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무속축제
황루시 / 관동대 교수
우리나라의 무속문화와 동북아시아와의 비교·연구는 최근 들어 만주·몽고 지역의 답사를 통해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의 무속문화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캄보디아·미얀마처럼 사회주의 국가의 민속은 거의 백지에 가까운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민속문화는 현장을 직접 답사해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니 과거 식민지시대에 제국주의 국가의 학자들이 써 놓은 글을 간혹 접한 것으로 짐작 해 왔다. 버마족이 중심이 되어 있기에 과거 버마라고 불려 왔던 미얀마 역시 1962년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래 상당 기간 동안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해 온 나라이다. 외부로부터 오염이 안 된 신선한 문화가 남아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어 지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공부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2년 11월부터 외국인에게 2주간 관광비자를 주고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제법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비로소 현장답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체제기간이 짧아 충분한 조사는 할 수 없었지만 중요한 무속축제의 현장을 직접 보았으니 내용은 실속이 있었다 하겠다.
연인원 3백만 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무속 축제
미얀마에는 1993년 8월 21일부터 9월 1일까지 열이틀 동안 머물렀다. 필자가 참여·관찰한 대상은 타운봉 형제신굿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데, 일종의 마을굿이면서 전국적 규모의 축제였다. 버마 달력으로 8월 8일에 시작되어 보름날 끝난다. 우리나라의 강릉단오제나 은산별신굿과 비슷하지만, 훨씬 규모가 크고 전국에서 1만 명이 넘는 무당들이 몰려와 굿판을 벌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이 절대적인 무속적 축제이다. 또한 신앙심의 열기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대단하여 자발적인 참여없이 단순한 행사로 치루어지는 우리나라의 축제문화와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답사 내내 나는 눈을 반짝이며 모든 것이 상당히 흥미로왔다. 하지만 이제 답사내용을 정리하려니까 매일 바지를 짜서 입어야 할만큼 끔찍했던 더위가 맨 먼저 떠오른다.
방콕에서 미얀마의 수도인 양군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40분 거리이다. 21일 오후, 지루한 수속 끝에 의무적으로 2백 달러씩 환전하여 공항밖을 나오니 우리 짐을 받으려고 에워싸는 남자들이 모두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론지라고 하는 전통의상이라는데 태국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여자들 역시 론지를 입었을 뿐 아니라 모두 뺨과 이마, 콧등, 그리고 때에 따라 양팔에까지 흰 분을 칠하는 화장을 하고 있다. 너무 더운 곳이니 타지 않게 하려 함일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지키는 이곳 문화가 왠지 아득한 과거에 불시착한 느낌을 준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서구화된 인간인가.
덥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차로 열네 시간을 올라가 만달레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호텔을 잡고 통역 겸 안내인을 구했다. 기차표와 호텔값은 반드시 공항에서 1달러당 6.3자트로 바꾼 외국인용화폐를 써야 한다. 하지만 나머지는 내국인들이 쓰는 돈으로 지불이 가능한데, 은근한 택시운전사를 통해 암시장에서 1달러당 1백10자트로 바꿀 수가 있었다. 안내인이 하루 3백자트, 그리고 차가 하루 1천5백자트였다.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만달레이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타운봉은 평소 약3천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일년에 한번 타운봉축제가 벌어지는 때에는 하루에 아마도 20-30만 명 이상이 들끓는다. 전혀 아무런 통계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마을 안에 있는 절과 타운봉 마을 형제신의 신전을 관리하는 쪽에서 축제기간 동안 임시로 가설한 가게를 임대해 준 숫자를 감안하여 추측하면 대강 그쯤이 아닐까 하는 것뿐이다.
가게 수는 약 7-8천 정도인데 그의 거리의 노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모두를 줄이고 줄여 1만명 정도라고 보면 길마다 사람이 넘쳐 어깨를 스치지 않고는 단 한걸음도 걸을 수 없는 타운봉 전체를 생각할 때 적어도 20만 명을 넘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가게는 한달 동안 세를 주지만 실제로 장사가 되는 기간은 굿을 하는 일주일을 포함하여 보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연인원 약3백만 명 이상이 모이는 축제이니 가히 세계 최대의 무속축제라고 하겠다.
타운봉 축제에서 모시는 신은 스에핀지, 스에핀레이라고 하는 형제신이다. 둘은 모두 힘이 장사이며 술 먹고 담배 피고 여자와 희롱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나라타 왕이 통치하던 파강왕조 시절 중국에서 불경을 싣고 오던 코끼리가 바로 이 타운봉 마을에 멈추어서 가지를 않자 왕은 이곳에 절을 짓게 했다. 그런데 일을 맡은 두 형제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이어서 왕의 명령을 태만히 하였다. 보고를 받은 왕은 형제에게 매를 때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평소 형제를 미워하던 집행인은 이들을 때려 죽였다. 기록에 의하면 형제는 성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타운봉축제는 신의 성격을 재현하는 듯 매우 유흥적인 분위기이다. 지나가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술에 취해 있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언제든지 싸움을 걸 듯한 자세이다. 특히 지나가는 여자들의 엉덩이를 때리고 희롱해도 너무 지나치지 않는 한 용서되는 난장판이 바로 이 굿의 특징이라는데, 지금도 굿판에는 형제신에 못지않은 난봉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여자들이 갈 만한 장소는 못 된다고 하나 신앙심은 여자가 더 강한 법이어서 반드시 신에게 공물을 바치러 한번은 오게 마련이다.
미얀마는 전통적으로 불교국가이다. 하지만 불교는 사후의 세계나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담당하고, 산 사람의 길복을 담당하는 것은 낫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무속신앙이다. 무신을 낫, 굿을 낫페라고 하는데 사람이 죽거나 아플 때 하는 굿은 전혀 없다. 그런 경우에는 모두 절로 간다는 거이다. 따라서 굿은 마을이나 개인의 길복을 추구하는 일종의 재수굿만 존재한다. 무속신앙의 성격은 불교에 비해 본능이 존중되고 무당굿에는 춤과 술과 노래가 있어 유흥적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이 둘을 모두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양면성을 진솔하게 긍정하는 것일 게다.
워낙 미얀마에는 수많은 낫이 있었다. 11세기에 미얀마에는 파강왕조가 들어섰고 아나라타란 유명한 왕이 신의 숫자를 37개로 제한했다. 이들은 당시 유력한 지역이나 마을에서 모시던 신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의 이름은 다소 변동이 있었지만 37이라는 숫자는 고정되어 내려왔다. 하지만 이는 전국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의 숫자일 뿐이고 지금도 지역과 마을에 따라 더 많은 신들이 존재함은 물론이다.
낫의 성격은 왕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웅들이 후에 신으로 추앙되는 경우와 신에 의해 선택되어 죽음을 당한 뒤 낫이 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대개의 미얀마의 가정집에서는 문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에 마하기리란 신을 모신다. 마하기리는 대장장이였는데 그의 힘을 두려워한 왕에 의해 잡혀 불에 타 죽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수분이 많은 코코넛 열매를 바쳐 미하기리를 위로한다. 또한 메이잔이라는 신은 도둑의 마누라였는데 욕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어느날 왕이 시찰을 나왔는데 메이잔은 왕에게도 심한 욕을 퍼부어 결국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메이잔굿을 하는 무당은 담배를 한꺼번에 서너 대식 피우고 술을 병째 마시며 아무에게나 욕을 해댄다. 타운봉 형제신도 왕에게 죽음을 당해 신이 된 예이다.
두 번째 경우는 마메우가 대표적이다. 타운봉 형제 중 동생인 스에핀레이는 죽어 신이 된 후에 마메우란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마메우는 이미 결혼한 여자여서 신의 뜻을 받들 수가 없었다. 이에 분노한 동생은 호랑이를 보내어 잡아먹게 했다. 지금도 호랑이가 마메우를 데려가 잡아먹은 동굴자리에 마메우의 신전이 있다. 또한 마메우의 남편인 고엠마는 그를 잊지 못한 마메우에 의해 강에서 죽음을 당해 역시 신이 되었다. 첫 번째 경우에는 권력유지의 차원에서 영웅이 제거된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신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두 번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신에 의한 선택이 결코 일상적인 인간의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8월25일, 아침7시가 아직 안 된 시간인데 타운봉 마을은 입구부터 사람으로 붐빈다. 양옆으로 음식점과 옷, 공예품, 장남감, 꽃을 파는 사람들이 늘어 서 있다. 철로를 지나니 떡집이 이어진다. 수십개의 떡집들을 지나 다시 음식점들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생선가게, 그리고 과일가게가 있고 꽃 파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무당들의 가게가 시작된다.
정식으로 자신의 점포를 대여 받은 무당만 자그마치 4천여 명을 헤아리는데 이들은 임시로 만든 대나무 집에 신전을 차려놓고 점을 치고 있다. 한 가게에 두서넛씩 있는 무당들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는데 역시 만달레이와 양군 무당들이 가장 많다. 대개 좌상인 각양각색의 신상들을 둘러보며 조금 가다 보면 마을 한가운데 절과 형제신의 신전이 있다. 무당집들은 절과 형제신의 신전을 둘러싸고 타운봉 마을의 중심에 늘어 서 있는 셈이고, 그 외곽에 각종 장사치들이 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절에 갔다. 미얀마에는 어떤 신전이든 들어갈 때 신을 벗어야 한다. 목에는 카메라를 메고 오른손에는 녹음기를 들고 왼손에 슬리퍼를 벗어 들고 맨발로 질척대고 걷다 보면, 얄팍한 고무 샌들을 등 뒤에 꽂고 양손을 휘두르면서 태평스럽게 가는 이곳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역시 장사꾼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넓은 회랑을 지나 한참을 가니 맨 끝에 부처님이 계신다. 입구가 둥근 돔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꼭대기의 벽돌 두 장이 빠져 있다. 그것이 바로 타운봉 형제가 절을 지을 때 게으름을 피우면서 일을 안 했다는 증거물이다. 남들처럼 벽돌을 쌓지 않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신전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그들은 다투어 부처님에게 꽃을 바치고 절을 한다.
벽돌 두 장의 현장을 사진 찍은 후 우리는 주행사장인 형제신의 신전으로 갔다. 상당히 넒은 신전은 온통 재스민 꽃향기가 떠돌아 너무나 싱그럽다. 정면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형제신은 노란색 사리를 걸치고 머리는 분홍과 빨간색 리본을 둘렀다. 사람들은 끝없이 찾아와 꽃과 공물을 바치는데 역시 여자들이 많다. 공물은 둥근 쟁반 가운데 코코넛을 놓고 가장자리를 바나나로 둥글게 받친 것이다. 그리고 더빅이라고 하는 파란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바치는데 이는 행운을 주는 나무라고 믿는다. 나 역시 10자트에 더빅을 사서 바쳤더니 형제신을 지키는 사람이 그 나뭇잎으로 신의 가슴을 한번 치고는 도로 돌려준다. 사람들은 신과 접촉한 이 나뭇잎을 집에 가져가서 모셔 둔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하니 거리의 차마다 앞 유리에 이 나뭇잎을 걸어 둔 모습이 떠오른다. 코에다가 흰 칠을 한 사내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구걸하는 할머니와 아이들이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
제의와 놀이와 난장으로 이루어진 축제의 모습은 우리와 비슷
굿은 27일 신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시에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시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설마하고 점심을 먹고 왔다. 와 보니 이미 신전근처는 사람으로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한걸음 옮기기도 짜증이 나는 더위에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 갈 수 있겠지 하면서 시도를 했는데 이건 정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들어가기는커녕 입구에 까지도 다다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안은 이미 철문이 굳게 닫혔고 철문 사이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더빅을 들이밀면 안에서 받아 신의 가슴에 한번 나무를 대주고 다시 돌려주는 일만이 가능했고, 바로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신전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익스큐즈미'를 연발해 가며 안간힘을 써서 어떻게 철문 앞까지 나아가니, 안에서 옆문 쪽으로 오리고 신호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다시 옆문으로 가는 전쟁을 치룬 후 약 3초 동안 문이 열린 틈으로 우리 일행은 기적적으로 들어왔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정신이 멍멍한데 이 와중에서도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넓은 신전은 사람으로 가득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떠나갈 듯한 함성소리만이 광기에 가까운 신앙심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바로 형제신이 모셔져 있는 신단 옆에 서 있게 되었다. 단 아래에는 간단한 제물이 놓여 있고 비좁은 대로 무당들이 온갖 호사를 다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형제신을 모시는 이 무당들은 모두 파강왕조 때부터 세습되어 내려왔다.
그 중 대표는 낫억이라고 부르는 데 반드시 남자만이 될 수 잇다. 그리고 마뷔야라고 하는 여자무당과, 웬지라는 남자무당들이 각각 8명씩 있었다. 또한 굿을 총괄하는 집안은 난데인인라고 부르는 신전관리인인데, 역시 세습되며 경제적인 측면을 맡고 있다 난데인은 신상 바로 아래에 커다란 그릇을 놓고 앉아 사람들이 다투어 내는 돈을 쑤셔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선 신에게 돈을 바친 후 다시 1자트짜리 잔돈을 한묶음씩 하늘 높이 뿌려댄다. 그러면 난데인, 무당,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서로 엎어지며 바닥에 떨어진 그 돈을 줍는데, 이를 행운의 돈이라고 하여 나름대로 표시를 한 뒤에 지갑에 보관한다. 보관기간은 잃어버릴 때까지이다.
드디어 굿이 시작되었다. 먼저 형제신을 위해 미뷔야 둘이 나와 칼을 들고 춤추고 또한 바나나를 칼로 찍으면서 그들이 처음 먹었다는 토끼고기의 식사모습을 재현한다. 소위 신화가 춤추어지는 것이다. 형제신 의례가 생각보다 간단히 끝난 뒤 우민조 신을 위한 굿이 시작되었다. 우민조는 유난히 투계를 좋아했기 때문에 굿을 하는 무당은 황금으로 만든 닭을 들고 춤춘다. 또한 우민조는 재수를 주는 신으로 믿어 무당이 조그만 그릇에 돈을 가득 담고 손바닥에 올린 후 거꾸로 해도 떨어지지 않는 묘기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그릇 안에 돈을 넣으려고 야단들이다. 우민조는 맨 먼저 낫억이 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뷔야, 웬지 순으로 모든 무당들이 한번씩 하는 가장 인기 있는 신이다. 밤이 새도록 이렇게 굿은 계속된다. 이제 굿은 아침 10시부터 새벽5시까지 매일 계속될 것이다.
이어서 타운봉 축제는 신을 목욕시켜 새로 옷을 입히고 (나는 중요한 이 대목을 보지 못했다. 남자 형제신이 목욕하는 모습인지라 어떤 경우에도 여자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제신이 가장 처음 한 식사인 토끼를 잡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진 후, 나무를 베는 의식이 있고 보름달이 뜨는 날 신에게 황금을 입히는 것으로 굿은 모두 끝난다. 그러나 이상의 의식은 형제신의 신전에서 행해지는 것일 뿐이고, 그외의 공간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축제의 시간이 짜여진다. 형제신의 신전에도 타운봉 안에 있는 마흔 개의 개별적인 굿당에서는 하루 종일 전국에서 모여든 무당들이 굿을 한다. 굿판마다 사람들이 넘쳐 열기가 대단하다. 무당은 주로 춤으로 신이 들리고 격렬한 춤 끝에 어느 순간 공수를 주었다. 그러나 무가는 전문적인 사람이 불렀는데 이들은 직업적으로 노래만 부를 뿐 무당과 특별한 연관은 없다고 한다. 굿이 없을 때는 일반가수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굿을 하는데 음악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주로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악기 역시 굿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악사들은 무당패와 별도로 구성되어 굿이 있으면 계약을 하고 굿 음악을 연주해 주는 것뿐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굿하는 방법은 우리와 상당히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여러 신을 무당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모시는 것이나 신의 성격을 음악과 노래, 각종 제스처로 표현하는 것, 사람들이 무당 앞에 나가 서서 두 손을 비비면서 열심히 신의 말씀인 공수를 듣고 절하는 것, 신이 난 사람들이 굿판에 뛰어들어 함께 춤추는 것, 그리고 무당의 머리띠나 가슴에 돈을 꽂아 주는 것까지 비슷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외국인에게 유난히 친절하여 우리는 굿판에서 온갖 음식을 제공받았는데, 쌀로 만든 아주 단 떡들이 바나나 잎에 싸여 있는 것 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술이 병째로 나왔다. 그런데 구경꾼에게 무당이 마구 술을 먹이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여 술을 못하는 일행은 아주 애를 먹었다.
모두 인격신인 낫들은 각기 신이된 내력담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약간의 노래와 춤으로 재현되는 것이 특별히 흥미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것이 많이 생략되어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미얀마의 무당들은 낫카도라고 부르는데 모두 강신무이다. 이들은 신병을 통해 무당이 되는데 이때 무당들은 신과 결혼을 하여 아내가 된다. 만약 남자가 낫카도가 되어 남자신을 모시면 그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서구에 대해 패쇄적인 미얀마에 에이즈가 많은 것은 이런 문화의 탓이 아닌가 보여진다.
식민지·저개발·가난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지켜 온 민간신앙
하지만 물론 굿이 타운봉 축제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일단 신전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무당들의 굿을 보거나 점을 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일부일 뿐이고 더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놀고 물건을 사는 일이다. 이런 유흥에 거의 모든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대개의 남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는 음식점에서 술에 취한다. 밤 열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밤참 시간을 빼고 계속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도 인기가 있고 한편에서는 킥복싱도 벌어진다. 게다가 난장에는 먹거리 외에도 옷·공예품·그릇·장난감·일상용품 등 없는 물건이 없어 다양한 쇼핑이 가능한 것이다.
이 축제는 거의 조직되었다는 느낌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었다. 단지 절을 관리하는 공무원들과 승려, 그리고 난데인이 가게를 세주고 그 돈으로 건물을 보수할 따름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세습에 의해 일을 맡는다. 형제신의 신상을 호위하는 남자들, 토끼를 바치는 집안, 그 집안을 돕는 집안, 심지어 형제신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는 집안도 세습되어 내려와 이들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갔어도 반드시 축제기간엔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드니 저절로 장이 서게 되고 무당들이 모여들며, 결국 더욱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게 당연해진다.
하지만 이 축제를 가능케 하는 핵심은 분명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심이었다. 인간의 본능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죽음을 당한 형제신에 대한 자발적인 신앙심을 토대로 타운봉 축제는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는 아주 가난한 나라이다. 텔레비전도 거의 없고 전기사정도 나빠, 대개의 농촌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자고 밝으면 일어나는 자연 그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생활에서 축제는 오랜만에 일상의 리듬을 깨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평소 어느 정도 자신을 억제하면서 살아오던 이들에게 축제는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해방을 맛보는 거의 유일한 오락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기네 문화를 갖고 있었다. 미얀마 역시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를 겪은 쓰라린 경험이 있다. 게다가 지금의 위정자들은 극도로 부패해 있고 그래서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는 곳이며 북부에서는 반정부군과 내전중인 나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대로 물 한 모금, 밥 한 술, 동전 하나라도 함께 나누는 삶을 유지하고 전통적인 신앙심을 간직한 채 그것을 자랑조차 하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땀을 훔치게 되는 곳에는 반드시 작은 초막이 있고 그 아래 물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매일 아침 새로 찬물을 갈아놓아 길 가는 사람의 목을 축이게 해주는 것이다. 새벽이면 아낙들은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나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스님들이 탁발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수없이 손을 내미는 거지나 어린 탁발승을 모른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얀마의 전통이고 힘이다.
미얀마는 최근 급속도로 개방되고 있다. 국제공항이 새로 세워진지 몇 달 되지 않았다는데 공항 안은 전세계의 고급품으로 넘쳤다. 외국인의 투자도 활발히 받아들이고 있고 여기에 우리나라 대우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전세계에 알려진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협력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 해도, 미얀마의 무한한 자원을 생각할 때 결국 자본주의 국가들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고 미얀마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개방으로 인해 그 나라의 전통이 변질·왜곡되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이미 쓰린 경험을 한 입장에서 기로에 있는 미얀마를 생각하니 타운봉과 같은 축제문화의 유지를 통해 그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