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내일을 위한 서울의 뿌리 찾기




이태진 / 서울대 교수

뿌리찾기의 의미

뿌리찾기란 말은 19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의 한 흑인 노예 집안의 내력을 추적한 인기 TV극 <뿌리> 방영 이후 뿌리찾기란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용어가 유행한 내력을 이렇게 새삼 더듬는 것은 그 시점 때문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의 열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 때는 우리의 생활에 '윤택'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던,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먹고 살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뿌리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생활이 다소 나아지면서 제것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서울시는 정도 6백 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가지 행사와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중에 뿌리찾기를 제일 앞자리에 놓고 있다. 서울시가 기념 행사와 사업의 큰 범주 설정에서 이런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 이미 높은 수준으로 성장한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1945년 해방 당시 서울의 인구는 30만 안팎이었다. 그리고 6·25 동란을 거친 뒤인 1954년 현재로 2백만으로 급증하고 1970년대 후반에는 다시 7백50만 대로 뛰어 올랐다. 이 증가 추세는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서울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던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뿌리 찾기란 말은 그런 상황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박이 '서울내기'는 40년대까지의 30만 속에 있었다. 7백 50만의 나머지 대부분은 지방도시,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의 뿌리란 '서울내기'들만의 것인가? 당시 서울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새 서울 사람들'에게 뿌리찾기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뿌리 찾기는 개인 차원에서는 족보 뒤지기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생성된 뿌리 의식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대폭 늘어난 서울 사람들에게서 뿌리 찾기의 대상은 '본래의 서울'모습뿐만 아니라, 개발정책으로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고 없어져 가고 있는 '처음에 본 서울'의 모습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처지까지도 빠르게 변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뿌리 찾기 의식의 근저를 이루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뿌리 의식에 역행한 도시 개발

70년대에 사회적으로 뿌리 의식이 대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발의 변화가 가장 많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수도 서울에 뿌리 찾기가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던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라는 쪽이다. 그 무렵 서울에는 도시 가꾸기로 동상 세우기란 별난 사업이 있었던 것이 기억된다. 이 사업은 뿌리 찾기라기보다도 유럽도시에 거리마다 동상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서울 거리에도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 '국제적' 변모를 과시해 보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모방의 도시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상이 '비주체적'일 뿐만 아니라 동상 자체도 급조되어 볼거리가 되지 못했다. 사업은 완전 실패작이었다.

뿌리 찾기라고 평가할 만한 사업으로는 광화문 복원사업이 있었다. 경복궁의 정문으로 일제의 총독부 신축 때 해체되어 궁궐 한 모퉁이에 잔해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제자리로 옮겨 복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서울의 거리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궁궐의 정문이니 엄밀히 말하면 순수 서울시의 사업이라고 할 수 없는 면도 없지 않다. 70년대에도 서울은 뿌리 찾기 의식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문화유산 파괴의 대행진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서울만큼 역사가 오랜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몇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런 자랑에 앞서 우리는 서울만큼 역사적 유적·유물을 남기지 않은 도시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서울을 한번 둘러보라. 유적으로 성벽과 대문, 궁궐 외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 광경은 더 이상 갉아먹을 수 없는 것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참혹하다. 남아 있는 것도 보수의 이름 아래 변조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에는 본래 상하기 쉬운 목조 기와집이나 초가집뿐이어서 남은 것이 적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라. 우리들은 청계천 여러 곳에 걸려 있던 아름다운 석교들을 일말의 주저감도 없이 콘크리트로 덮어버리지 않았던가. 지금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도심의 하늘을 가득 메운 고층빌딩 가운데 전통미를 살려 보려는 흔적을 조금이라도 담은 건물이 어디 하나라도 눈에 띄는가. 한국역사 공부를 하는 한 미국 친구가 수년 전에 광교 근처에서 서울은 지금 도쿄화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서울이 미국의 어느 지방도시를 방불케 한다는 촌평은 수없이 듣고 있다. 6백년 고도가 이런 수모를 받고도 가만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자연과의 조화 우선한 도시 경관

서울은 지금 인구 1천1백만을 헤아리는 '세계적' 대도시가 되어 있다. 전국민의 4분의 1이 수도 서울에 몰려 분주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을 전통과 역사가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통과 역사는 오히려 버려진 지 오래라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서울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그나마 기대가 가는 것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풍광뿐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마저 없었다면 이 도시에 대한 우리의 애착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 사이 이 자연마저 무분별한 개발정책으로 적지 않게 훼손되어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아프다.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출발, 생성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오늘의 '서울의 위기'는 아마도 이 사실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의 도시적 경관은 유럽도시들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유럽도시들은 대부분 평원에 건설되어 주위에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속에 공원을 만들고 건물도 인공적인 조형미를 최대로 발휘하여 지었다.

서울은 주위에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시건설도 그 자연과의 조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유럽도시들과는 달리 치솟는 건물보다 지붕의 선이 옆으로 날렵하게 뻗는 건물들을 지어 주위 자연경관과 어울리게 했다. 둘러보면 산천이 바로 와 닿아 공원을 따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서울이 그간 그러한 '본래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고 위로 솟는 건물 짓기를 능사로 한 것은 당초의 그러한 도시설계의 원칙의 심오한 생각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평가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서구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도쿄화' '미국화'란 야유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울의 도시환경이 본래의 모습을 잃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부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근대화의 미명 아래 서울의 본래의 도시적 일관성을 서슴지 않고 파괴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북악산·북한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리고 들어선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폭거는 충분히 입증이 된다. 우리는 일제하에서 서울 파괴에 이미 중독되어 버린 상태에서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서울을 변조하는 파괴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후진을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자신에 의한 근대화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서울의 도시경관의 일관성은 크게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의 중심건물인 왕궁들이 온전한 한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우선시한 도시설계의 틀은 기본적으로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성 안에 들어서는 신식 건물들도 궁성과의 비율을 의식하면서 자연의 풍광에 적당한 형상을 갖추어 결코 고층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 이후 성 밖 용산강(현 원효로 일대)·마포 일대가 새로운 상업지대로 발달하고 있었으므로 도시의 고층화는 그 쪽을 중심무대로 펼쳐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서울은 신구 도시의 두 부분을 균형 있게 유지하여 세계적으로도 특성 있는 유서 깊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했을 것이다.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전통을 살리는 이상적인 도시 근대화의 길이었을 것이다.

후손을 위한 뿌리 찾기

그간에 저질러진 '원칙 위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당장에 도심의 고층빌딩들을 철거하고 도시계획을 새로 하자는 주장을 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앞으로의 개선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초공사이다. 개선은 결코 당장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당대에 실현될 수 없는 문제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가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뒤늦게 시작한 뿌리찾기는 의의가 크다.

뿌리찾기는 도시경관뿐만 아니라 시민생활과 시민의식 측면에서도 강구되어야 할 것이 많다. 이 측면에서도 전통으로부터 캐어 자부심을 가지고 키워 나갈 수 있는 대상이 적지 않다. 여기서 도시경관만을 거론했다고 해서 이 측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시경관은 전체의 판을 짜는 문제이기 때문에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의 뿌리찾기는 결국 수백 년간 도읍지로서 이 도시가 지녔던 개성을 되찾는 작업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미래의 발전은 서구 문물의 충격으로 잃어버린 제 기준을 되찾을 때 비로소 보장된다는 것이 그간의 경험이 도출하는 결론이다. 제 기준에서 도시의 개성을 구현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자랑스런 서울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