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인식 지평의 국제화·세계화 보여준 소설들

-고종석의 「기자들」과 채영주의 「크레파스」




한기 / 한성산업대 교수·문학평론가

전지구적인 개방화·블록화는 문학과는 무관한 현상이 아니다

근래 세상이 떠들썩한 것은 모두 국제화의 현실 반영 때문이다. APEC이 어떻고, UR이 어떻고, 또 쌀 개방을 피할 수 없다느니, 하는 문제들은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참으로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낯설지 않으며, 이 속에서 지역적인 통합과 분극화의 현실, 즉 지역공동(체)화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인 통합을 넘어서 정치적인 통합까지도 앞두고 있는 EC, 즉 유럽 공동체의 움직임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북미의 자유무역협정(NAFTA)체결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협력기구 모색 등은 우리의 현실과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지역 통합의 움직임들이다.

이는 지금까지 '국가', '민족'등의 배타적인 범주를 경계로 형성되어 왔던 우리의 현실 감각이 크게 확장되어 최소한 국제적인 시야를 확보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 남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현실을 표상하는 말로서 이른바 과거 냉전의 시대보다도 더욱 치열한, 그리하여 국경도 없고 휴식도 없는 매일매일의 '무역전쟁'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요컨대 국제화와 세계화의 보편 경쟁 체제를 벗어나서 이제 우리는 살 수 없게 된 셈이며, 이점에서 문화, 문학 또한 예외일 이치가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세계화하고, 또 그 세계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적절히 적응시킬 때에만 우리의 문화적 몫 역시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그러한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과거 투쟁으로 우리의 문화적 몫을 쟁취(?)해 내던 시대보다도 따라서 한결 어려운 과제를 이제 우리는 이어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확산시켜 내야 할 문화적 대상화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가 품 안에 넣고 인식해 내야 할 현실의 범위가 더 국제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으로 요약·설명될 수 있다. 언어로 말하면 세계어와 보편어 감각을 우리는 가져야 하며, 또한 각기의 민족 언어마다 되도록 많은 전문가들을 가져야 하는 시대적 요청으로서 우리는 이 과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이와 같은 요구에 비하여 아직까지 우리의 문화적 기반은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우리 문화의 국제화·세계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국제한국문학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와 보고문 (「한국문학 해외소개 힘쓸 때」, 중앙일보, 1993년12월2일)을 쓴 바 있는 오세영 교수에 의하면 이 점이 실감나게 드러난다.

도대체가 아직 해외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칠 변변한 교재 하나가 없었다고 하며, 이제야 겨우 영어본 한국문학작품총서와 한국학 입문서의 간행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근래 이문열 소설이 프랑스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 사실일 뿐이며 전체적으로 한국 문학의 해외 소개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외국 문학, 외국 문화의 수용은 상당히 활발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무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문화 수입의 역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텐데, 다행이라면 근래 문화 수용의 코드가 좀더 다양화·다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수입선의 다변화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 수용코드는 미국, 혹은 유럽의 몇몇 나라 것으로 한정되고 있었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편중·편식을 벗고, 동구권이거나 혹은 남미·아프리카·아랍권 등에까지 그 문화 수입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다변화 역시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하며, 더구나 그 수입의 방식이 대체로 번역의 방식, 그 중에도 또 대부분은 이중 번역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자각될 만하다.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의 눈으로 그 대상문화를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해내지 못한다는 현실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우리의 국제적 문화 이해 수준이 아직까지 맹목이나 불구의 상태를 면치 못한 것임을 뜻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해외의 현실에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우리의 체험적 이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우리의 인식, 문화적 가치 의식 전체를 변형시켜 나가야 할 것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이 의미 있는 책이며, 가치 있는 작품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곧 국제적 현실 감각을 넓혀주고 키워주는 책, 그리고 작품이 좋은 것이라는 대답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상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이율배반의 명제 속에 살아온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개방적인 것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진통이 필요할지 측량하기 어렵다.

우리 문학의 국제화·세계화의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문화 의식의 국제화·세계화, 그리고 문학적 현실 인식의 확대·개방이라는 각도에서 최근 발간된 두 편의 소설이 우리의 눈길을 끌 수 있다. 고종석의 「기자들」과 채영주의 「크레파스」가 그것이다. 「기자들」은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기자 체험, 그러니까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유럽의 현실을 직접 보고 취재한, 기자 체험의 기록적 보고 내용을 담고 있다.

「크레파스」는 이에 비해 미국 LA의 한인가라는 국제적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러나 그 인종적 갈등 현실 속에 놓인, 말하자면 한국인의 또 다른 국제적 삶의 면모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외국을 무대로 하여 이방인들 속에 놓인 국제적 현실의 어떤 편모를 드러내려 한 점에서 공통적인 셈인데, 그러나 세부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내보이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다. 간단히 살피기로 한다.

「기자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이름을 안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주로 유럽의 오늘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오늘의 유럽이란 하나의 유럽이라는 개념과 거의 등치이며, 이 기자 연수 프로그램 자체가 유럽 공동체의 형성을 향한 언론 조직의 일환으로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의 구성자가 전세계 언론의 중견 기자들이며, 또한 그 취재 범위가 EC만에 국한되지 않고 좀더 폭넓은 유럽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탈EC, 탈유럽적인 면모를 가질 뿐인데, 그것은 작가의 개인성과 어울려 어쨌든 세계적인 것으로서의 의미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저자의 주된 관심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문화적 환경, 그리고 붕괴된 동구의 제국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모아지고 있는데, 원경이긴 하지만 유럽의 가난한 나라들, 특히 내전 속에 휘말려 있는 구 유고 국가의 참담한 현실은 우리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점이 있다. 통일된 나라에서 동독 사람들이 겪는 참상 역시 우리에게는 마찬가지의 느낌을 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 작품의 대체적인 내용·성격이랄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라면, 유럽의 현실을 직접 몸으로 보고 겪은 사람들에게는 한갓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고 대상의 현실이 가장 최근의, 곧 오늘의 유럽이라는 점에서 정보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며, 더구나 이처럼 유럽을 하나의 세계로서, 그리고 세계사적 변화의 문맥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글은 아직까지-적어도 우리 저자의 손으로서는-유례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소설의 육체성에 의해 동반되고 있느니 만치 오늘날 유럽의 살아있는 모습을 전달하는 진술의 효율성을 얻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반면 그것이 만약 전문 작가에 의해 씌어졌다고 하면 결코 거두기 어려웠을 현장 보고의 생생함을 또한 그것은 갖추고 있다.

황금의 경험 기회, 말하자면 체험의 사회적 형식을 얻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이 누리는 강점의 최대 요인이 있을 것이며, 가치있는 정보의 전달을 주임무로 하는 기자의 손에 의해 씌어졌음으로 말마암아 그것은 최대의 정보 집적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 흔히 작가의 재능이 아니라 소재의 힘이 작품을 써낸다는 것, 이 책만큼 이 명제의 타당성을 보증해 주는 작품도 달리 없다고 생각되며, 바로 이러한 책의 출현 자체가 오늘날 우리 세계의 개방화·국제화라는 측면에서는 하나의 표식이 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유럽 운동이 반사하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지역화·블록화 현실에 「기자들」나름의 세계 인식틀이 마련되고 있다면,「크레파스」는 말하자면 그 인종적 현실에 세계 인식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크레파스」란 다름아닌 인종적 현실의 스펙트럼인 것이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이 인종적 갈등, 곧 흑백 대립의 역사가 뿌리깊은 족적을 가진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인종적 대립이 구조화된 중에 황색인이며, 아시아계인 한국인 2세들이 어떻게 땅에 뿌리박고 뿌리내리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장편이긴 해도 사건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이 위의 물음에 어떤 적절한 대납을 제시하며, 그래서 그것이 미국적인 인종 현실에 깊이 있는 해부를 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 동안 우리네와는 먼 무관한 현실로서 여겨져 왔던 인종적 현실에 소설의 칼날 자체가 겨누어지게 되었다는 점으로 우리는 이 소설을 평가할 수 있으며, 이 시도의 의미만으로 우리는 우리 소설의 국제적 감각 증대를 위한 중대한 일보가 이루어졌음을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의 작업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실패의 가능성 앞에 마주하는 작업일 것이며,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곳에 조금씩 개척의 의미가 놓여지는 것일 터이다.

많은 아쉬움을 지닌 채로 채영주의 이 작업성과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그 소설이 지닌 개척적 의미에 상응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소설 작업은 대상 현실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해에 의하여 뒷받침될 때, 성숙한 작업 의미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호탄 격인 작업 의미란 다음 주자 작업들의 부가에 의해서 더욱 깊어질 것이며, 이 점에서 또한 이미 세계 속에 발 디디고 있는 재외 2세 작가들의 몫을 우리는 크게 기대하게 될 것인지 모른다.

이미 우리속에 엄청난 재외동포의 자원이 있는 것이며, 그 재외동포들은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우리 문화의 국제화·세계화를 위한 첨병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외 동포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대목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