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했던 발레 무대, 감흥 없는 허전함
문애령 / 무용평론가
니나 아나니아시빌리를 초청 주역으로 한 차이코프스키 발레단의 공연(8월 20일∼24일, 세종문화회관)이 풍성했던 발레 공연의 막을 열었다.
세계적인 발레 스타를 또 한 명 확보했다는 공연리스트를 보지 않더라도 흡족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연은 제몫 찾기에서 한치의 양보가 없었던, 스타의 얼굴 내밀기 선에서 합의한 것으로 마무리됐다.
뒤를 이은 국립발레단 중견단원발표회(8월 26일∼27일, 국립소극장)는 문병남·나형만·박상철의 안무로 꾸며졌다. 이 공연장은 춤추기와 춤 만들기 재능이 동일한 것이 아님을 재확인시킨, 춤의 두 얼굴을 확인시킨 무대였다.
9월 초 백연옥과 한금련의 개인발표회가 국립 소극장에서 연이어 열렸고 종합예술·공동예술인 춤 무대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확실히 드러냈다. 백연옥이 춤의 기량과 완성도 면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한금련은 새로운 소재와 형식의 탐구만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8월∼9월의 발레 무대는 이처럼 춤 공연의 주류로 보일 만큼 왕성했지만 복합적인 완성도 면에서는 불안정했다. 그리고 그 내재된 불안정은 관객의 감흥을 차단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나니아시빌리가 보여준 〈돈키호테〉 3막의 그랑 '파드되'는 그녀가 발레스타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랑 파드되는 말 그대로 주역들의 재주 자랑을 즐기는 한판이다.
이 멍석이 펴지자 그녀의 태도는 돌변한다. 군무진들과의 군무에서와는 달리 스타 특유의 과시욕이 샘솟은 것일까. 한 발끝으로만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에길리브르(equilibre)부문에서는 박수갈채를 요구했고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
또 자신의 역할에 쉽게 빠져드는 그녀 특유의 광기는 사실적이고 거침없는 마임으로 나타났다.
발레리나의 유명세를 입증한 이 3막의 반짝 쇼가 아니었다면 또 캐릭터 댄스에서의 줄리아 마쉬키나가 없었다면 〈돈키호테〉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우선 군무진의 기교가 세계 수준에 못 미치고 그들의 연기력 또한 그랬다. 〈돈키호테〉는 열기와 열정을 강조하는 작품임에 비해 실질적인 반응은 우리의 국립발레단에 못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 이번 공연의 수확은 돈키호테의 모습이 보다 두드러진 버전을 접했다는 장점이 있다. 제목과 춤의 전개가 완전히 분리된 버전 이전의 버전인 셈이다. 보다 무게 있고 서사적인 중세의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페름 차이코프스키 발레가 전통의 보존 창고 역할만큼은 훌륭히 해낸 것이다. 예술세계에서
새로운 것은 항상 시선을 집중시킨다. 간혹 좋은 멋으로, 진보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히 무용 공연에서 그 원형을 손상하지 않고 보존했음은 또 다른 공로가 아닐 수 없다. 볼쇼이처럼 강렬하지도, 키로프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이 발레단은 인상은 순박함이었다.
국립발레단 중견단원 작품발표회는 예술가의 교육과 환경에 대한 재고를 요구했다. 이번 공연은 작품 발표회라기보다는 춤 구성 연습이라는 쪽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작가의 고유한 시각이 없었고, 그 원인은 작가를 만들지 못한 우리의 발레 교육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공간을 무대 위에 곁들여야
다양한 작품을 구경할 기회와 그것의 에센스를 포착하는 센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걸러내는 능력은 예술가가 작품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과정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무용 교육은 상상력과 창의력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할 여지와 다양한 견해를 소개조차 하지 않는 점이다. '이것은 이런 것이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중견 단원들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다.
박상철의 경우, 새로운 발레 창작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움의 모델은 얼마 전 내한한 에이프만이었다. 〈레퀴엠〉의 소재(인간의 삶과 죽음), 무대장치, 전개방식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단지, 강준하의 솔로만이 박상철의 안무력에 점수를 줄 만한 대목이었다.
결론은 박상철이 보다 많은 문화와 문물을 접했다면, 그가 지닌 독창성을 보다 더 활용했더라면, 그리고 그가 좀더 자유로운 생각이 허용되는 문화에서 성장했더라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박상철과 같이 가을 야외춤판에 올려졌던 제임스전의 〈희망〉이나 〈도시의 불빛〉이 작품성 오락성에서 인정받는 데는 제임스전의 경험세계가 크게 작용한다. 유럽·미국·유니버설 발레단의 특수한 문화를 수용한 그의 경험은 그의 능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박상철은 제임스전보다 깊이가 있고 진지하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면 어느 날엔가 관객을 대동하고 날아갈 것 같다.
무용 공연계가 개인 발표회를 벗어나 기획공연 중심으로 흐르는 세태에서 보면 백연옥과 한금련은 우직하게 조차 보인다. 9월 7일∼8일에 하루씩 공연을 가진 이들은 그 하루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했으리라. 두 사람 모두는 춤에 대한 동경과 그 발산이 가장 소중한 발레 수호자처럼 보였다.
눈으로 확인하는 무용 새로운 도약을 기대한다
백연옥의 공연에서 하이라이트는 〈꿈〉이었다. 김영태의 시 「꿈」의 인상이다. 침대와 의자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 시를 여자의 꿈속에서 일어난 사랑노래로 해석함이 최선책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 해석은 쉽게 접하는 발레를 위한 전례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 의자 등받이를 잡고 다리를 교차시키며 등장하는 남자는 그 단순한 움직임에 시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원국은 대학 시절의 무서운 패기를 잃은 대신 그 공백을 감정 어린 독백으로 메우고 있었다.
그는 남성무용가에게 필수적인 놀라운 도약능력과 회전능력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것만을 앞세운다면 춤이 감정을 담아내는 움직임이 될 수 없다. 그 역시 그러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아는 관객으로서 그의 성숙된 모습을 발견했음은 큰 기쁨이었다. 기교와 감정, 끼와 이성의 순간적 변화가 요구되는 춤 예술이야말로 멀리 보이는 별빛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으로 그를 지켜본다.
백연옥의 공연은 우정 출연, 무대장치의 안정감 등 개인공연으로서는 매우 화려한 느낌을 남겼다. 그러나 화려함을 제외한다면, 이원국의 춤을 제외한다면 백연옥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백연옥이 춘 해적 2인무에서의 기량이나 'Buonanotte'에서 시도한 재즈발레가 그 목적에 미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 무용계에는 아직 프로펴셔널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다. 대부분 춤을 가르치는 사람이 공연장에서는 댄서가 된다. 그것이 독특한 우리만의 문화라고 반박한다면 답변할 길이 없다. 단지, 이런 문화 구조 때문에 발레 스타도 없고 발레메스터도 없다는 대답밖에는.
따라서 힘든 공연을 마친 백연옥에세 발레 스타가 아니었다고, 혹 훌륭한 안무자가 아니었다고 지적하는 행위가 타당한가에도 의문은 남는다. 우리 무용인들은 너무 많은 짐에 허덕인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잘못이나 문제가 아니다. 특히나 30대의 대학강사가 받아야할 지적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희귀한 30대 발레 공연자들 중 한사람인 백연옥은 우리의 문화에서는 탁월한 발레리나요 기획가다. 다만 아나니아시빌리나 에이프만에 비교한다면, 그들의 문화 된 작업에 비교한다면, 백연옥의 세대에게 남겨진 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느껴진다.
한금련은 백연옥과는 대조적인 무대를 꾸몄다. 본인이 출연도 했지만 작품구성의 새로운 시도, 즉 안무면에 치중한 의욕을 보였다. 반면, 출연진의 대부분이 첫 무대를 치른 공연답게 어수룩한 면이 강조됐다.
에릭 사티 음악, 김영태 시 「그늘 반 근」은 한금련의 기량을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녀가 꾸민 공연은 '10개의 비가'였다. 〈봄의 제전〉, 〈빈사의 백조〉 등 클래식 모음과 「그늘 반 근」처럼 새로운 안무가 더해졌다. 이처럼 형식, 기존의 공연형태를 탈피한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 낸 신선함이 있었다.
또한 아직까지도 강한 맥으로 전해지는 발레의 귀족주의적 경향과 비현실적인 경향을 '오늘의 이 장소'로 옮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한금련은 이 의지를 의상으로 상징화했는데 예를 들면 〈빈사의 백조〉의 의상에는 천이 붙어 있고 'Korea'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그러나 관객이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총을 맞고 죽어 가는 백조의 모습에 익숙한 관객이 우리의 섬유산업과 한금련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는 문제였다.
춤의 형식, 새로운 암시 가능성의 모색은 춤추기에 급급한 젊은이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한금련 고유의 면모였다. 춤을 춤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려는 정신, 그 정신들이 곧 춤이 예술이 되는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방법론에서 발견되었다. 춤 관객은 우둔하다. 춤 자체가 그 우둔함을 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인정하는 관객의 인식에 접근하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