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음악

연주자가 주인되는 연주




주성혜 /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음악을 배운다'라든가 '음악을 전공한다'는 말이 나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으레 그 '음악'이라는 것을 소위 서양 고전음악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혼재하는 다양한 여러 음악영역 가운데서도 서양 고전음악의 사회적 지위가 특히 대접받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런데 '노래를 잘한다'라는 말을 할 때엔 경우가 좀 틀리다. 그때엔 고전음악에 속하는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보다 대중가요를 잘 부른다는 뜻으로 쓰일 때가 훨씬 더 많은데, 그것은 음악적 질의 시비를 떠나서 대다수에게 부르기 쉽고 듣기 편한 노래가 대중가요라서 일 것이다.

'음악'이라는 낱말이 통용될 때 그것이 시공을 초월한 모든 음악을 의미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음악'은 서로 독립된 영역인양 취급되는 두 갈래의 '음악' 중 한편에 서 있는 경우이다. 둘로 나뉘어지는 영역이란 이른바 순수음악 또는 고전음악이라 불리는 영역과, 상업음악 또는 대중음악이라 불리는 영역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악의 분류가 20세기 대중매체의 발달과 함께 비롯되었음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음악의 분류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달리 이루어진다. 교회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서구 중세 사회의 경우에는 음악을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와는 음악 판단에 대한 우선적인 근거가 다른 것이다.

이상적인 음악은 스스로의 충일감으로부터 나온다

고대 그리스는 음악적인 실체는 거의 남겨 놓지를 않았지만 문헌들을 통해 음악에 대한 시대적 가치관들을 더러 전하고 있는데, 그리스인들이 음악을 분류하는 방식 중에도 역시 두 가지의 영역을 설정하는 예가 있다. '기계적인 음악'과 '교양적인 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 영역이 그것이다. 이는 연주자의 신분과도 관계되어서 '기계적인 음악'에는 노예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교양적인 음악'에는 자유민이 연주하는 음악이 속하였다.

'기계적인 음악'이란, 노예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주인을 위한 것이고 따라서 듣는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기계적·기술적 숙달이 무엇보다 우선적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반면 자유민이 연주하는 음악은 연주기술보다는 스스로 연주를 교양으로 즐기는 것이기에 '교양적인 음악'이라 불려졌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상위가치를 얻은 것은 단연 자유민의 '교양적인 음악'이었다.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음악을 분류하고 가치부여를 한 그리스인들의 음악관은 그러나 우리에게 재미있는 비교와 생각해 볼 만한 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연주가를 그리스의 연주가에 대입시킨다면 어떨까 ? 연주에 임하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태도는 기계적인 음악을 다루는 그리스 노예의 심정과 닮았을까 아니면 스스로의 음악적 경험을 즐기는 자유민의 입장에 있는 것일까 ? 이런 비교를 하다 보면, 들어 줄 청중을 전제해야 하고 그들과의 음악적 소통을 위해 연주기술의 습득에 매달려야 하는 오늘의 전문연주가들은 그리스 음악관의 계급으로서는 노예의 신분에 속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특정시대가 부여한 가치가 절대적일 수는 없는지라 노예가 하던 일이면 어떠냐,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오히려 우리는 그 일의 숨은 가치를 평가해서 지금은 훌륭한 일이라 여기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랴 하는 반문이 그에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음악적 가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평가기준이 단지 연주자의 신분 때문 만이었을까 ? 기계적인 음악보다 교양적인 음악이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지배계급이 연주를 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남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연주, 그것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교양적인 음악과 기계적인 음악은 둘 다 자유민이 즐기는 음악이지만, 단지 감상만 하는 음악보다 연주하는 음악의 음악적 경험을 그리스인들은 값지게 생각했다는 뜻이 된다.

연주를 통한 음악적 경험의 중요성은 오늘날에서도 물론 인정되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악기를 가르치면서 미래의 유명 음악가 부모를 꿈꾸는 엄마도 있겠지만, 연주교육의 첫째 가는 목표는 음악을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정서적인 인성의 형성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연주가는 이미 생활화된 자신의 연주를 통하여 얼마나 양질의 음악적 경험을 하는 것일까 ?

양질의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가는 양질의 음악적 경험을 한다. 그러나 우리 악단이 올리는 수많은 무대들에서 우리의 연주가들은 스스로가 양질의 음악적 경험을 얻는 그런 양질의 연주를 얼마나 자주 하고 있을까 ?

자신의 연주회에 누가 왔느냐가 첫째 가는 관심사이고 연주 드레스의 요란한 치장에는 지극히 신경 쓰면서 정작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 자신의 연주에는 무감각한 연주가, 우리는 그런 연주가를 흔히 만난다. 악보 속의 음높이와 리듬을 '틀리지' 않고 치기만 하면 되고 자신의 연주가 남과 다르다는 말보다 안 틀렸다는 말, 남만큼 친다는 말로 만족해 버리는 그런 연주가들이 아직도 우리 악단에는 많다.

그런 연주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남들로부터 음악가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며 그 곡을 음악으로서 스스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숙고하는 연주, 그래서 작곡가의 악보 속에 숨은 자신의 음악을 캐내는 작업의 연주를 즐기는 대신, 그 작업 후에 비로소 있어야 할 타인의 반응이 더 신경 쓰이는 연주자들에서 필자는 그리스 하층 연주가들의 심정이 연상된다.

자유민의 연주는 기교적으로는 노예음악가들의 그것보다 낫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불성실한 연주를 탓할 청자의 존재가 별로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의 음악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만 자유민의 음악에는 연주자 스스로가 주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음악이 스스로의 충실감으로부터 빚어지는 타인과의 교감에 있다면, 우리의 연주가들은 자신의 연주에서 스스로가 얼마만큼 주인 역할을 해 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연주계의 반가운 징후 연주동인 '클라비어'

그런 저런 생각 속에 필자는 지난 10월 12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꽤 반가운 음악회 하나를 만났다. 네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대학 동문이라는 학연으로 결성한 '클라비어 (clavier)'라는 연주그룹의 창단연주회였다.

홍은경·홍순미·송미란·심성희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차례로 오른 이날의 무대는 춤곡이 라는 하나의 장르로 순서를 채웠다. 춤곡은 일반적으로 어떤 벅찬 정점과 그것의 해결을 연출하기보다는, 동일한 리듬적 맥박이 거듭되는 가운데 자칫 그것이 낳기 쉬운 단조로움을 어떤 다양성으로 풀어내는가 하는 연주상의 과제를 가진 장르이다. 때문에 악곡에 대한 연주가의 의식적인 사전 작업이 까다로워서 학구적 연주의 좋은 대상일 수가 있다. 클라비어의 연주는 그러한 기회를 비교적 잘 살리고 있었다.

연주곡들을 하나의 장르로 통일한 네 사람의 연주는 음색과 셈여림, 템포 등 자신들이 조절 가능한 모든 음의 재료를 동원하여 하나같이 악곡의 구조와 장식적 요소 대비에 주력하고 있었다. 자신이 연주할 대상 악곡에 대한 철저한 탐색과 그 결과의 표현에 대한 숙고, 그로부터 얻는 만족감이야말로 연주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진정한 음악적 경험이 아니겠는가. 우리 연주계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연주가로서의 이 필수적인 자세를 일관된 연주성향으로 음악에 반영하는 클라비어의 연주를 들으면서, 필자는 '연주동인'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한 이러한 연주자들의 등장이 연주계를 위한 청신호라 여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