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신촌에서 부는 초록 바람 녹색갤러리

- 이제하의 '말과 바다와 여인전'




조은희 / 시인

차세대를 위한 녹색갤러리 출범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한 일명 로데오 거리로 일컬어지는 지역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젊은이들이 신촌을 기점으로 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기사를 자주 보게 된다. 대학이 밀접해 있는 신촌 일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젊은이들은 발랄하고 산뜻하고 눈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들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소위 '우리 것'과는 거리가 먼 만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도 한다.

이러한 우리 생활문화와 예술과의 괴리감을 직시한 탓일까. 인사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화랑가들이 차츰 그 반경을 넓혀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며, 예술과 일반인들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촌 일대에 화랑들이 부쩍 많이 늘어난 것 또한 그런 의미에서 고찰하면 분명 청신호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최근에는 활동중인 작가들의 작품이 미술품을 관람하는 숫자의 증가와는 반대로 상당히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인들은 그림을 통해 표출되는 시각 언어를 판독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채, 과거 학교 교육을 통해 습득한 경직된 시각 언어에만 집착하는 모순된 현상을 답습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화랑은 이러한 현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예술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할과 예술품과 독자와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제공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촌에 출현한 녹색갤러리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녹색갤러리는 지난 1992년 6월 29일 건물을 신축하고 '차세대를 위한 갤러리'로 출범했다. 1988년 11월에 개관한 후 1989년 12월 갤러리 건물 신축을 위하여 잠시 휴관하게 되던 기간까지도 녹색갤러리는 오로지 기획전과 초대전만을 해 왔다.

'차세대를 위한 갤러리'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녹색갤러리의 운영지침에는 한국 화단의 미래를 짊어질 역량 있는 젊은 화가들을 선정,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 이것은 녹색갤러리의 대표이자 화가인 정상명씨의 의지이기도 한데, 그녀는 자신이 그림 공부를 할 당시 작품세계의 불확실성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는 젊은 화가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고 한다. 그들의 고민은 또한 같은 길을 가는 그녀의 고민이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그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작품에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는 말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전시회를 열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재능 있는 젊은 화가들을 엄선한 기획·초대전의 형식으로 녹색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눔에는 정신적인 나눔과 물질적인 나눔이 있을 겁니다. 예술 작품은 정신의 소산이고, 또한 인간을 정화시킬 수 있는 위대함이 있지요."

녹색갤러리는 그 동안 주로 동양화·판화·서양화·설치 등을 다루었으며, 특별기획 전시에는 매번 좌담과 토론을 곁들였다. 또한 만레인·키아·피카소·자코메티·고흐·타피에스·칸딘스키 등 해외의 유명한 작가 30여 명의 '유럽 포스터전'도 기획해서 관객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개인의 독특한 목소리와 시각으로써 한국 화단의 중심축을 이루어 가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해 왔다.

녹색갤러리의 전시장 평면도는 다음과 같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를 위해서 정상명씨는 팜플릿을 제작해서 배포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전시회를 마무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직접 주관하며 작가와 일반인들과의 만남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거리를 걸을 때도 차 소리나 기타 소음에 섞여서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발자국 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지요. 그러다가 어쩌다 미술품 감상을 하기 위해 화랑을 찾을 경우 정숙한 전시장의 분위기 때문에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대부분 경직되지요. 때문에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굳어 있는 상태에서 예술품을 감상하게 되고, 그것이 일반인과 예술품과의 거리를 벌리는 한 원인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재능은 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젊은 화가들을 대상으로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녹색갤러리는 마포구 서교동 405-6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전화번호는 323-4941이다.

이제하의 '말과 바다와 여인전'

녹색갤러리의 1993년도 마지막 전시를 장식한 화가는 이제하씨이다(12월17일부터 12월 23일까지). 경남 밀양에서 출생,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조각을 전공한 이제하씨는 시인이자 소설가로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 문학상(「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과 한국일보 문학상(「광화사[狂畵師」)을 수상한 바 있는 이제하씨의 개인 전시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11년만의 전시회인 만큼 화제가 되었는데, 이번에 전시한 작품들은 모두 소묘로 최근에 출간한 그의 산문집 「바다」의 내용들을 그림으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바다」를 발간한 도서출판 산책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도서출판 산책이 강원도 춘천에 소재한 지방 출판사라는 점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지역문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중앙과 지역간의 거리감이 엄청난 현시점에서 (특히 편집 대행을 해 주는 출판사를 제외하면 지방에는 이렇다 할 출판사가 없는 현실에서) 지방 출판사와 중앙의 예술인과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점 등은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좋은 사례가 될 만하다.

이제하씨의 소묘 작품들은 맑고 담담하면서도 강렬하다는 인상을 짙게 풍겨 주었다. <적설(積雪)> (종이 위에 크레용·과슈) 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듯 산과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또는 산과 하늘의 중심이 되고 있는 듯한 말과 여인의 이미지 대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밖에도 이번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한 <말과 바다와 여인>(종이 위에 연필) 또한 지평선 위로 치솟은 말의 머리와 나신인 여인의 얼굴, 나무 등이 어우러지며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이제하씨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미의식과 윤리 의지 사이의 경계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번 전시회를 생활과 연결시키면서 '날품팔이로서의 그림'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반대의 의미로는 "동굴 벽에 홀로 뭔가를 개발새발 그려보던 원래의 소박한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표현했다.

녹색갤러리의 열린 공간을 채운 작품들

그 동안 녹색갤러리를 거쳐간 젊은 화가들은 무수하다. '다섯 가지 사유전'을 비롯, '30캐럿전', '박지숙 작품전', '김유신전', 정현주 제2회 개인전 '뜰 만들기', '장태식 작품전', 최선호 개인전 '적적(寂寂)', 장기범 개인전 '사자의 뒷모습' 등.

'다섯가지 사유전'(1993년 3월 19일 - 3월 31일)에 참가한 작가들(김택상·박기원·홍승혜·이지은·천광엽)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서 새로움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했다 "새로움이란 말처럼 진부한 것도 없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움이란 말처럼 매혹적인 것도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사유전'이란 전시회의 제목에 걸맞는 김택상씨의 <마음의 무게>나 박기원씨의 <Untitled>, 홍승혜씨의 <마을> 등 모든 작품들이 개성과 무게를 함께 표출한 것으로 관계자들은 평가했다.

'30캐럿전'(1993년 4월 1∼4월 11일)은 여성미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이른바 페미니즘 계열의 전시회라고 할 수 있겠다. 서른 살을 전후한 여성 작가 10명 (김미경·박지숙·안미영·염주경·이승연·이현미·임미령·최은경·하민수·하상림)이 참여했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바뀌면서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자칭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여성의 정신적·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는 현실적인 이념과 어울리는 주제의 작품들이 운집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던 '30캐럿'은 갇힌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이나 해방, 또는 현실로부터 얻은 상하고 억눌린 이미지들이 혹은 불안하게 혹은 과감하게 솟구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그 한 예로 안미영씨가 출품한 <비밀의 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붉은 벽 모서리가 두드러진 공간속에 하반신만 남아 있는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의 하반신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수 있는 장끼가 앉아서 쉬고 있다. 그리고 모서리가 두드러진 벽을 흘러내린 보라빛의 천은 그림의 분위기를 더울 불안한 쪽으로 몰고 간다.

이승연씨의 작품<태초로부터……마음에는 성의 구분이 없다>역시 같은 라인에서 이해가 가능한 작품이다. 화폭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강렬하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는 갇혀 있는 대상의 들끓는 욕구 불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강한 만큼 분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아슬아슬하다. 이들뿐만 아니라 출품된 거의 모든 작품들이 외부로부터 억눌린 이미지들의 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등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도 특기할 만한 전시회로는 이인·이철수·최선호·최병민·조인구씨 등이 참여한 '정신주의전'이 있다. 1993년 9월에 열려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던 이들의 전시회는 정확하게 표현해서 '우리 미술의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있겠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예술의 영원한 위대함이지만, 오랜 세월을 이겨내는 위대한 정신의 산물인 훌륭한 예술품은 그 양적인 면과는 상반된 현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신주의전'에 참가한 작가들의 작품이 우리 화단의 정신주의적 경향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오늘을 살며 촉수를 민감하게 곤두세운 젊고 역량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은 정신의 위대함을 향한 다양한 통로와 방법론을 모색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 예술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

사람들이 창작행위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감지하지 못하는 세계, 그 무궁한 세계에 대한 탐구가 바로 예술행위일 것이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그림들은 그 때문인지 평범한 그림과는 첫눈에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중섭의 작품 세계도 자신의 무의식을 열심히 응시한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녹색갤러리의 전시회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예술,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전'이라 할 수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인간·예술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전'은 정신병 환자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예술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들을 골라 전시회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 임상예술학회가 주최하고 아트매니지먼트 미술통신이 기획.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예술, 또는 인간과 삶을 연결하는 진정한 통로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머리 속에 만든다. 그들은 산을 즐겨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지만,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은 '어둡다'는 것이다.

또한 무의식의 원형질을 거침없이 내보이는 만큼 그들의 그림은 강렬하다는 인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녹색갤러리에서는 이들의 전시회와 함께 과거 고(故) 이중섭 화백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유석진 박사)를 초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중섭 화백의 이런저런 일화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밖에도 이부영·이규도·김종수씨 등 많은 미술 관계자들이 참여, '화가 이중섭의 작품과 정신 세계'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가졌다.

고도의 사진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 사람의 작품세계가 한권의 화집으로 묶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책을 통한 피상적인 감상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원작품과 비교해 보면 왜 허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미술 작품의 감상이란 개체인 감상자와 작품사이에 발생하는 시각적 대화이다. 많은 사람들의 미적 경험을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바로 그 자리에 화랑들이 있다. "그냥 살아지는 인생이란 무감각하다."(윌버마샬 어번)

아름다움에 중심축을 두고 살아야 흔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