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그 따스한 옛 추억
안정임 / 방송위원회 연구위원
유년을 추억할 수 있는 드라마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한편은 얼마나 소중한가. 국민학교 때 혹은 중학교때, 밥상 위나 방바닥에 숙제를 펼쳐놓고 공책과 텔레비전 화면을 힐끔거리며 보았던 드라마의 추억은 지금 40대 이전의 삶을 살고있는 시청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처음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신기한 발명품처럼 여겨지던 시절, 흑백 화면에서 펼쳐지는 텔레비전 속의 세계들은 지금처럼 매끄럽고, 화려하고, 얄밉도록 자연스럽기보다는 어딘지 어색하고, 촌스럽고,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있는 필자도 사춘기를 생각해 보면 텔레비전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함께 기억된다. 요즘의 10대들을 두고 텔레비전 세대라고들 하지만 어찌 보면 텔레비전 세대란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여 있는 집에서 10대를 보낸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당시 필자가 즐겨보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어떤것이 있었을까.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고 감정의 끈을 당겼다 놓았다하던 프로그램, 그래서 나와 함께 커 온 것처럼 느껴지는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을까.
불행히도 그런 프로그램은 모두 외화였던 것 같다. <용감한 래시>, <우리 아빠 최고>, <월튼네 사람들>……. 그런 프로그램들이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함께 떠오르고 거기에 등장하던 외국 배우들의 얼굴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들 외화 드라마들이 굳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 프로그램들이 모두 사춘기에 있던 내 또래의 감성에 잘 맞았고 또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국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부모의 어깨 너머로 보았던 '어른용' 드라마였지 청소년들을 위해서 만든 드라마는 아니었다.
그런데 참으로 서운한 것은 볼만한 '아이용' 드라마가 없다는 사실이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란 점이다. 우리 텔레비전이 지금까지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섬세한 속내와 감성을 다독거리고 감싸 안아주는 드라마의 제작에 소홀해 왔고 아직도 그러하다는 얘기다. 10대들을 위한다는 프로그램들은 거의가 노래와 춤으로 떠들썩하든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8개월째 방송되고 있는 청소년 드라마가 있다. 바로 MBC의 <사춘기>이다. '청소년 성장 드라마'라는 가제가 붙어 있는 이 드라마는 흔히 생각하는 청소년용 드라마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단순히 사춘기 나이에 있는 청소년들의 제한된 반경 속의 이야기를 적당한 도덕과 사회 윤리에 포장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춘기>는 열 다섯 살이라는 사춘기의 나이에 있는 중학교 2학년생과 그 친구들의 눈을 통해 어른의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상당히 깊이 있고 밀도있게 그리고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춘기의 나이가 아닌 시청자들도 자신의 사춘기를 추억하면서 가슴을 따스하게 적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보기 드문 드라마이다.
현재 우리 텔레비전에는 청소년들을 주 시청대상층으로 해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도 상당수 있다. 시청률 인기순위에서 늘 1∼2위를 다투는 MBC의 <우리들의 천국>이나 KBS-2의 <내일은 사랑>, SBS의 <열정시대>등은 모두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즐겨보는 프로그램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프로그램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한결같이 대학의 테두리 안에 있다.
즉, 중고등학생들이 직접 몸담고있는 세계가 아니라 꿈꾸고 전망하는 미래 속의 세계,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 있는 세계인 것이다. 게다가 이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은 청소년들의 꿈을 두 배쯤 늘려줄 만큼 잘생기고 멋지고 똑똑한 모습이다.
가혹한 대학입시의 현실에서 허덕이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나도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서 저 주인공들처럼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환상 속의 드라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삶의 리얼리티
그러나 <사춘기>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이들 드라마와는 상당히 다르다. <사춘기>의 주인공 사춘기 중학생은 선망이나 부러움, 또는 빨리 도달해야 하는 목표로서의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른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고 공부도 그저 보통인 동민이(정준 분)와 친구 덕수 영호·정호·병식 등이 학교 생활을 중심으로 겪게 되는 사춘기적 사건들이 별다른 주장이나 전제 조건 없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 사춘기적 사건들은 아름다운 영어 교생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속앓이에서부터, 자전거에 부딪혀 깨어진 주스병 값을 물어주기 위해 부모님 몰래 새벽 주스 배달을 나서게 되는 해프닝, 새로운 커닝 방법과 양심 사이의 씨름, 그리고 자아의 정체감을 찾기 위한 가출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성 안에는 늘 자신이 속한 세상과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세계에 대한 따스한 긍정이 담겨있다.
주스 배달을 하며 알게 된 새벽의 풍경과 그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새로운 경험에 눈뜨고, 밤늦게 시험 공부를 하다가 간식을 먹으러 내려온 부엌의 식탁에서 운전 면허 시험문제집을 펼쳐놓고 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만나게 될 어른의 모습을 일별하기도 한다. 주인공 동민은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씩 돋기 시작하는 애송이 중학생이지만, 이러한 작은 깨달음을 통해 때론 꽤 어른스런 독백을 중얼거리곤 하는데 이것은 드라마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인해 퍽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사춘기>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완벽한 선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춘기의 중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실수와 괴로움이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가족의 부양을 위해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주현 분)와 적당히 속좁고 적당히 잔소리 많은 엄마(선우은숙 분), 동생에게 늘 핀잔이나 주는 누나(이진아 분)등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동민의 현실 인식을 묘사해 나가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이 드라마의 연출과 기획의 솜씨를 인정하게 하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드라마들이 복잡하고 우연적인 사건의 전개와 독특한 퍼스널리티를 가진 화려한 주인공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단지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라 어른의 나이에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근거는 우리 모두가 사춘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기와 진지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기, 잠 못 이루는 고민과 철없는 장난이 뒤엉켜 존재하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였다면 드라마 <사춘기>는 그 모습들을 그려내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는 드라마이다.
다만 이제 동민이가 커 가면서 보다 현실적인 사회 인식과 불합리하고 불행한 인간의 모습에까지 눈을 떠가는 과정이 진지하게 묘사되었으면 하는 것이 지금 이 드라마에 걸고 싶은 기대이다. 욕심 같아서는 이 드라마가 장수하여서 동민이가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는 과정까지 지켜볼 수 있었으면 싶다.
그래서 지금 사춘기에 있는 우리의 많은 청소년들이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따스하게 추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