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담화 형식
김승옥 / 고려대 교수
얼마 전가지만 하더라도 역사 소설이 출간될 때마다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 소설의 소재가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빨치산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처음으로 다룬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문학이란 당연히 현실에 대해 영원한 긴장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특수한 시대 상황의 요구 때문이었다. 현실적 삶에서 금기가 그토록 많았던 시절, 그 금기를 뛰어넘어 진실을 말해 주고 왜곡된 역사를 복원시켜 줄 임무가 역설적이게도 현실과는 가장 거리가 먼 문학적 담화의 영역에 부과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변화된 시대 상황은 비로소 작가들로 하여금 시대의 무거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소설 동의보감」 이후 독서계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역사물들은 대부분 지나친 상업주의와 통속화에 빠져 버림으로써 우리의 독서계는 문화 외적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펼쳐 나갈 모처럼 어렵게 획득한 기회로부터 더욱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역사·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인화의 최근작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은 이런 맥락에서 많은 토론점을 제공해 준다. 우선 이 작품은 영·정조 시대라는 특정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더구나 통념적으로 알려진 역사를 전복적(顚覆的)으로 재해석하려는 전형적인 역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서 작가는 어떤 잘못된 역사의 사실을 복원하거나 진실을 밝혀 내려는 노력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무거운 역사 소설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화자(나)가 동경의 한 도서관에서 정조의 독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취성록」이란 책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는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데다가 이 책의 집필자로 되어 있는 이인몽(李人夢)이란 인물 역시 역사적 조회가 불가능한 가공인물에 가까와서 화자는 고민 끝에 이 책을 소설의 형식으로 번안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0장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 그래, 한 번쯤 학문적 검증에의 욕망을 포기하고 즐거움으로서의 글쓰기와 허구의 가능성을 무제한 보장하는 전혀 다른 왕국으로 달아나 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전지적 작가 시선으로 바뀌는 1장 이후는 정조 24년인 1800년 1월 19일 새벽부터 20일 새벽까지의 만 하루 동안에 규장각 대교라는 직함을 맡고 있던 주인공 이인몽이 "악마적인 작가가 거미줄처럼 엮어 놓은 역사의 퍼즐 게임"에 빨려 들어가 겪게 되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허구적으로 선정된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조선조 말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 정치를 펼쳤던 정조 및 남인 세력과, 정조의 절대 군주화를 저지하고 붕당정치(朋黨政治)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벽파간의 충돌이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아 마침내 정조가 살해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형상화함에 있어 작가는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코난 도일의 「마스커빌의 개」 등 여러 추리 소설적 모티프들을 패스티쉬(혼성모방)하고 있다. 영조의 글을 변조하려던 규장각 검서관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가 「장미의 이름」의 그것과 유사하며, 나아가 「장미의 이름」의 기본 대립 구도를 이루는 프란체스카 학파와 베네딕트 학파의 대립 모티프에 상응하는 것이 「영원한 제국」에서는 신권(臣權)중심의 노론과 왕권 중심의 남인 사이의 대립 구도로 나타나는 등 작가는 작품의 많은 부분을 다른 추리소설로부터 패스티쉬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더구나 작가 이인화는 데뷔작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연관하여 이미 한차례 표절 시비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의 「영원한 제국」의 경우엔 특유의 역사적 배경과 담론 구조를 지닌 창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다시금 그런 논쟁에 휩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동안 사색당파의 소재는 대개 소모적인 붕당적 쟁투로만 이해되어 왔고 또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권력투쟁을 사적인 암투의 수준으로 떨어뜨려 독자의 말초적 흥미만을 자극시키곤 했던 삼류 소설적 소재로 즐겨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이
지닌 가장 큰 소설적 미덕은 이러한 소재를 나름의 확고한 정치 이상과 철학을 지닌 두 세력간의 대립으로 즉 붕당정치를 지지하면서 사대부들이 왕의 전제를 견제해야 한다는 한편의 정치 세력(노론)과, 강력한 국왕의 통치권 아래 부국강병을 도모해야 한다는 또 한편의 정치 세력(남인)간의 대립으로 이끌어 올려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작가가 지닌 독특한 역사적 시각과 한학 및 고전에 대한 풍부한 이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노론과 남인의 대립을 단지 현실 정치적인 대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경(六經)을 중히 여겨 성왕정치(聖王政治)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유교 근본주의와, 사서(四書)를 중히 여겨 붕당정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주자학 중심주의간의 대립이라는 철학사적 차원에까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처럼 매우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을 포괄하면서도 끝까지 특유의 긴장감과 소설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이 추리물의 구성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화자가 노론과 남인 양측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쉽게 기울지 않는 팽팽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 전략의 흥미로운 한 형태
작중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인몽은 이러한 탄탄한 소설적 구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인몽은 평생 '충성·충의·충절'을 '인생의 성스러운 인과율'로 생각하며 살아온 전형적인 남인 출신 관리이지만, 현실 정치적 입장 이전에 그가 타고난 곧고 강직한 성품은 그로 하여금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가능케 해준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노론의 박지원에게도 인간적 연민을 느낄 줄 알며 또 정조 임금을 무조건적인 영웅으로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에 대해 음모를 꾸미는 일은 심환지나 서용수 등 노론 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조 역시 반대파를 측근에 기용하여 역으로 덫을 놓는 등 추악한 권모술수를 서슴없이 일삼는다. 반대로 남인의 최대 정적인 노론 벽파의 심환지 역시 추상적인 악역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주장하는 온갖 이단의 준동에 맞서서 자신의 온 힘과 온 정성을 바쳐 주자학의 정통을 수호"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품의 객관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화자가 이인몽이라는 균형 잡힌 인물을 통해 사건을 엮어 나감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주인공 이인몽은 사건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며, 화자 역시 아무래도 정조의 남인 세력의 입장에 기울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심지어 "정조가 시해되고 일제에 의해 망하기까지 1백 년간 우리의 역사는 성왕이 사라진 뒤의 난세, 바로 그것"이며 "우리는 '진보적'이라는 입헌정치를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홍재유신, 즉 정조의 절대왕정을 수립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라고 못박아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정조의 왕토 이념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던 왕권 중심주의의 이념, 심지어는 서구식 절대왕정의 이념과 그처럼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물론 정조의 개혁적 구상이 적서차별의 철폐라든가 노비 제혁파 등 근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현실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측면을 당연히 눈여겨봐야 하겠지만, 정조가 꿈꾸는 성왕정치란 결국 먼 옛날인 주(周)나라로 돌아가려는 복고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며, 현실 정치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그를 지지한 남인 세력이 결국 보수적인 위정척사파로 귀결되었다는 실제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작가의 위와 같은 판단은 다소 성급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궁극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이며 작가는 단지 과정을 보여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단지 역사를 뒤집어 보는 기지(奇智)나 재치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작가의 진지한 역사의식이란 아무런 허영이나 사심 없이 역사와 대화하려는 참된 역사 소설을 낳는다고 할 때, 우리는 「영원한 제국」에서 아무래도 미흡한 감을 지을 수 없을 듯하다.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작가가 꿈과 현실을 대담하게 뒤섞어 버린다는 점이다. 인몽(人夢)이란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벌써 어떤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인몽은 꿈과 현실, 삶과 죽음, 텍스트와 역사적 사실간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실체 없는 허구적인 인물이다. 이미 1장에서부터 현실과 꿈이 마구 뒤섞여 그려지고 있다. 사건이 있던 날 새벽, 이인몽은 비몽사몽 속에서 아내의 죽음에 관한 꿈을 꾸는데, 그것은 꿈이면서 동시에 실제의 사건에 대한 비전이자 사건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몽은 장차 벌어질 아내의 죽음을 예감해 주는 꿈을 꾸면서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더니, 사람인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이냐, 나비인 내가 사람의 꿈을 꾸는 것이냐"라고 탄식한다.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인몽의 곧은 성품이 음모와 모략으로 가득 찬 조악한 삶의 세계와 충돌하면서 그가 성왕으로 숭배해 온 정조 임금도 노론 일파들 못지 않은 세력가임을 직시하게 되면서,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 착한 임금께 외곬으로 충성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꿈", 그 평생의 인과율이 깨어지면서 꿈과 현실의 착종은 한층 심각해진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삶을 '심연'으로, '추악함'으로, "똥물을 들이킨 듯한 불쾌감"으로 인식하면서, 문득 그에겐 "눈앞의 삶이 물결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인몽은 왕에 대한 충성을 끝내 버리지는 않지만, 사건의 말미에서는 왕의 시해에 협조하라는 반대파의 협박을 단호히 거절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그는 현실로부터 한 발짝 거리를 두게 된 것이며, 그것이 간접적으로는 왕을 죽음으로 이끄는 한 요인이 된다.
작품의 8장은 시해 사건이 있은 수십 년 뒤로 시간을 옮겨와, 박상효란 가공의 이름으로 시골에 숨어살고 있는 이인몽을 묘사하고 있는 데, 인몽은 그날 이 시해 사건을 더 이상 현실이 아닌 꿈으로 생각하고 있다. "영원이라는 매끄럽고 단단한 고리 위에 시작도 끝도 없이 발생하는 무수한 순간들.(‥‥) 나의 생은 영원한 꿈속의 물방울 하나, 꿈속의 꿈이었다"라고 인몽은 뇌까린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까지 심한 회의를 느낀다. "이인몽이란 이름은 실체가 아니라(‥‥) 물방울 같은 순간의 이름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살아 있었던가."
여기에 이르러 이인몽은 그리고 화자는 좌절된 역사에 대해 아무런 부채의식이나 무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제 역사는 단지 아련한 추억으로만, 꿈으로만, 허무(虛無)로 서만 남을 뿐이다. 인몽은 그날의 사건을 글로 기록하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우연히 마주친 과거의 동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회피하고만 싶은 역사이기에, "이 세상 은 먼지와 티끌"이기에 인몽은 "나는 왜 누구를 위해 이 책을 쓰는 것일까"라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왜 글을 쓰는가 ?'
더 이상 부채의식으로 작용할 수 없는 과거란 과연 현재에게 있어선 무엇인가, 인몽이 던진 이 물음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작가가 구상하는 소설이란 이제 허구와 현실, 역사와 실제와의 대응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자유로운 유희 공간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역사 소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소위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서 주요한 유희적 담화 형식, 새로운 대중 소설적 글쓰기 전략의 흥미로운 한 형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