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연극

신인들의 진지한 열정

-공연예술 아카데미 제5기 수료공연 <제향날>




오세곤 / 연극평론가·연세대 강사

우리나라에서 직업 연극인으로 입문하는 길은 실로 다양하다. 물론 예전이나 4년제 대학의 연극과를 통하는 경우가 가장 많겠으나, 그 외에도 각 대학 극회 활동을 거친 뒤 직업 극단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고등학교나 대학 졸업 뒤 연극에 뜻을 세워 현장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즉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연극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독학 또는 선배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단편적인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 혼재한다 하겠는데, 바로 이 후자들을 위한 장치로서 비록 1년이라는 단기 과정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비중 있는 연극계 인사들이 공연예술 종사자 및 진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문예진흥원 공연예술 아카데미는 적잖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89년에 설립된 이 과정은 벌써 다섯 번째 수료생을 배출하는데, 그들이 꾸미는 수료공연은 부분적으로나마 우리나라 연극의 현재 및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평범함의 미덕

이번 제5기 수료생들이 선택한 작품은 채만식의 <제향날>(11월 26일∼29일, 문예회관 소극장)이었다. 물론 연극적인 이유만은 아니라 하지만 어쨌든 아직껏 공연된적이 없는 작품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형상화시킨 이 공연에서 특히 돋보였던 점은 참가자들의 진지한 탐구 자세라 하겠는데, 공연과 함께 마련된 자료전시회가 그 가시적 성과라면 공연에 배어 있는 고민의 흔적은 그 내면적 결실이라 하겠다. 아마도 지도자들의 사명감과 참가자들의 진지한 열정이 함께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채만식은 30년대 우리나라의 주요 작가로서 30여 편의 희곡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공연된 작품이 단 한 편밖에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되었고, 사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내용면으로는 엄격한 검열하에서 이루어진 현실비판이 주를 이루고, 형식면으로는 무분별한 번역극보다는 외국의 연극을 소화해서 우리의 것과 접목시키려 한 선각자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제향날>은 1937년 발표된 작품으로, 갑오년 동학 접주였던 남편 김성배를 잃고, 기미년 만세 사건 주동자로 쫓기던 아들 김영수를 중국으로 떠나 보낸 뒤, 그 생사도 모른 채 살아가는 최씨가 외할아버지 제향날이라고 찾아온 어린 외손자 영오에게 친손자 김상인이 할머니와 영오에게 인간에게 불을 선사하고 그 의로운 행위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모진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들려준 뒤 사회주의 집회를 갖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채만식은 이 작품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하겠는데, 물론 해설자 역할을 할머니 최씨와 손자 상인에게 나누어 맡긴 것에 대해서는 극의 구성상 결점으로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무식한 민중으로서 끔찍한 과거와 혹독한 현실을 그저 담담히 감내할 수밖에 없는 최씨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를 계승한 행동적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고통을 제거해 줄 다시 말해 사회주의를 암시하고, 형벌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를 얘기하는 상인을 대비시킨 것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극작술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실제로 공연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난점이 따른다. 우선 과거의 사건을 서술하는 현재의 공간과 다양한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과거의 공간이 동일한 무대에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최씨가 줄곧 살아온 집이 시간에 따라 점점 퇴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든지, 초년과 중년과 말년의 최씨가 등장한다는 점도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출(우지연)은 객석을 가른 돌출 무대를 설치해 서술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본 무대를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 마당을 비롯한 여러 사건의 공간으로 활용했는데, 물론 첫 번째 난점만 해결될 뿐 두 번째 난점은 피하는 것이고, 더구나 관객들의 시선이 양분되어 피곤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고민을 거친 흔적이 역력했으며, 세 번째 난점은 두 명의 배우를 등장시킴으로써 해소시켰다.

이렇게 볼 때 분명 특별히 기발한 해결책이 동원되었다고는 하기 어려우며, 두 번째 난점을 해결하지 않고 피한 것에 대해서도 안이했다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발함에 연연하다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하기 십상인 것이 젊은 초심자들의 폐단이라 할 때 이번 무대에 나타난 평범함은 오히려 바람직한 인내심과 자제력으로 평가함이 옳을 듯하며, 더욱이 설령그것이 결함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현장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서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개선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주로 연기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물론 초고속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현재 우리나라 연극 제작 현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한 번 몸에 붙은 연기 습성을 현장 경험을 통해 근본적으로 교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인물 분석은 어느 정도로 치밀해야 하며, 그 분석 결과를 가지고 한 인물을 제대로 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방법이 요구되는지, 나아가 소위 연극적 진실성과 연극적인 힘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창출되는지, 또한 궁극적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연기법과 대사법이 필요한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당초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하면 계속해서 착각과 오류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체계적인 연기교육이 아쉽다

그런데 이번 수료공연의 관계자들도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서인지, 장치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되도록이면 원작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즉 대사는 거의 원작 그대로였으며, 소품이나 의상 등도 채만식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니까 대사와 인물을 분석하고 그것을 표출하는데 상당한 비중을 부여한 듯한데, 이것은 일단 바람직한 태도라 생각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연기가 피상적이고 전형화된 정도에 머물렀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려운데, 이것은 결코 연기 수준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방향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솔직히 공연의 성격상 연기의 수준이나 완성도보다는 그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며 실제로 방향이 옳을 경우 비록 전반적인 수준은 낮더라도 간헐적으로나마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공연이 과연 그랬는가 하는 데에는 의문이 따른다.

올바른 연기를 위해 생명력이 있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디까지 분석을 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의 인간이 단 한순간도 동기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해답은 나오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공연 참가자들의 분석은 어느 정도였으며, 행위에 대한 동기 부여는 얼마나 철저했는지, 또한 연출은 어떤 강도로 그것을 요구했는지 깊이 반추해 볼일이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반드시 유형화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의 기본적 연기법을 체득한 연후에 가능한 일로서, 상대적으로 희극 연기가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 대한 주된 책임은 백가쟁명식의 이론서가 난무하면서도 서로 다른 점만 부각시킬 뿐 그것들간에 당연히 존재하는 공통점은 간과하고 있는 우리 연극 현실에 있다. 즉 하나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반박하는 새로운 이론이 있다 할 때 기실 다른 점이 하나라면 나머지 아홉은 같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며, 특히 초심자들에게는 그 공통의 부분부터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너무 당연한 것이므로 소홀히 하고 무시해 버린다면 올바른 연기자의 양산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쉽사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열악한 연극 환경과 더불어 우리의 연극을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말 것이다. 마침 올해는 명실상부한 연극 전문 교육기관이 될 연극원도 출범한다고 하니,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연극 초심자들이 쉽고도 정확하게 연극의 기본기와 태도를 습득할 수 있는 교재와 체계적인 훈련법이 보편화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