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거듭나야 하는 서울의 모습




강병기 / 한양대 교수

인간도시로의 새로운 모습 찾기

서울 정도 6백 년을 기념하여 지난날의 역사를 뒤돌아 보고 앞으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네 가지의 목표·주제 아래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인간도시로서 새로 나기 위해 서울의 여러 모습을 다듬겠다는 프로그램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인간도시로 새로 나겠다는 주제를 내걸고 있는 반성과 용기가 좋다. 일찍이 우리의 정치나 행정이 진심으로 새로 나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반성해 본 적이 없다. 여태껏 서울이라는 곳은 그곳에서 살고 일하는 인간을 존중하는 도시가 못 되었음을 솔직히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잘한 일이다

서울은 6백 년 전에 도읍을 정했을 때 이씨 조선왕조의 종묘사직이 오래도록 번성할 수 있는 땅으로서 정해진 것이지,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어서 도읍을 정한 것은 아니다. 근년에 와서도 서울은 조국근대화의 기관차로서 그리고 수출증대의 사령탑으로서 생산과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꾸며졌고 다듬어져 왔다.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맞이하는 정도 6백 년을 계기로 새로 나서 국제무대에 등장할 때에는 지금까지의 경제를 위한 기계장치로서의 도시모습만이 아닌 인간의 체취도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모하겠다는 도시관의 대전환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아끼는 산하 가꾸기

서울만큼 큰 도시로서 서울만큼 주변의 자연경관이 좋은 도시가 드물다고 한다. 도시 어디서나 동서남북 어디를 보든 웬만하면 나름대로 특색 있는 산이 있고, 도시 가운데를 넉넉한 폭을 가진 한강이 흐르고 있으니, 이렇게 시각적으로 그리고 거리적으로 산과 강을 가깝게 가진 도시는 없다. 그렇다고, 그 산이 첩첩이 겹치지 않고 적당히 떨어져 있어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 도시가 커지면서 도읍의 끝이고 변두리였던 산과 강이 도시 한가운데에 솟고 흐르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주변환경이 그 동안 경제를 앞세운 개발 바람에 적지 아니하게 할퀴고 상처를 입어 왔고, 시민들의 마음도 주변에 보이는 산과 강만큼이나 거칠어졌다. 그 동안 서울시민도 경제적·물질적인 부에 눈이 쏠리어 주변의 산하가 벌거벗고 흉한 몰골이 되어도 무관심하였고 남의 일로 생각해 온 게 사실이다.

그것도 그럴 만한 것이 지금은 서울인구가 1천1백만을 조금 넘지만, 6·25 동란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던 1953년의 서울인구는 1백만 정도에 불과했다. 불과 40년 동안에 11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말은 해방 전에는 일본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의 수가 절반 정도는 넘었을 것이다. 지금은 서울 토박이는 1백만에도 못미치는 서울속의 소수인종, 희귀인종이 되고 말았다. 나머지 1천만 정도의 현 서울시민의 대다수가 벼슬길을 찾거나 돈벌이를 찾거나 봉을 잡기 위해서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거나 흘러들어 온 나그네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고향은 시골이지 서울이 아니다. 서울은 자기에게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경쟁의 마당이지 고향은 아니다. 경쟁 마당이 좀 상처입고 몰골이 흉해져도 싸움터가 으레 그러려니하고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유민이요 나그네이다.

실은 서울의 자연환경이 황폐화된 데에는 고향 상실증에서 오는 시민들의 무관심과 경쟁사회에서 연유되는 인간성 상실 또한 책임을 면치 못한다. 이들에게 인간성을 일깨워주고 고향을 대신할 수 있는 포근함을 실감시키고 미래의 서울을 위해 약동할 용기와 자신을 주기 위한 표상으로서 서울의 산과 강은 가꾸어져야 한다.

특히 도시 가운데 있는 남산과 한강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자연과 인간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인간성 회복을 기원함을 나타내는 증표로서 가꾸어져야 한다. 서울시민들은 이들 가까운 산과 강에서 자연의 의연함을 느끼고 지난날의 패배의식과 조급증에서 벗어나는 호연지기를 기르게 될 것이다.

용광로 같은 서울의 활동 모습

원래 서울사람들을 제치고 우굴거리는 외래의 나그네들이 서울이라는 한마당에서 펼치는 활동은 비록 그것이 서울에의 일극집중(一極集中)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총체적 잠재력과 능력이 응고되고 표출된 어떤 상황이다. 그것들은 서울의 산과 들과 강을 황폐화할 만큼 파괴했지만 그 위에 나름대로의 인공적 환경을 꾸며냈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인공적 경관들도 전원의 풍경이나 모습과 다르다고 함부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본디 도시라는 인공적 삶터는 자연의 일부로서 구축된 전원의 삶터와는 발상부터가 다르다. 그것은 태양의 고열에 자기 몸이 불타버리는 것을 마다 않고 태양의 불 속으로 날아드는 페닉스(불사조)와도 같은 자연에의 도전을 멈출 줄 모르는 무모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 확고한 인간의 보루를 쌓고 자연과의 결별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자기 지배영역에 대한 인간의 염원이 담긴 모험이다.

한편, 이러한 모험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의 삶의 질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 지닌 자기에게 유리하게 환경을 변경하고자 하는 숙명적인 본능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1천만이 넘는 야심 찬 현 서울 시민들이 하루살이 신세임을 잊고, 뛰고, 움직이고, 일하기 위한 도구와 장치물이 서울의 도시적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열성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총체로서의 도시모습은 난잡하다. 중구난방이어서 이 도시가 전체로서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못해 아수라장이다. 이대로 가다가 머지않아 불타 죽는 파멸이 빨리 올지도 모른다. 모래알처럼 흐트러지려는 각자의 노력과 지혜를 보다 보완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생산성과 기능적 효율성과 경쟁적 우위성의 논리가 상충적 총체를 낳고 있다.

여기에도 더불어 사는 전체라는 인간화의 논리가 필요하다. 개체와 개체 그리고 인간과 환경이라는 것들이 나와 너의 사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 배를 탄 우리라는 사상과 논리가 도시구조물의 구축에 기본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타 죽는 날을 하루라도 더 뒤로 미루고 지속가능한 도시가 될 수 있다. 경제적 부를 향한 각자의 몸부림이 아비규환의 지옥세계가 아니라, 용광로의 불사름과 하나됨으로 연출되어야 한다. 어차피 파국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 마음 편하게 건강하고 유쾌하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인공환경의 도시모습이 때로 초고층빌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삶의 용기와 의욕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인간도시의 원점, 이웃과 동네

도시의 모습은 도시라는 물적 그릇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 동안 우리는 삶 따로 모습 따로의 도시밖에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나들이용의 얼굴을 해야 했고, 나들이용으로 옷을 입히려고 달려들었다. 나들이용의 얼굴은 가식과 긴장의 비인간적 얼굴이다. 자신이나 남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특히 서울사람들은 나들이 얼굴과 나들이옷을 입어야 선진국 국민이 된다고 계속 교육받아 왔고 강요당하고 있다. 언필칭 선진국 사람들은 방문을 나설 때도 속옷바람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말이다. 우리는 동네 가게에 갈 때에도 속옷 차림에 슬리퍼 끌고 나다니는 미개한 백성들이라고 나무란다. 집 가꾸기나 동네 가꾸기도 마찬가지로 선진국 모델을 억지로 적용하려 하여 미개한 서민들을 성가시게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품위를 갖추어 갈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이웃이라는 소단위 사회성원들의 삶은 어떻게 꾸며져야 하는가? 우리 방식을 바탕으로 살면서 국제사회에 내놔도 손색없는 이웃이나 동네를 만들 수 있다. 이웃과 동네에서의 인간관계도 새로 정립할 수 있다. 서울사람의 특징을 서울깍쟁이라 했고, 경우 바르다고 했다. 합리적 사고를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밀도 사회에서 오는 생활의 지혜가 이미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서울사람은 벼슬아치나 세도권세가들이 아니라 중인계급,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산층의 시민들이 만들어 낸 '서울사람' 모습인 것이다. 깍쟁이 정신과 경우 바름은 현재에도 고밀도 사회의 생활철학으로 유효하다.

이와 관련해서 서울의 동네경관 중 서양 특히 미국 교외주택을 모범으로 한 듯한 담장 낮춘 집들은 담장을 두어 적당히 내외부를 구분시켜 온 서울 서민주택가의 풍경보다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서울 고밀도 주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의 풍경은 다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동네 경관 요소이다. 고밀도 거주지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트고 사는 일이 아니라 서로 적당히 가려 주어야 프라이버시도 지키고 공공성도 지킬 수 있다. 이웃과 동네는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자의 삶의 논리를 형태화할 때 비로소 인간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