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해

책의 해를 되돌아보며 느끼는 것




최태원 / 출판평론가

지난 1993년 한해는 독서를 권장하는 일로 출판계는 물론 정부와 언론이 한 목소리를 냈고, 독자들의 관심 또한 여느 문화예술의 해보다 컸던 게 사실이다. 정치·사회적 대형 사건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차분히 치러져야 할 책의 해가 다소 어수선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바탕 책 잔치를 벌인 지난 한해였다. 산업적 측면에서 책의 해가 출판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따짐과 동시에 지난 1년을 통해 우리 출판의 문화적 성장이 얼마나 이뤄졌는가를 동시에 짚어봐야 한다. 이런 작업은 책의 해를 마감하는 절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가올 무한정의 '나머지 해'들을 위한 일종의 계획서라는데 무게 중심이 실려 있어 더욱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책의 해는 출판의 산업적 측면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미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판매량을 증가시키지도 못했고, 업계의 성격을 변화시키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책의 해가 출판 산업에 미친 영향은 극히 표피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산업적인 면이 그렇다면 출판 문화의 질적 향상 유무의 판단은 어떠한가. 그 자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중적 독서의 수준을 가늠하고 독서 패턴이 어떻게 조성되고 흘렀는가를 진단하는 잣대로 사용함직한 베스트셀러 점검을 통해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반적인 출판 흐름을 읽어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

많이 팔린 책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듯이, 베스트셀러만으로 1년 동안의 출판과 독서 흐름을 파악한다는 건 무리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얻어낸 베스트셀러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책의 해였던 지난 한해에도 어김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은 작성되었고, 수많은 화제가 뿌려졌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목록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순위가 아닌, 그 책이 팔리게 된 이유와 그를 토대로 출판방향을 정하는 일일 것이다.

먼저 지난해 베스트셀러의 판도는 그 이전 2∼3년과는 판이한 변별점을 갖는다. 작년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진 점은 열풍으로까지 표현되었던 역사인물 소설류의 세력이 급작스레 수그러졌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 동의보감」이후 '소설'자를 제목에 삽입 한 수십 종에 이르는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 출판된 그 아류들이 함량미달이란 지적을 받으면서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후 국내소설의 경우, 작품성이 놓은 책들이 득세했고, 괄목할 만한 이런 현상은 지난 1년 동안 계속되었다.

특히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출판된 지난 1967년 이후 근 30년 만에 수필집이 베스트셀러 종합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해 수필집의 화려한 재기를 보여줬다. 비소설 분야에서 작년은 재벌 기업가들의 자서전과 한국적 경제학을 외친 이면우 박사의 「W 이론을 만들자」나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의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등과 같이 특이한 체험을 지닌 사람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대개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었다.

반면, 지난해 비소설 부문에서 눈에 띄는 성가를 올린 책들로는 '논리야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반갑다 논리야」와 요즘 독자들의 교양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꼽을 수 있다. 이처럼 한데 뭉퉁그려 묶을 수 있는 붐이 조성되었다기보다는 다양한 성격의 책들이 독자의 다양한 욕구와 맞아떨어져 판매고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소설과 비소설 분야에서 예년과 다른 현상이 돌출되었다면, 시에 있어서는 8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중 시집들의 권좌 지키기가 여전했고, 명상류의 짧은 글 모음들도 마찬가지로 인기를 얻어 실망을 안겨줬다.

이 가운데 지난해만의 특징은 위기철씨의 「반갑다 논리야」 전 3권과 석용산 스님의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가 서울시내 대형서점 집계 결과 1위와 2위에 랭크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된 대로 수필집이 1백만 부에 가까운 판매량을 보였고, 상식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부적당할 것 같은 논리학서가 2백만 부 이상의 밀리언셀러가 된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된 「반갑다 논리야」시리즈는 수능시험 발표와 때를 같이 해 출판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학습과 연관성을 지닌 단행본의 성공 케이스로 남을 것이다. 또 이 책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초중고 학생독자는 물론 일반독자들 까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독자층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간 이 책을 통해 출판의 외적 요인이 베스트셀러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새삼 깨닫게 했다. 딱딱하기 그지없고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 철학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우리 출판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외국에서도 실례를 찾기 힘든 사건에 속한다. 우리의 넘치는 교육열을 실감케 하는 책이 또 있다. 하버드 졸업생 홍정욱씨의 유학기 「7막7장」이 화제의 책.

지난 1992년 10월에 출판된 「여보게 저승갈 때…」는 세기말을 사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한가를 증명한다. 승려생활 중에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들을 꾸밈없이 담백하게 써 한 권의 책에 담고 있어 바로 그런 점이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두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내용이 독자들의 관심사였다는 점도 있겠지만 출판사의 적절한 광고·홍보 전략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단행본의 꽃이라 수 있는 소설 분야에서 부각된 점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번역 소설보다 국내 창작소설이 강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인물 소설이 득세했던 것과 달리 문단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베스트셀러 그룹을 이끈 것은 특기할 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판매량으로 따려서는 지식인 소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청준씨의 「서편제」가 단연 앞선다. 그의 대표작도 아니고 대중적인 작품도 아닌 이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건 영화의 흥행 성공에 편승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방화사상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의 성공은 책 「서편제」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절대적인 계기가 됐다.

한편 두 신예작가의 소설도 주목을 끈다. 탄탄한 문장과 감성을 자극하는 분위기를 가진 「풍금이 있던 자리」의 신경숙씨와 이인화란 필명으로 두 번째 소설 「영원한 제국」을 낸 평론가 류철균씨. 이 두 작가는 작품성과 대중성이 별개가 아닌 공존의 덕목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점에 주목에 값한다. 「풍금이…」가 문학에서의 이념성 대립으로 갈등을 집어왔던 80년대를 마감하고 이데올로기가 무관심의 영역으로 물러앉은 90년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면, 「영원한 제국」은 소재와 기법에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서정적 작품과 실험성이 강한 정반대의 작품이 함께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조 독살설을 소재로 추리기법을 차용한 「영원한 제국」과 함께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의 의문사를 다룬 김진명씨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그리고 한·미·일 3국의 치열한 국가간 이해관계를 마치 신문의 행간을 읽듯이 써내려간 이명행씨의 「황색새의 발톱」은 향후 90년대 문학의 방향을 가늠하는 가늠자로 읽힌다. 국내 소설의 이 같은 흐름은 다분히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미국 번역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또 한가지 어떤 류의 책이 붐을 이뤄 잘 팔리던 현상이 이제는 독자의 관심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다양화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다원화 현상은 시장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베스트셀러는 소설 분야에만 국한된다는 그 동안의 상식을 뒤엎고 다양한 분야의 책이 소비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예로 경제·교양 등의 분야에서도 밀리언셀러에는 못 미치지만 소설 버금가는 판매량을 올리는 책들이 다수 선보이고 있는 게 요즘의 서점가 현실이다.

작품성이나 출판물로서의 완성도에서 그 수준이 예년에 비해 높아졌다는 점에서 책의 해에 배출된 베스트셀러가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출판의 전반적인 흐름은 아직도 질적으로 답보상태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함량미달의 조악한 출판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물론이고, 모방출판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책의 해를 맞으면서 기대했던 상식적 의미의 양서출판 활성화가 기대치에 전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양서출판의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앞서 말한 대로 외국의 예도 그렇지만 그건 도서관의 힘을 빌어야만 실현이 가능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장사는 안되는 책이지만 반드시 출판되어야 할 책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책들은 도서관이 기본 부수를 구입해 줘야만 출판될 수 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책의 해에도 우리 도서관의 도서 구입비는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했고 실질적으로는 퇴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울 시내 일부 공공도서관의 월 도서구입비가 50만원에서 심지어는 10만원에도 못미치는 곳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상태로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를 부르짖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읽을 만한 책을 갖추지 못한 도서관을 시민들이 이용할 리가 만무하고, 게다가 그 알량한 도서 구입비마저 제값을 못한다고 한다. 일부 도서관의 수서 업무는 액수에 맞춰 제멋대로 책을 골라 납품하는 업자들이 도맡다시피하기 때문이다.

산업적 차원에서나 문화적 수준에서 큰 진전이 없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책의 해를 보는 전혀 다른 시각도 있다. 그것은 어차피 문화예술의 해가 이벤트로 꾸며지는 축제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다. 과연 행사들이 잘 치러졌는지를 통해 그 성과를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다른 문화계에 비해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출판계가 책의 해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와 함께 이 논리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따지고 보면 불과 1년 동안 특별한 예산도 없이 출판계가 얼마나 변화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책의 해 조직위원회가 주축이 돼 펼쳤던 책의 해 관련 행사들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결산 작업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책의 해 행사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은 역시 '93 서울도서전 개최일 것이다. 지난해 5월 7일부터 1주일 간 한국종합전시관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서울도서전은 책의 해에 열린 것인 만큼 규모면에서나 구성면에서 그 동안의 도서전과는 사뭇 다르게 짜여져 눈길을 끌었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1천7백여 개 출판사의 30여 만 종에 이르는 방대한 출판물을 한자리에 모아 예년 관람객의 3배 수준인 무려 53만여 명의 관람객을 유치한 지난해 서울도서전은 또한 유수의 외국출판사들을 초청해 국제도서전으로의 격상을 예고했다는 점에서도 주목에 값하는 잔치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매해 열리고 있는 서울도서전과 달리 8월27일부터 10월31일가지 전국 5대 도시에서 개최된 지방순회 도서전은 지난 1981년 이후 중단되었던 행사를 책의 해를 기해 부활시킨 것으로 그의미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3백여 출판사와 그 지방의 서점들이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특별코너를 마련해 치른 지방 도서전은 단순히 없어졌던 행사 하나를 다시 실시한 것이라기 보다는 문화의 중앙집중화 현상에 의해 상대적인 문화적 박탈감을 지니고 있던 지방 독자들의 오랜 목마름을 해갈시켰다는 데서 그 의미를 짚어볼 수 있었다.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지방독자들의 소외감을 덜어 준 행사가 또 있었다. 지난해 6월 19일 전국 15개 지역에서 동시에 펼쳐진 '저자와의 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행사는 모두 15명의 작가와 지방의 독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진지한 대화의 장을 펼침으로써 독서욕구의 창출을 유도했다. 지방도서전과 함께 이런 행사들은 지방 독자들을 위해 책의 해가 끝나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개최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독자들이 중앙의 독서 패턴을 무조건 따라가는 게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도서전과 저자와의 대화 같은 단발성 행사와 달리 1년 동안 정기적으로 펼쳐온 책의 해 행사도 여럿 된다. 책과의 친근감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기획한 '책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도 그런 행사. 명저와 관련된 국내외의 유적지를 찾아가서 전문가들의 안내를 통해 책과의 또 다른 만남을 맛보게 한 이 프로그램은 명저의 산실을 독자가 직접 발로 밟아보는 설레임을 제공해 큰 호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한편 조직위원회는 달마다 책과의 인연이 깊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을 책의 인물로 선정해 시상하기도 했으며,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책 정보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개설한 '책을 찾아드립니다' 전화 개설과 '도서 음성정보 서비스'도 지속적인 책의 해 프로그램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난 1년 동안 벌어진 책의 해 행사는 무수하다. 그 가운데 우리 인쇄·출판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두 차례에 걸친 특별전시회도 책의 해를 빛낸 행사로 기록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전 EXPO개최와 때를 같이 해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열린 '고인쇄 특별전'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1월 8일부터 12월17일까지 계속된 '한국의 책문화 특별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 교과서에서나 봐 오던 우리의 전적문화재를 직접 확인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 전시회로 기억될 것이다.

책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는 조직위원회에 의해서만 치러지지 않았다. 관공서·기업체 등 각계에서 다양한 형식의 행사를 마련해 그 뜻을 기렸다고 할 수 있다. 독서휴가제나 연수제 등과 같이 실질적인 독서운동을 펼친 기업들도 있었으며, 구청 등에서는 지역별 책 교환시장을 통해 독서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신문·방송 등 언론매체 들은 특집을 기획해 책의 해 홍보를 자발적으로 앞장서기도 해서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출판계는 보고 있다.

또 한가지 책의 해 행사를 열거하면서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이 대학로와 지하철역 등에서 열렸던 '구간명저 판매시장'이다. 얼핏 생각하면 책의 해를 핑계삼아 재고도서를 처분하려는 얄팍한 상술 정도로 오인할 수도 있는 이 행사에 의미부여를 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우리의 경우 책 유통구조가 신간마저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상수도에 비해 하수도가 부실한 구조를 갖고 있어 독자들이 재빨리 신간을 구입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어 있어서이다. 그래서 이 구간 명서 시장을 통해 독자들은 구간이지만 읽고 싶었던 좋은 책들을 구입할 수 있었고 출판사들 입장에선 경영압박의 원인인 재고의 부담을 덜기도 했다. 이 행사 이후 출판계에선 정기적인 구간시장 개장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재고도서 판매시장을 마지막 예로 든 것은 바로 이 경우처럼 책의 해를 즐기기만 하는 소비적인 축제가 아닌 보다 나은 출판계 조성을 위한 디딤돌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93 책의 해는 조직위원회를 비롯해 출판계 안팎의 지난한 노력과 수고에 힘입어 무사히 치러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된 것처럼 불황은 여전하고 시장개방은 목전에 다가온 답답한 현실에 처한 출판계의 숨통을 틀 계기로 삼지는 못했다는 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조속한 타결이 예상되는 현시점에서 시장개방은 예상보다 빨리 우리 출판·서점계를 향해 파고를 한껏 높인채 밀려오고 있다. 이미 미국의 유명출판사들이 외서 수입 업계를 탈법적으로 잠식하고 있고, 일본의 대형서점들은 한국내 시장조사를 마치고 조만간 체인망을 개설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적이고 부실한 유통망을 가진 우리 출판·서점 업계는 아직도 아무런 자기 보호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새해를 맞으며 출판계가 고민해야 할 일은 또 있다. 점점 깊어지는 불황의 골을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를 생각을 해야 한다. 독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뛰어난 기획력을 가동하지 않으면 멀어지는 독자들의 발길을 잡아둘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독자 탓만 되뇌이고서는 미래가 결코 밝지는 않다. 미국이 '독자의 해'를 정해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독서 붐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출판계가 어떻게 분위기를 조성해 독자를 창출하느냐에 따라 책읽기에 중독된 일본인들은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날이 앞당겨질 것이다. 책의 해는 1993년 1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독서주간에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