불과했지만 반도사를 중국사와 격리(독립) 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는 남북 횡축의 교체사라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남방(농업) 문화중심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신라의 통일이 남·북방 문화를 교묘히 절충케 했으며 이것이 중국 남방문화의 큰 흐름 속에 한반도를 지킨 의미가 있다.

백제는 중국과 인접해 중국 남방문화에 너무 빠져 들어가 있었고 고구려는 너무 가까이서 북방족의 일원으로 중국(수·당)과 세력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신라는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가장 멀었지만 화랑이라는 종교적 기사(騎士·武士)를 주축으로 북방 유목문화적 전통과 남방 농업문화를 교묘히 절충하며 한반도식 문무(文武)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라 이후 점차 문화의 문치화(文治化) 현상에 빠져들어 고려·조선조에는 그것이 심화됐던 것이다.

한반도의 국내 상황은 통일신라와 그후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줄곧 경상도 지역(북방·남방문화가 교차하는 곳)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농업지역인 한반도의 서쪽(남북 종축을 기준으로)을 반체제 지역으로 성격을 굳힌다. 이 서쪽 지역이 농업지역임에도 사회·문화의 하부 구조적 특성을 보이는 것은 세계 문화의 한반도 지역 교차설(太極設)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서쪽지역에 세습무·판소리·민속악이 왕성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농업-문적(文的) 취향의 반체제-민속예능 문화의 커넥션 뒤에 숨은 암호(暗號)를 파악해 보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주제이다.

지금까지 문화 또는 문명에 대한 공시적(synchronical) 요약과 통사적(dichronical) 흐름을 파악해 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통합될 때 온전한 모습과 이해를 우리에게 준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열거된 이원적 분류들은 결국 일원적으로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인(人)에서 하나(一體)가 되듯이 인간(人)의 문화는 결국 인(人)에서 순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표 6).

표 6: 인(人)에 의한 일원적 순환

일원적

문화

理氣之妙

굿

시공간

이원적

(자연)

의식

무의식

(자연)

(자연)

풀이

놀이

(자연)

시간

공간

(자연)


그러나 일원화의 과제는 또 다른 거대한 인류학적 논제가 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결국 예술 인류학이 무교(巫敎)를 대상으로 할 경우 무교 인류학이 되고 이 같은 무교 인류학의 관점은 인류문명의 원형에 대한 계보학을 넘어 유전학이 된다.

인류문명의 해부학은 이러한 계보학을 지나 유전학에 도달할 때 신화적 원형을 달성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원형에서 다시 인간과 자연, 종교와 과학이 태초에 하나였던 것을 배우고 다시 하나가 될 신주술(神呪術)의 연금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기(氣)가 왜 하나의 이(理)에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새로운 힘의 균형 잡기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이다. 그러나 기(氣)는 무한대이므로 이(理) 또한 무한대일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의 새로운 신화를 무교 인류학을 통해 쓰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이(理)에 있으며 기(氣) 또한 모든 것이다. 아마 예술가들이 이것을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인류학의 접두어로 예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명의 벽을 깨는 인류학, 기(氣)의 커뮤니케이션을 달성하는 열린 사회의 새로운 인류학, 예술 인류학이 된다.

위의 북방·무(武)·놀이, 남방·문(文)·풀이의 문명 구조 이외에도 인간의 신체적 구조에 의거한 문화구조도 이 글의 중요한 패러다임이 된다.

예컨대 신체·무의식·자연(하부구조), 정신·의식 문화(상부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을 다시 문화 자체의 구조, 예컨대 상부 구조적인 것과 하부 구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데올로기(정치)·종교·양반·소프트웨어(프로그램)-상부구조'와, '기술(경제)·과학·민중·하드웨어(기계설비)-하부구조'가 그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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