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국제화, 미래화, 열려 있는 서울




최상철 /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서울이 1394년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정도한 이래 올해는 6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름도 한양, 한성, 경성 및 서울로 네 번이나 바뀌었고 1900년까지 20만 내외에 머물렀던 서울이 1945년에 1백만, 1960년에는 2백만, 1992년 현재 1천1백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마이어 교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서울만큼 이렇게 단기간에 도시성장의 길을 걸은 도시도 없다. 더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 도시권에는 1천9백만의 인구가 살고 잇다. 세계적으로 보아 1980년에는 4위로 급부상하였으며 2000년에는 3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너무나 급격한 성장을 하다 보니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성찰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서울은 오늘과 같은 서울이 되어 있다.

서울 시민은 있는가

그러나 오늘을 살고 있는 1천1백만 서울 시민 중에서 90%이상이 당대에 서울로 들어왔거나 그들이 낳은 시민들이다. 한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들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다른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몸은 서울에 와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떠나 온 고향에 두고 있거나 직계가족들을 지방에 남겨 두고 있다. 명절 때마다 3백만에 가까운 서울로부터의 민족의 대이동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오늘 서울에 살고 있는 50%이상의 사람들이 태어난 곳은 도시가 아니고 농촌이다. 서울 시민이기 이전에 도시민이 되기에는 아직도 도시적 농민(urban villager)들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시민사회의 논리와 시민의식을 터득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시민사회·시민의식은 하루아침에 기대할 수 없다. 서구사회도 프랑스 혁명 이후 1백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서울이라는 고향의식을 상실한 고독한 군중, 뿌리뽑힌 사람들, 제몫만 찾고 누구도 비용의 지불이나 돌보지 않으려는 공유의 비극, 자생적 시민조직의 부재, 익명성이 아닌 무질서 등으로 대변되는 곳이 서울이다. 파리가 지닌 지성도, 런던이 지닌 공중성도, 뉴욕이 지닌 진취성도, 동경이 지닌 청결성과 친성도 없다. 이를 뒷받침할 문화적 긍지도 없으며 서울 시민의 자존심을 키워 줄 역사적 유산도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나라는 다시 중세적·전원적 농경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된다. 숙명적으로 고밀도 시민사회를 살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을 서울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 주민을 시민다운 시민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와 교육이다. 즉 시민문화의 창조와 시민교육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란 넓은 의미에서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문화는 정서적 생활양식, 경제적 생활양식, 가정의 생활양식 등 일체의 유형화된 삶의 양식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생활양식을 표현하는 학문과 예술, 그리고 가치의 체계들이라 할 수 있다.

멈포드는 정신이 도시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반대로 도시의 모습은 다시 도시민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역사와 공간 속에서 시민생활의 집적인 도시문화가 시민정신 형성의 조건이 됨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체적 가치보다는 외세와 세계경제의 압력으로부터 성장된 우리의 서울은 과연 어느 정도 우리의 생활과 문화가 배어 있는 도시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으로 서울 또는 서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야 하며, 다가오는 21세기에 대처할 서울의 역할을 우리 모두가 먼저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서울은 어디에 서 있는가

결코 서울은 우리에게 희망없이 버려진 도시는 아니다. 어느 도시학자의 말을 빌리면 인류가 만든 어떠한 도시도 천국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옥일 수도 없었다. 종국적으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을 추구할 뿐이다.

단축된 도시성장의 역사 속에서 1천1백만의 시민이 있으며 2백만대에 가까운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있다.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 전역에 주차장을 방불케하는 교통체증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는 버섯구름 같은 대기오염이 있다. 교통사고가 세계 최고라는 악명도 지니고 있다. 아직도 10만 동에 가까운 노후불량 주택이 있으며 '로데오' 거리가 있는가 하면 손수레도 들어가지 못하는 달동네가 공존하고 있다.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으며 현대적 슈퍼마켓과 재래시장이 공존하고 있다. 서울에는 햇볕이 쪼이는 곳과 그늘진 곳이 틀림없이 있다. 하루에 1만 7천 톤의 쓰레기가 나오고 있으며 5백만 톤의 물을 쓰고 있다.

그러나 매년 8만 호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1백80Km의 지하철을 건설하였거나 거의 완공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지하철 제3기 노선까지 완성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지하철망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주저하고 있으나 수도꼭지를 열어 그냥 마실 수 있는 세계 몇 개 도시 중의 하나이며, 짐짝 취급을 받지만 시민소득에 비해 세계 어느 도시보다 값싼 버스요금과 지하철 요금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아직 서울에서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없으며 '캘커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말 집이 없어 길거리에 자는 사람은 없다. 범죄가 많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서울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도시도 없다. 1천1백만 시민이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이내에 등산을 즐길 수 있고, 20년간 신화처럼 보존해 온 거대한 '오픈 스페이스'인 '그린벨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은 '로스엔젤레스'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고민하고 있는 인종문제도 없고, '베이루트'나 '런던데리'같이 종교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뉘어서 싸우는 도시도 아니다. '싱가포르'와 같이 중국계·인도계·말레이계로 나뉘어져 있는 다인종 도시는 더욱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나 '동경'과 같이 지진 때문에 공포에 떠는 도시도 아니다. 서울은 대단히 평등주의적인 도시이다. 꼬방동네가 있고 압구정동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섞여 살고 있으며, 60평 이상 아파트와 13평 임대 아파트가 하나의 단지 속에 싸우지 않고 살고 있다. 그렇게 나름대로 인간적인 도시이다. 동네에는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여러 가지 서비스 시설과 상점이 있고 자정이 가깝도록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서울은 수평적 사회이다. 부락민도 없으며 천민이나 귀족도 없다. 쌀장사가 재벌의 총수가 될 수 있으며 말단 공무원이 장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살아 있다. 한 세 대만에 집안이 바뀌어지는 예는 너무나 많은 도시이다. 패기와 생동력으로 넘치고 있다. 어느 외국인의 서울에 대한 인상이 생각난다. 서울의 어디를 가나 공사장같이 파고 있고, 파헤쳐져 있다고 한다. 살아 몸부림치는 도시이다. 몇 년을 가도 모습이 변치 않는 완성된 도시가 아니라 변해 움직이는 도시이다. 몇 년을 지나 방문하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변하고 있는 도시이다.

드디어 서울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차분히 반성하고, 잃어버리고 묻혀버린 과거를 찾아내고 있다. 서울을 하루아침에 천국과 같이 만들 수도 없으며 도시는 결코 천국이 될 수도 없다. 완성된 도시도 아니고 완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비관도 낙관도 있을 수 없는 도시이다. 결국 도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살아야 할 주인도 사람이다. 세계 역사 속에서 수없이 태어났다 죽어간 위대한 도시들처럼 의지와 꿈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21세기를 향한 생존과 승리

서울이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서울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도시는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도시는 인류가 창조한 문명 그 자체이다. 도시가 없는 문명은 존재할 수 없었고 위대한 문명은 위대한 도시를 만들었다. 제이콥스 교수는 「도시와 국부」라는 저서 속에서 한 시대, 한나라의 경제적 번영은 그것을 끌고 나간 위대한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즉 도시는 국부의 원천이고 종국적 표상이라고 하였다. 중심도시가 죽으면 지역이 죽고, 국가를 대표하는 도시가 쇠퇴하면 국가경제도 쇠퇴한다는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특별보좌관이고 유럽개발은행 총재를 지낸 바 있는 아탈리는「21세기의 승자」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한 위기가 끝나고 바로 그와 같은 흥망성쇠가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에 있다........ 세계경제에는 언제나 경제활동에서 심장부 구실을 하는 중심 도시가 있게 마련이다. 뉴스·상품·자본·신용·인력·교육·통신 등 모든 것의 흐름이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도시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들은 서로 대체해 갔으며 역사의 고요한 흐름을 깬다......... 반드시 풀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어느 지역 혹은 어느 도시가 중심지로 될 것인가를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점이다.

-자크 아탈리 저, 유재천 역,「21세기의 승자」 중에서

아탈리 박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중심도시가 필요하다. 국제화·개방화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으며 오늘과 같은 산업경제 구조로서 우리나라는 21세기의 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보드레스' 시대가 전개되고 있으며, 정보화·첨단화·광역화·지방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울이 죽으면 우리나라가 죽는다.

서울은 오늘날처럼 거대한 시골도시로 남을 수 없다. 통일의 무국경 시대를 대비해야 하고, 정치·경제적 '블록화'에 주역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대·환태평양시대·지구화시대를 향한 서울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과 우리나라가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관동권(동경-요코하마), 관서권(경도-대판-신호), 북구주권(복강-북구주)와 우리나라 수도권이 경쟁해야 하고, 중국의 북경권(북경-천진), 상해권(상해-남경), 주강삼각주 (홍콩-심천-광주)와 수도권이 경쟁해야 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단 개발의 삼각지대(싱가포르-조호두-바람)이 꿈틀거리고 있고, 러시아·북한·중국이 접경한 두만강 하구에 새로운 국제화의 거점이 개발되고 있다. 누가 21세기의 주역이 되느냐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서울은 이미 우리나라의 수도를 넘어서고 있다. 초국토적 발상이 필요하고 국가간의 경쟁으로부터 거대도시권간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보드레스' 시대를 맞이한 초국경적 도시화에 전략적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 북경-서울-동경을 잇는 베세토(BESETO) 시대에 주역을 담당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공항, 항만, 고속철도망을 짜야 하고 국제업무 기능의 강화와 시설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의 양식과 시민의식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며 시정개혁과 제도적 쇄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울만이 잘 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울이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것은 지방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정말로 서울적인 것은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당위성에 대한 해답은 서울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자문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