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안무가 돋보인 두 사람의 무대




김경애 / 무용평론가

무용가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기획하는 공연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안일하게 페스티벌에 끼어서 공연을 하고 실적만 남기겠다는 풍조가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의식의 결여와 연결된다. 한국 창작춤의 분야에서 두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건 기획공연을 가졌다. 문예진흥원의 지원금으로 치루어진 김은리의 무대와 신인 김운미의 공연이 그것이다

김은리의 <신무녀도>

문예진흥원의 창작 활성화 지원금을 받은 김은리의 <신무녀도>는 김동리의 소설을 무용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거 국립무용단 등에서 무대화된, 특히 한국무용 전공의 무용가들이 욕심을 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인공 모화가 무당이어서 토속적인 한국춤사위로 해 볼 만한 인격체로 다가오는 탓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 서양문물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는 기독교 신자인 아들과의 대립, 이 아들과 어머니의 종교적인 대립은 단순히 종교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란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할 때 그 삶 전체의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의 극적 상황만 가지고라도 이 작품은 이른바 '상황무용'으로서의 훌륭한 춤의 소재가 된다.

김은리가 새로 제작한 춤은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이 작품의 논리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다. 그는 모화 역을 직접 맡아 춤을 추면서 아들과 모화의 대립을 구도로 작품의 기본 골격을 짰다. 이 둘은 단순한 인간적인 갈등의 상징으로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첨예한 대립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면을 김은리는 아들의 역 개인에 그치지 않고 뒤따르는 군무진과 모화를 뒤따르는 무당들의 춤의 대립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들이 상징하는 신문물이나 기독교 등은 회색빛의 보다 현대적인 춤으로 형상화했고, 무당의 춤들은 전형적인 샤먼의 여자무당 복장의 그 춤들이었다. 그러나 김은리의 무당춤은 민속 그대로를 무대 위에 올린 것은 아니다. 안무자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자기화 했다. 김은리의 무당은 억세고 힘을 누리는 왕무당의 이미지는 없다. 그는 보다 인간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다. 고운 자태의 김은리의 평소 이미지가 그대로 무대 위에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이학순의 무대미술은 상징적이고 현대적이다. 무대 중앙에서 오른쪽에 단을 만들어 모화의 삶의 터전을 꾸몄다. 토속 신앙을 섬기는 무당인 그녀가 하는 일이란 손을 비비며 절을 올리는 의식이다. 이것이 주요 삶이다. 김은리는 그 단위에 있고 그 앞에 드리워진 얇은 막으로 투영돼 그 모습이 관객에게 전달되면서 그 앞에서 드라마가 전개되도록 했다. 그런데 이것은 객석 중앙에서나 그 의도를 관객이 느낄 수 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각적으로 불안한 속에서 관람할 수밖에 없는 처리였다고 생각한다. 파스텔조의 색채가 은은한 무대미술은 김은리의 현대적인 감각의 춤과 잘 어울렸다.

안무자는 원작에 있는 모화의 딸과 아들의 근친적인 사랑도 부각시켰다. 대립의 두 주인공이 죽고 딸이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신무녀도〉라고 이름 붙여진 이「무녀도」에 대한 해석에서 우리는 인간의 비극미를 체험한다. 드라마의 본질은 비극이라는 정론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호암아트홀에서 있은 김운미의 안무가로서의 데뷔무대(11월 21일)는 기대 이상의 수작을 우리 앞에 제공했다. 한국창작무용에서 두드러지게 좋은 안무작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김운미의 무대는 정말 유쾌한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항상 뭔가 새로운 작품, 밀도가 높은 창작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찾고 있다. 최근 복고조로 돌아서고 있는 창작무용의 판을 보면서 미래의 무용계를 걱정스런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암울함 같은것을 느껴 왔는데, 이 김운미의 등장은 침체된 창작무용 쪽에 새바람을 몰고 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김운미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번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작품이 수작이었음은 물론, 그 작품에서 그의 스케일과 단단한 지성을 함께 목격했기 때문에 감히 이러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능력 있는 무용가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춤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김운미를 기대한다.

작품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는 '두 딸을 가진 나, 아들을 나아야지……, 임신을 축하하는 시어머니·남편·시누이들, 초음파검사, 그리고 낙태, 태어나지 못한 생명들의 아우성!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모티프를 전개해 나간 극무용이다. 그 동안 춤으로도 많이 취급되어 온 아들을 원하는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문제를 언뜻 평범한 구조로 무용극화한 것인데, 이것이 새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안무자 김운미의 구성능력에서 기인한다. 안무자는 한국창작무용에서는 보기 드물게 꼴로르 스트링 퀀테르라는 실내악단을 등장시켰다.

피아노와 첼로(나에게는 그렇게 들렸으나 여기에 대한 확신은 없다. )가 중추가 되어 끌고나간 강은구의 음악은 춤작품으로는 대작에 드는 이 극무용을 한치의 숨돌릴틈도 없이 긴장미를 연출해 냈다. 생음악의 현장적인 효과는 좋은 음악뿐 아니라 무용수를 긴장시키기도 해 관객을 더욱 작품에 몰입시켰다. 팽팽한 현을 긁는 긴장으로 주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이미지가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상이었다.

극무용답게 이 작품에서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조명 등 종합적인 무대요소들이 춤을 향해 모였다. 손호성의 무대미술은 극의 효과를 연출하는 절대적인 요소로 관객을 설정된 장면 속으로 데려다 주는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무대미술이 작품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깊이 있게 몫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짓누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술은 천으로 무대 좌우 후면을 감싸는 등 단순하게 처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칼라가 진한 톤인 탓일까, 인상을 깊이 남긴다. 음악과 미술, 조명들이 적절하게 역할 분담을 해 조화를 이룬 균형미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 안무자의 능력이다. 결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무용수들을 데리고 김운미가 강한 톤의 미술과 음악을 버티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그의 안무, 구성력이다. 감히 지적인 그의 분석력과 상황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적할 수 있겠고, 첫 제작에서 보여주는 젊은 무용가들이 엄두 못낼 스케일에서 그의 춤에의 의지를 읽게 한다.

장면은 빠른 템포로 전환된다. 자궁 안의 세포들의 춤, 단란함과 화목이 있는 가족관계, 아들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 병원에서의 검사, 그리고 불안한 주인공의 마음을 비추는 춤, 병윈의 낙태수술장면, 죄의식에 괴로운 마음의 표현, 다시 삶으로의 복귀……. 이런 장면들인데, 이것이 빠른 전환과 극적 긴장감을 연출하면서 전개된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대 한쪽의 높은 단위에 여성을 놓고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조명을 그에게 비추고 단 밑 무대의 어둠이 반사되는 곳이다. 실루엣의 연출로 극적 효과를 낸 이 장면은 어느 한편 그로테스크하고 어느 한편 탐미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그외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많은 장면들이 연결된다.

그러나 상황 전환을 위해 너무 구체적인 장면들도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수술 장면의 의사들 등장이라든지, 그후의 쓰레기통으로 널리 붉은 천을 주워담는 장면이라든지……. 앞으로 김운미가 출품의 완성도에서 보다 차원을 높이려면 보다 상징적인 이미지의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에서 춤의 동작들이 특이하게 색다른 것은 없었다. 안무자는 주어진 여건을 잘 요리하는 요리사와 같았다. 평범한 한국춤의 동작들을 설정한 상황에 적절히 응용을 한다. 주인공을 맡은 유리한 등 그러나 무용수들이 뿜어내는 느낌은 꽤 성숙하다.

보다 현실적인 주제의 한국 창작춤을 보는 것은 흔치 않다. 게다가 한국춤을 가지고 현실문제를 말할 때 자칫 설명에 그치게 된다든지, 인체의 움직임보다는 주변요소들에 의존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김운미가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고유의 한국춤 정신이나 동작을 계발하는 자기 메소드를 확립하고 그것을 어떻게 수준 높은 정서로 승화시키는지를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