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술 정신이 필요할 때
강성원 / 미술평론가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가 밝았다. 한해를 마감한다는 것이 어느 한해에만 특수한 일이 아닐진데, 해마다 가지는 이런 느낌도 습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한해를 보내고 잊는 것 자체가 역사의 흐름을 일상화하는 삶의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이처럼 벗겨져 쌓여진 삶의 껍질들이 모여 온고지신의 원리가 순리라고 가르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가치척도의 딴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각하기를 멈춰버린 머리처럼, 우리 문화는 어느 시절부터인가 없는 것에서 창조하고, 지나간 것을 보다 생산적으로 정리해 내며, 앞으로 박차고 나가는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비전 없는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인식의 재정비 요구
지난해의 전시들은 이런 면에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막막한 답보상태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작가들이나 중견·원로 작가들 할 것 없이, 사설화랑 기획전이나 공공전시관 행사를 막론하고 내일에의 한국 미술문화의 비전을 제시해 보려고 했거나, 비전에 대한 일말의 인식이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전시들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화랑들은 여타 상품매장들처럼 미술품이라는 상품을 팔고 있다. 옷가게나 전자제품 가게처럼 물건을 파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고가의 물건을 파는 것이다. 물건이라는 어휘보다는 상품을 판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타당한 표현일 것이다. 옷이나 화장품 혹은 일반 생활상품일 경우 그 품질에 대한 평가와 그렇게 등급 매겨진 상품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기능, 즉 값어치는 여하간에 각기 다른 수준에서이지만 분명히 있고, 대중들도 쉽게 그 값어치 내지는 가치의 차이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품의 경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가이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의 생활에 얼마만큼의 실제적 이득(눈에 보이는 이득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간에)을 주는 것인가. 실제적 이득이 아니라도 어떻든 무슨 효용가치가 있는가.
실용가치에서만 따진다면 미술품은 옷이나 장난감, 가구, 가전제품들보다도 그 값어치가 낮다. 더군다나 미술품은 단지 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다. (판화의 경우 조금 다르겠지만 그리 큰 차이는 없다.)
대중일반을 상대로 하는 문화산업도 있다지만, 미술품의 경우 단지 한 사람만 원품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해서 한 작품에 지불하는 대가가 엄청나게 비싸지는 것인데, 이를 보석에 비교해 볼 수 있겠다.
보석이 값어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그 보석의 희귀성과 인간들의 애호 정도일 것이다. 또한 보석에 대한 가치 결정도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준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대개 작품 호수처럼 보석도 크기에 따라 그 값어치가 결정된다. 보석의 가치는 보석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각각의 보석이 지니는 성질과 보석가공의 기술, 동시에 그 희귀성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평가에 따라 결정되는 셈인데, 예술의 어느 장르보다도 미술품에 대한 평가가 바로 이에 비견될 만하다. 이렇게 가공되어 나온 보석도 크게 보아 문화적 산물일 수 있고 인간정신의 산물일 수 있다. 그것을 돈 많은 자가 소유한다는 것이 크게 문제시된 적도 없었을 뿐더러, 문제가 될 것도 그리 없다고 보여지는 것이 크게 어폐 있는 짐작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미술을 예술이라 하고 문화라고 하면서 이런 보석과 견주어 본다면 현재의 미술작품 판매상황이 딱히 반문화적이고, 전적으로 장사꾼들의 일이라고 비판할 여지도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수예술·순수미술에서 무엇을 상정하고 있기에 미술품의 상품화를, 미술품 판매의 산업성을 비판할 수 있는가.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판매하고, 화가들이 좀더 구매력이 높은 작품으로 생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인류의 미술사가 문화의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뛰어난 장식성(결국은 골동품으로 낙착되고, 그 미적 가치의 유일무이성과 전범성이 가격으로 평가되는 그런 문화사도 의미 있는 것일 수 있으나, 이미 이 경우는 순수 예술·문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분리, 예술개념의 변화발전을 위해 18세기 이래 근·현대 예술사와 예술론의 역사는 투쟁해 왔고, 그 투쟁의 역사가 진정한 인류 문화유산으로 전해오고 있다.)을 지녀서가 아니라 인류의 의식과 물질의 인식투쟁, 역사와 사회발전에 대한 인간의식의 반성, 인간의 정신형식에 대한 자의식, 인간내면에 대한 탐구, 미술이라는 인간활동의 본질에 대한 탐구 등 끊임없이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사회·역사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문제들은 결국 정치적인 문제들이다. 문화계 내에서의 이론과 이론간의, 작품과 작품간의, 미술계 내의 이런 저런 제도적 장치들 간의, 법적 규정간의 차이 등을 통해 표현되는 입장과 해석들의 다양성이, 각각의 해석의 승리를 위해 행해지는 숱한 정치적 전략과 전술의 시대적 승패가 결국 문화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근세 이래로 예술의 역사는 바로 이런 과정을 의미했다.
지금은 진지한 모색이 필요할 때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다시 정리해 보게 된 것은 지난해의 전시를 비롯해 지난해 한국미술계의 부진한 활동 성과의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밝혀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느 작가치고 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런 저런 문제의식들을 가지고 고민해 보지 않은 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어느 한 작품치고 이런 고민의 산물이 아닌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면에서 볼 때, 이 고민의 내용들이란 것이 비록 매우 지독한 아픔을 겪은 고민들이긴 하지만, 인간 삶을 읽어내거나 현재의 각자의 삶을 명료하게 파악해 내는 데는 못미치고 있다. 아니면 미술사의 전체인식의 수준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과 따라서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발전적이고도 독창적인 해석의 토대가 마련되지 못함에서 오는 방향상실로 인해 미술의 형식언어에 대한 창조적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론 화상들의 활동도 진정한 문화투쟁의 결과물들을 발굴·수용하고, 그런 작품들이 비록 장식적이지 못할 망정(대가가 장식성은 커녕 '예쁜' 그림들이 아니게 된다.) 인류정신의 발전의 결과물들로서, 문화사적 가치가 보다 더 높은 것이라 인식할 수 있어야 되겠는데, 현재 우리 미술계의 화상들은 거의 전적으로 예쁜 엽서 찾듯 예쁜 그림만 찾고 있는데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화상들의 미와 예술에 대한 인식이 전적으로 바뀌어야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구입시 고객들도 그들이 요구하는 장식성 개념에 변화를 일으켜야 될 것이다. 거실을 장식하는 일반미술품의 경우 얼마든지 상업화상들에게서 예쁜 그림을 구입할 수 있다. 누가 거기에 부정적 입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작품들은 그러나 순수미술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미술사적 예술품은 아니다. 정신들을 복돋우고, 그런 문화적 기념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 상상과 역사의 박물관을 장식할 물건들을 구입할 수는 문화의 창조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에겐 문화상품 창조자로서의 고객은 거의 없고, 화랑들도 거의 예외없이 기껏해야 상업미술품 '나까마' 역할만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같은 현실조건과 더불어 저널리즘, 평론가들의 기능들과 활동들의 부정적 모습과 무지는 우리 미술계를 최악의 늪에까지 빠지게 하고 있다.
지난해의 전시들은 이런 상황들의 단적인 표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공감대 또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미술계 전체에 팽배해 있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고, 지난해의 우리 미술계의 발전 내용이 있었다면 바로 이 같은 위기감의 인정이요,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도기적 모색 단계에 와 있다는 인식의 확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