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의 현장

'화해와 용서' 보여준 뜨거운 무대

-제17회 서울연극제 총평




김윤철 / 세종대 교수·연극평론가

1993년도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의 공연이 지난 10월 10일자로 막을 내렸다. 한국연극계의 최대 잔치인 이 연극제는 올해의 경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연극계의 여론에 따라 희곡심사 위주로 참가작을 선정하던 종전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 실연심사의 폭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그 결과 7편의 참가작 가운데 〈남사당의 하늘〉, 〈백마강 달밤에〉, 〈박사를 찾아서〉, 〈탈속〉 등 네 편이 실연심사를 거쳐 선정되어 〈상화와 상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춤추는 시간여행〉 등 희곡심사를 통과한 작품의 수보다 오히려 한 편이 많았다. 이는 주최측이 딱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서울연극제의 성격이 경연대회로부터 대동잔치로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금년의 서울연극제가 지난 어느 해보다도 평균적인 공연수준이 높았다는 평이 일반적인 평가일진대 이 연극제의 방향전환은 일단 긍정적으로 가늠된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위상에 따라, 그리고 이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일본과 중국에 이니셔티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울연극제의 국제연극제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연극계 일각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마당에, 실연심사를 통한 초청공연의 축제형 식은 앞으로 더욱 확대·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실연심사 제도의 강화에 따라 전반적으로 무대 만들기가 진일보한 고른 수준을 보인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번 연극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주제면에서 발견된다. 문민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유난히 강조되는 용서와 화해의 외침 때문일까. 일곱 편 가운데 〈백마강 달밤에〉, 〈상화와 상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춤추는 시간여행〉 등 네 편이 한국사의 불행한 이정표들, 이를테면 백제의 멸망, 일제의 지배, 6·25, 광주민주화항쟁 등을 직접 소재로 취하거나 극의 배경으로 사용하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용서와 화해의 방법을 연극적으로 모색했던 것이다. 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사회에 거울을 들이대는 연극의 본질적인 사명과 기능을 우리의 연극인들이 충실하게 섬겼다는 반증이 되겠다.

주제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현상은 네 작품 모두 정치·이념적 대립의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중심의 직접적인 호소보다는 연극적 구성을 통한 예술적 소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연극예술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무척 다행스런 접근법이었다.

〈박사를 찾아서〉는 위의 네 작품들과는 달리 조직의 폭력과 개인의 희생이라는 몹시 사회적인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고, 나머지 두 작품, 즉 〈남사당의 하늘〉과 〈탈속〉은 예술가와 종교인의 구도를 그린 극이었는데, 이는 최근 정치·이념극의 퇴조를 타고 우리 연극계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라고 하겠다.

뚜렷한 수작은 없지만 볼거리가 제법 풍성했던 '93 서울연극제, 먼저 용서와 화해의 방법 찾기를 시도했던 작품부터 뒤돌아본다. 참고로 〈남사당의 하늘〉과 〈상화와 상화〉에 대한 평은 필자가 한국일보에 6월 23일자 및 9월 14일자로 기고한 연극평을 다소 보완하여 재 수록한 것임을 밝혀 둔다.

목화의 〈백마강 달밤에〉

근자에 글쓰기와 무대 만들기에서 충청도의 언어와 문화를 민족정서의 중심 기호로 연극화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오태석은, 이 극에서 충청도의 한 마을이 벌이고 있는 대동제의 형식을 빌려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킨다.

극은 대동굿을 주재하는 박수무당 영덕(정진각)과 노무당(정은표)의 양녀 순단(전은영)이 당집 병풍에 그려진 산신(손병호)과 천신(이상희)의 도움을 받아, 아직도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명부를 헤매고 있는 백제 최후의 의자왕과 백제 조신 및 장군을 만나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서로를 화해시키는 이야기다.

명부의 장면에서 순단은 금화라는 전쟁의 신으로, 영덕은 백제 장군의 신으로 의자왕 일행을 만나서 해원과 화해를 중재하므로 얼핏 극의 화해 찾기가 과거에 머무는 듯 싶지만 역으로 금화와 백제 장군은 각각 오늘의 순단과 영덕이기도 하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의 화해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금화는 합리와 민주를 바탕 삼는 오늘의 사관으로 백제 멸망을 자초한 의자왕의 어리석음, 유교적 사상을 퍼뜨려 국민의 정기를 죽게 만든 성충의 대역, 죄 없고 힘없고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계백의 잘못된 용기 등을 질타하는데, 이로써 극이 과거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진정한 만남을 통한 용서와 화해를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의 현재적 시의성는 순단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이국의 명부를 헤매고 있는 원귀들을 모셔다가 당집에 들이고서 정성껏 제사를 들여줌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 번영을 축원하는 대동제를 벌이는 극의 틀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이승과·저승을 유머러스하고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오태석의 풍요한 상상력과, 정진각·정원중·손병호·정은표·이용구·이명호·홍원기 등 오태석 연극 학교의 문법을 깊이 있게 소화해내고 있는 광대패들의 여백이 많은 여유작작한 연기, 단 순하지만 상징과 해학이 풍부했던 정은표의 무대미술, 극장주의적 무대개념을 십분 살린 아이카와마사아키의 조명디자인, 양악으로 우리의 정서를 효과 있게 뒷받쳐준 김영덕의 음악 등이 이 극의 무대 만들기를 빛나게 해주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명부와 마을의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하여 대동제의 기능이 극의 틀 짜기에 한정되었던 점이다. 명부 원귀들의 거울적인 등장인물들이 마을 사람들 안에 구현이 되었다면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반영하면서 극의 목표하는 화해를 연극적으로 보다 실팍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중의 〈상화와 상화〉

제목이 특이한 이 극은 1920년대의 불행한 시대를 배경으로 민족시인 이상화가 현실 도피적 탐미주의자로부터 현실참여를 부르짖는 혁명시인으로, 마침내는 탐미와 현실을 조화시킨 서정적 저항시인으로까지 성숙해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상화(想華)와 상화(尙火)는 모두 이상화가 실제로 사용했던 호다.

극에서 상화(想華, 이찬우)는 낭만적이며 퇴폐적이고 순수예술을 추구했던 젊은 날의 시인을 대표하고, 상화(尙火, 송승환)는 일제치하 민족의 불행을 온 몸으로 맞서 싸우고자 했던 혁명가로서의 시인을 대변한다. 한 예술가의 내면적 균열을 드러내는 작가 최현묵의 분신기법이 독특하다.

민족의 수난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겁한 상화(想華)에게는 상화(尙火)가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주고, 정치적 이념을 내세워 사랑까지도 묻어버리는 상화(尙火)에게는 상화(想졸華)가 인간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호소하게 한다. 작가는 또 두 상화에게 서로를 위한 해설자 역할을 맡게 함으로써 극의 흐름을 유연하게 한다. 사회적 풍경으로서의 시적 함축미가 풍부한 장면구성, 인물들의 성격에 적합한 언어 등이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 주고 있다.

극이 후반부에 이르면 글쓰기에 문제가 드러난다. 상화(想華)를 중심으로 한 전반부와 달리 상화(尙火)가 중심이 되는 후반부는 인물 창조와 사건의 구성이 행동화되지 않고 관념에 머물러 극의 진행이 산만하고 완만해진다. 그 결과 상화와 상화가 함께 사랑했던 유보화(김현정)의 죽음으로 두 자아가 화해하는 마지막 장면에 정서적인 설득력이 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극은 한 분열된 개인의 화해를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를 띤다. 즉 상화(想華)는 순수예술주의를, 그리고 상화(尙火)는 참여예술주의를 각각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대립되는 사회적 가치의 상호 수용을 통한 화해를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극단이 서울연극제의 공식참가작으로 공연하고 있는 이 연극에서 박계배의 연출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는 코러스를 적절히 사용하여 각 장면의 사회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했고, 특히 코러스들로 타블로(정지된 그림)를 구성하여 역사적 상황과 주인공의 내면갈등을 절묘하게 연관시켰다. 무엇보다 두 상화의 복잡한 심리적 관계들을 높이와 깊이, 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한 공간배치로 시각화함으로써 심리를 시각화하는 연출의 기본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회전무대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잦은 장면변화를 무리 없이 수용하면서 역동적인 무대그림을 가능케 한 최상철의 장치디자인, 극장주의적 연출개념을 잘 섬긴 최형오의 다이내믹한 조명디자인, 장면의 정서를 강한 서정으로 끌어올린 강선희의 음악이 인상적이다. 상화(想華)역의 이찬우가 편협한 자기 이미지에서 과감히 벗어나 강하고 진실한 역 창조를 이룩한 것도 이 가능성 많은 배우를 위해서 무척 고무적이다.

그러나 전통연희의 훈련이 부족한 배우들의 어설픈 춤, 뮤지컬 연극에서 코러스, 특히 주연급 배우들이 보인 한심한 가창력, 상화(尙火)로서 혁명가적 냉혈성과 기상을 뿜지 못한 송승환의 유약한 성격창조 등은 무대 만들기의 취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신시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6·25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남과 북의 이념대립과 그로 인한 인간파괴에 초점을 두지만, 김상렬이 쓰고 연출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는 북쪽 출신들끼리의 배반과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물론 작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작품 의 모티프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극을 단순히 정치이념으로 취급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잔해를 상징하는 폐차장을 배경으로 삼아 현대인의 흉악한 물질주의를 고발하고 과거에 저지른 죄는 진실하게 참회하고 고백함으로써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화해의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 작의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극에서 폐차장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 사상 전향한 친구 백민우(김길호)의 동생을 죽창으로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안갑(윤주상)이 죄 깊은 과거를 은폐하고 오로지 부의 축적만을 꾀하는 장소로서 사용되기보다는, 순결한 신세대 준기(권범택)와 소영(나자명)의 아름다운 밀애의 장소로써 더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가 노린 바 물질주의에 대한 통시적 비판이 작품의 중심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극은 '과거로부터 도망치려는' 안갑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과거를 끈질기게 캐묻는' 민우와, '과거를 잊고 현재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두칠(양재성), 그리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될 젊은 연인들 앞에서 자신의 극악했던 죄상을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받는다는 화해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에 절대적인 무게를 두고 있었다.

구조로만 가늠한다면 비극적 가능성마저도 엿볼 수 있을 만한데 작가가 몇 가지 치명적인 악수를 범했기 때문에 연극성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첫째, 신세대들을 부끄러운 역사에 끌어들여 역사에 참여케 한다는 발상은 좋았으나 준기와 소영이 살아있는 등장인물로서 극의 메인 플롯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단순히 작가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존재로 한정되었다. 안갑과 준기의 의사 부자관계가 강화되었더라면 안갑이 자신의 끔찍했던 죄상을 고백하는 자리에 춘기가 있어야 할 당위성이 보다 분명하게 마련되었을 것이다.

둘째, 극의 설명부가 너무 길어서 극 진행이 완만하고 지루했다. 예를 들어 민우가 무슨 이유로 안갑에게 복수하려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민우가 약장사 두칠을 만났을 때 처음 암시되었다가, 두칠이 안갑을 찾아가 몸조심 할 것을 경고할 때 다시 설명되고, 또 민우와 안갑 단둘이 대면할 때 세 번째로 자세히 진술된다. 이처럼 관객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을 등장인물들이 뒤늦게 육화하는 상황이 극중에 빈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연극에 필수적인 긴장감이 좀체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셋째, 작가가 지나친 감상을 보였다. 안갑의 죽창에 찔려 죽었던 민철의 아내 숙경(박승태)이 그 동안 안갑과 재혼하여 동거해 왔다는 설정도 자못 신파적인 데다가, 그녀와 민철의 사이에 있었던 상수라는 갓난 아들이 40년이 지난 뒤 삼촌 민우로부터 어머니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는 설정은 신파의 차원을 넘어 넌센스에 가깝다. 또 상수를 스스로 고아원에 버렸던 숙경이 그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고 쓰러져 죽는다는 설정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그녀를 살려둔 채 안갑이 그녀와 민우 앞에서 민철을 죽였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했더라면 참회의 진실성을 홍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었을성싶다.

김길호·양재성·박승태의 진솔한 역 창조가 돋보인 반면, 윤주상의 연기는 매너리즘을 보였다. 작가가 스스로 연출한 이 극의 진행이 완만했던 것은 글쓰기 탓도 있었겠지만, 무대 만들기의 과정에서 강조와 종속을 적절히 배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강조하려는 자작 연출의 함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춘추의 〈춤추는 시간여행〉

앞의 세 공연과는 다르게 이경식의 〈춤추는 시간여행〉만이 화해의 방법 찾기에 실패하는 과정을 담는다. 극은 13년 전 광주에서 진압군에 의해 가정을 파괴당한 한 연극 연출가(허현호)가 당시 그의 아내를 능욕했다고 믿어지는 남자(임규)를 납치하여 아내(안수빈)와 함께 그 폭력의 장면을 재연하는 이야기다.

얼핏 일방적인 흑백논리가 극을 지배할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임규가 연출가에 의해 납치 당한 열두 번째 남자라는 사실은 그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을 암시하는 한편, 남자가 바뀔 때마다 아내는 그 치욕의 순간을 반복 상연하게 하기 때문에 그 장면을 강요하는 연출가의 가학성이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다.

어째든 피해자인 연출가는 남자로부터 진정한, 그래서 감동적인 참회의 장면을 끌어내어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조건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연출가는 남자를 죽이고 새로운 배우사냥에 나선다. 존 파울즈의 〈콜렉터〉를 연상케 하는 극 구성이다.

작가의 메시지가 연극언어로 전환되지 않아 인물들이 살아있게 창조되지 않은 점, 연극과 무대 만들기에 대한 토론이 너무 잦아 극 진행이 방해받은 것, 똑같은 대사의 계속되는 반복 등은 이경식의 글쓰기가 갖는 문제점들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극의 가장 큰 결함은 마지막 장면의 처리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연출가가 새로 나타난 남자(임규)와 간이매점의 주인(정아미)에 의해서 정신질환자로 규정되는데, 이는 피해자로서의 연출가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극의 순환구조가 증거 하는 바 그 동안 많은 남자들과 아내를 희생시켜온 가해자로서의 연출가의 정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순을 낳는다.

송관우의 미술, 박종찬의 조명은 극의 분위기를 잘 섬겨주었고, 임규·안수빈·정아미 등이 단순한 연기로 주인공을 성실히 보필했지만, 정작 허현호는 연출가의 역이 요구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감한 시의성 있는 문제를 연극인들이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사실은 평가받을 만하다.

미추의 〈남사당의 하늘〉

극단 미추는 1년에 한편 꼴로 공연하는 과작의 단체다. 얼핏 생산성이 낮은 극단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 한편에 쏟는 열정과 정성을 미루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완성도 높은 연극을 추구하는 치열한 장인정신이야말로 이 극단의 최대 자산이다. 날림연극이 적지 않은 우리 연극계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다.

연극을 종교처럼 섬기는 연출가 손진책과, 연극의 사회적 책임을 남달리 강조하는 극작가 윤대성이 〈남사당의 하늘〉로 이 시대의 혼탁한 세기말적 예술윤리에 경종을 울리고 나섰다.

극은 여자로서 남사당패에서 줄을 탔던 바우덕이(김성녀)가 일제 치하 신극의 유행으로 시세 없어진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고 끝내 줄을 타다 낙상하여 죽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비록 구걸하지 않으면 놀이판과 끼니를 얻을 수 없을 만큼 사회적 멸시와 천대가 자심 했음에도, 하늘을 본향으로 삼아 천부의 재주를 지키며 역경을 꿋꿋하게 견뎌낸 안성 먹벵이 남사당패들의 예술 혼이 웅장한 스케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여기에 바우덕이의 몸을 끈질기게 탐내는 양반(윤주일)계급과 그에 기생하면서 하층민의 수탈을 돕는 중산층(송인현)에 대한 사회비판이 가해지고, 바우덕이를 가운데 놓고 그녀가 오라버니로 삼았던 배근과 양반집 도련님(이명수)이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가 흥미를 돋우고, 곰벵이쇠(윤문식)의 걸쭉한 농과 사나운 입심이 유머를 더한다. 특히 장마 때문에 놀이판을 잃어버려 오래 굶주린 이들에게 양반이 두둑한 몸값으로 바우덕이의 몸을 요구해 올 때 '재주는 팔되 몸은 팔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하는 김 노인(김종엽)을 밀어내고 나머지 사당패들이 그녀를 팔아 넘기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비극이 거의 불가능해진 이 포스트모던 한 시대에 〈남사당의 하늘〉은 장엄과 숭고로써 비극을 소생시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다. 바우덕이의 영웅적인 죽음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미추의 남사당패들이 한판 신명나는 풍물로 그녀를 배웅하는 마지막 놀이가 바로 그 증거다. 정과 동, 완과 급을 적절히 구사한 손진택의 선 굵은 연출, 김종엽·김성녀·윤문식 등 미추의 텃광대들의 중후한 연기극 40여 명에 달하는 출연진들의 전문적인 기예, 기능과 미학을 겸비한 윤정섭의 무대 등은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인간 바우덕이를 충분히 살리지 않고 예술가 바우덕이의 모습만을 확대 투사하여 그녀가 부르짖는 예술정신에 믿음이 실리지 못한 것은 이 극의 가장 큰 결함이다. 간간이 남사당패라는 주어진 상황을 이탈하는 언어, 회전무대를 똑같은 방법으로 반복 사용하는 블로킹, 애정 삼각관계의 평면적인 전개로 인한 극적 갈등의 취약성 등은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겠다.

극단 민예의 〈탈속〉

김영무가 쓰고 강영걸이 연출한 〈탈속〉은 인간적인 욕망이 지극히 강했던 무봉이라는 스님의 환속을 통한 탈속을 추리극의 형식에 담은 종교극이다. 극은 3중 구조로 엮어져 있다. 종교신문의 한 부장(최재영)과 박 기자(오민애)가 특종기사를 찾아 채운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재목으로 무봉 스님(최승일)을 주목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극의 틀, 즉 겉의 구조다. 속 구조는 둘로 나눠지는데, 한쪽에선 무봉과 일우 큰스님(유영환)과의 선문답을 통해 도를 깨우치는 과정이 펼쳐지고, 다른 한 편에선 무봉을 사모하는 안수란이라는 여인(이미경)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전개된다.

이 복잡한 3중 구조가 효과적으로 기능 하려면 채운사와 속세를 오가며 무봉 스님을 추적하는 한 부장과 박 기자의 동기가 연극적인 정당성과 설득력을 확보해서 행동의 통일을 이룩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극은 이 겉 구조에서 가장 큰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특히 한 부장이 무봉 스님을 표적 하는 이유가 단순히 신문기자의 기사 찾기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한 부장과 함께 일하는 박 기자는 극에서 아무런 기능도 섬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존재이유가 없는 불필요한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차라리 한 부장과 박 기자의 관계로 하여금 무봉과 수란의 관계를 반영하거나 대조토록 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더라면 극의 내면적 의미가 보다 짜임새 있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봄의 초연 때와 비교해서 각 장면의 시적 압축미가 강화되고 산만했던 음악극적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정리되면서 한결 세련된 무대 만들기를 보여주었으며, 유영환과 최승일의 깊고 힘있는 역 창조, 승의열과 손종학의 유머러스한 변신 등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극 구성상의 근본적인 결함을 상쇄하기에는 미흡했다.

불교적 진리를 주제 삼은 극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는 실정에서 이제는 스님들을 등장시켜 상투적인 통과의례를 보여줄 것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세속인들을 중심기호로 종교적 주제를 접근해 봄이 어떨지 제안하는 바다. 환속을 통한 탈속보다 탈속을 통한 환속이 더 연극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인극장의 〈박사를 찾아서〉

조원석 작 강유정 연출의 〈박사를 찾아서〉는 이번의 연극제 참가작 가운데 사실주의의 틀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 작품이다. 언제나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을 직선적으로 비판해 온 작가 조원석이 아마 김형욱의 실종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쓴 것 같은데, 극은 조직의 폭력에 의한 개인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다. 얼핏 우리는 관습적으로 '조직=악, 개인=선'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떠올리겠지만, 이 극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한 사람인 윤정섭(김재건)이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심판 내리기가 간단치 않다.

극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요인물들 가운데 정신병자가 없고 오히려 바깥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타협을 못해 고생하는 정신과 의사 김 박사(박지일)는 교통사고로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윤정섭(김재건)의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 그의 삶을 추적하던 중 윤정섭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그가 몸담았던 정보조직의 비리를 알게 되어 스스로도 위험에 빠진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조직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어서 마침내는 폭력을 동원해 김 박사를 정신병자가 되게 만든다. 극은 이렇게 한 인간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헌신이 폭력적인 조직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과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자로 마감되는 이 역전구조는 대단히 극적인 발상이었지만,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의 글쓰기가 너무 도식적이어서 극의 진행이 충분히 예측되었기 때문에 결말의 충격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직과 개인과의 관계, 특히 안기부와 시민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일반적인 국민정서일진대, 조직과 개인을 흑백논리로 양단 하는 지난 어두웠던 시대의 패러다임이 이 시대를 초상함에 있어서, 그리고 오늘을 사는 관객들의 수용미학을 수용함에 있어서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심스럽다.

어딘지 썰렁하고 궁색한 무대장치(강경렬)는 미학적인 선택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유태균· 박지일·김재건·정경순·김하균 등의 중심배우들이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긴 했지만, 역과 역 사이의 전기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 무대의 생동감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근 주요 무대에 자주서는 박지일은 내면적 주의집중을 통해서 육체적 긴장 없이 감정을 행동화하고 역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훈련이 부족함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올해의 서울연극제는 뚜렷한 수작은 내지 못했지만 무대 만들기에서 고른 수준의 향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민감한 현안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연극인들이 메시지를 생경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연극적으로 승화시키고 재창조하는 데 역점을 두는 성숙한 사회의식을 증명해 보인 것도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더욱 성숙된 모습의 내년도 서울연극제를 벌써부터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