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임 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유진규 / 한국마임협회회장
'마임(mime)'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곡예사·요술쟁이·약장수·배우들로 구성된 대중 취향의 저속하고 때로 외설적인 연희 또는 연희자를 일컬으면서 역사 속에 나타난다. 이들은 짤막한 풍자적이고 소란스러우며 해학적인 장면을 행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그 당시 희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마 후기에 이르면 이것은 전성기를 이루면서 공연이 극도로 외설적이고 광포하게 진행되었다. 관객의 요구에 응하여 여성 마임 배우 등은 옷을 벗어야 했고,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실내 공연에 등장시켜 처형하였다. 로마의 몰락 이후 중세를 거치는 동안 마임은 유랑배우·요술쟁이·곡예사들 속에 이어져 왔고,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로 연결된다.
19세기 초, 파리에서는 합법적인 공연에 관한 제재가 가해져 일반 연극에서 대사를 금지시켰다. 이때 드 뷔로가 달빛 아래 명상하는 피에로를 통해 당시 엎치락뒤치락이던 슬랩스틱 마임 등 사회적인 내용을 지닌 의미 있는 형태로 승화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 마임은 에티엔느 드쿠르로부터 시작된다. 1923년 드쿠르는 연극배우가 되고자 자크코포의 뷔 롤롬비에 연극 학교를 찾아간다. 그때 학생들은 벗은 몸에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말없는 몸의 표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가면 연기로 생각했으나, 그는 얼굴을 가리므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몸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마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그는 "마임 배우는 순수한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배우의 몸을 극장의 모든 장식·조명·장치·의상·분장·음악 및 희곡과 연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몸의 움직임을 음악의 스케일처럼 엄격하고 신중하고 정교하게 훈련할 수 있도록 동작 법칙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마임은 진지한 예술이다. 음악과 무용과 연극이 진지한 예술이듯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마르셀 마르소는 이러한 드쿠르의 예술 지상적 마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마임은 인간과 자연과 그리고 주위의 모든 요소들을 배우의 몸과 일치시키는 예술이지만, 팬터마임은 거기에 코믹하면서 드라마틱 한 줄거리를 첨가시킨 것이다"면서 현대 마임의 테크닉을 19세기의 전통적 팬터마임과 접목시킨다.
그의 마임은 전세계적인 각광을 받는다. 드쿠르가 현대 마임의 훌륭한 이론가요 교육가라면 마르소는 그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활짝 펼친 훌륭한 배우다.
여기에서 팬터마임과 마임의 다른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현대의 마임 배우들이 자신들의 예술을 인기 오락적인 팬터마임과 구분하기 위해 '마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팬터마임이란 대중적인 요소가 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뉴 마임이나 포스트 모던 마임 또는 무브먼트 시어터 등의 용어로 변화되어 가는 현대 마임을 표현하고 있다.
공연예술로 자리 잡아가는 마임
이러한 현대 마임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68년 롤프 샤레의 공연을 통해서였다. 그 다음 해에 극단 에저토가 실험극의 하나로서 팬터마임 발표회를 가지면서 70년대 초기 마임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70년대를 보내며 우리 마임은 무언극·현장 무언극·침묵극 등의 용어로 공연되었다. 용어 선택에서 보여지듯 서양 마임과는 다른 우리 나름의 형식과 세계를 찾아가는 작업이 유진규·김성구에 의해 서로의 발전을 독려하며 이어졌고, 거기에 서양식 디테일 마임을 지속해 준 김동수·조종두·최규호·박상숙이 합세했다. 이들은 마임이라는 분야를 정립하려는 의도보다는 각자의 작업에 있어서 실험적인 표현 방법의 하나로 마임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스스로에게 한계를 만들고 말았다. 1980년대 초, 유진규·김성구들로 대변되던 한국 마임은 이러한 벽에서 헤매다 스스로 침체되어 무대를 떠나는 공백기를 가졌다.
〈우리들의 초상〉으로 대변되는 김성구의 일련의 연작과 〈아름다운 사람〉 연작으로 대변되는 유진규의 작업이 우리 마임의 이즈음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기존 마임 배우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심철종·유홍영·임도완 등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다. 1989년 한국 마임은 1982년 우리 마임이 침체기로 빠지기 직전 가했던 첫 번째 마임 페스티벌 '팬터마임을 봅시다' 이후 두 번째로 실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고 오늘을 평가해 보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제1회 한국 마임 페스티벌'은 마임이란 이름으로 공연을 하고 싶은 모든 이들이 참가하는 자리를 신인 기성에 구분 없이 개방하여 한자리에 모아 본 이름 그대로의 페스티벌이었다.
신영철에 의해 기획·제작된 제1회 한국 마임 페스티벌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말없이 행해지는 모든 작품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것은 말없는 표현의 다양한 세계를 제공해 준 반면에 어디까지가 마임이고 어디까지가 마임이 아닌가 하는 마임의 형식과 의미에 관한 본원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분분한 의견 속에 이런 혼란이 80년대 초 마임이 스스로 한계에 부딪쳐 사라져 버린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마임을 정립하려면 마임의 기준에 맞는 작품만을 마임이라고 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마임을 살리기 위해 어떤 기준을 세워 놓고 마임을 그 틀 속에 가둔다는 것은 모순된 행위다. 어쨌든 모든 예술이 개방적인 실험을 거듭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 마임은 보수적인 제자리 다지기 걸음을 해야 했었다.
우리 마임의 발전을 위해 의미의 혼돈과 형식의 범위를 나름대로 제한하고 정리함으로써 한국 마임이라는 용어로 일컬어지는 우리 마임의 영역을 다듬었다.
그해 5월부터 시작된 '공간 마임의 밤'을 통해 독자적으로 활동해 왔던 마임 배우 등의 정기적인 모임이 이루어졌고 발표된 작품을 비평하고 격려하는 속에 공동체의 분위기가 익어 갔다.
1990년 '제2회 한국 마임 페스티벌'이 춘천에서 「생활 문화」의 제작·기획으로 열리게 되고, 더욱 성숙해진 공동체의 결속 의지는 '한국마임협의회'를 발족하게 하였다. 이래서 한국 마임계는 처음으로 대표할 수 있는 단체를 갖게 되고, 구체적인 사업을 통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해 온 사업들은 첫째 한국 마임의 현재를 확인하는 한국 마임 페스티벌 매년 개최, 둘째 마임에 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마임 홍보지 「마임」 발행, 셋째 마임의 저변 확대를 위한 지방 순회 공연과 거리 공연, 넷째 토론회와 강습회을 통한 이론적 정의와 교육 등이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마임에 대한 주위의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하나의 공연 예술로서 자리잡기 위한 외형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의 마임은 그 하는 이들의 부족과 저변 확대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몇 안 되는 연기자들이 스스로 쓰고 연출하고 자평 하며 이루어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 몇 해 동안의 노력의 결과로 20년 동안 버림받았던 마임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이제는 확고해졌고 잃었던 관객들이 다시 모여 대사 없는 연극이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성 짙은 육체 표현의 한 장르에까지로 다양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하고 있다.
20년 전 마임의 유입기나 그들의 시행착오가 거듭되던 시기, 그리고 좌절해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시절까지의 모임만을 선입관으로 뇌리에 둔 최소한의 격려와 무관심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마임 하는 이들의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마임 배우 하나의 출현이 막막한 가운데 20년 된 사람도, 10년 된 사람도 자신의 레퍼토리에 그 초보적 마임의 형식을 언제나 달고 다녀야 하는 문제도 있다.
1백 명의 연기자가 보여주어야 할 다양성을 단 6명의 연기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 여기에 있으며, 그런 이유로 우리 마임은 지극히 제한된 한계성을 가지고 그 안에서 발전하는 답답함이 있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그간 잠재워져 있던 마임이란 장르의 공연 행위가 지난 1∼2년을 사이에 두고 비약적인 양적 확대를 가져왔다는 것과, 그 가운데 분명한 질적 향상을 보이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우리화'의 발전을 희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신영철, 「최근 마임극 경향에 대하여」 중에서
내용과 형식의 정립·개발 필요
그러나 우리의 마임은 그 내면에 보다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리의 마임은 외국에서 받아들여진 채 뿌리를 가진 재창조 과정이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즉, 현대 마임을 시작하고 에티엔느 드쿠르와 같은 사고의 전환과 방법의 모색 없이 답습으로 지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한국 마임 20년의 반성과 도전'이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심우성씨는 '한국적 마임과 오늘의 한국 마임'이란 발표를 통해 "한국적 마임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인이 존재하는지의 물음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이 쉽게 대두됨은 우리 문화의 오늘이 다분히 주체적이지 못했음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 한국적 마임을 창출해 가는 데는 전형성의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면서 "하나의 전형을 획득하는데는 먼저 역사적 유산이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생활 속에서 어떤 기능을 갖고 전승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면서 오늘의 사회와 연관지어 그 가치가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때야 비로소 생존하는 굿으로 뿌리를 내릴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무세중씨는 '행동 예술로서 창출된 한국 마임'이란 발표에서 "크라운·피에로·어릿광대·소릿광대 등의 마임 광대들은 전철·아파트·자동차·테이블·위스키·침대·카페·레스토랑에서 말뚝이·쇠뚝이의 변신으로 양복 입은 광대로 등장해야 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구태여 극장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일 필요 없이 수천, 수만, 수억의 거리에서 우리들의 카페에서 우리들의 아파트 마당에서 죽어 가는 우리들을 위로하고, 사랑하고, 같이 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임의 속성과 특질에 대한 확고한 인식 그러한 현대의 광대 의식이 앞장서야 된다"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지난 11월 중순에 이틀 동안 마임협의회 회원 모두가 전주 공연을 다녀왔다. 관객들의 열기 어린 반응 속에서 마임 예술의 필연성은 거듭 확인되는 데도 그 열기만큼 공허함이 감돈다. 뿌리가 없다는 공허함이…… 최근에 발간된 「한국의 연희」(윤광봉 저)에는 신라 시대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5수 중 무용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속독'이요, 이 무용에 약간의 대화가 섞인 듯한 것이 '대면'과 '산예'이며, 완전히 소극적(farce) 요소가 가미된 것이 '월전'이라 할 수 있으며, '금환'은 단순한 기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오기(五伎)'에 연극이란 용어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발전 과정에서 이 오기는 분명히 완성된 희곡 이전에 존재했던 묵극(mime)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뚜렷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글들은 신영철씨의 「한국 무언극의 오늘」에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