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 대구

발굴·재조명되는 문학사의 공백기




서재환 / 영남일보 문화부 기자

1994년은 예총과 민예총의 위상관계 및 향후 활동방향이 주목되는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재야 운동 단체였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 문화예술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됨에 따라 각 지역에서도 기존의 합법적 문화단체인 예총과 마찬가지의 지회 지부 결성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예총 대구지부 결성을 위한 발기인 대회가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6시 예술마당 '솔'에서 열렸으며, 경북지역에서도 포항의 손춘익씨 (아동문학가)를 중심으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예총 대구지부 결성준비위원회는 지난해 12월 9일 오전 11시 예술마당 솔에서 첫 회의를 갖고 문학·미술·음악·건축·사진영상·연행(연극·춤·풍물) 등 6개 부문이 참여하는 발기인 대회를 열기로 하고 정관 제정 작업에 들어갔었다. 1994년 1월 말쯤 '민예총대구지부' 발족을 목표로 각 부문별 조직구성 및 회원확보 작업에 들어간 준비위원회는 6개 예술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 누구나 회원에 가입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민예총 대구지부가 설립되면 그동안 예총 대구시지회에만 지원되던 문예진흥기금 등이 이 단체에도 나눠지게 됨으로써 올해부터 이 지역 문화예술계 판도가 바뀌면서 공연과 문화행사 등은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성 속에서 서로 발전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대구지역에는 민미협·민족문학작가회의·민사협 등 민예총 산하단체 성격의 부문별 단체가 최근 속속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민족문학 진영 쪽의 경우는 지난 1989년 대선 직전 대구·경북 민족문학회란 이름 아래 80여 명의 문인들이 모였으나, 선거 뒤 흐지부지 되었다가 최근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움직이고 있다.

80년대에 분단 문제를 기치로 내걸어 주목받았던 「분단시대」동인인 배창환·정만진·김용락·김종인씨 등은 지난해 11월 '사람'이란 출판사를 등록하고 올해 1월중에「사람의 문학」이란 진보적 문예지를 창간,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대부분 민족 문학 작가회의나 대구·경북 민족문학회 회원이었던 이들이 계간지를 중심으로 다시 모임에 나와, 그 동안 유명무실했던 이 지역 민족 문학 진영 작가들의 구심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지난해 11월 4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민족사진가협의회를 발족했으며, 대구·경북 민족미술인협의회는 그 이전부터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1991년부터 문학교육연구소를 운영해 왔던 「분단시대」 동인들은 전·현직 교사가 대부분이며, 전교조 문제 때문에 문학활동을 소홀히 하다가 올해부터 출판 및 문학강좌 등 다양한 활동을 할 계획이다.

필자를 대구·경북 지역 거주자로 못박은 계간지 「사람의 문학」은 민족문학의 시각으로 이 지역문학을 점검하게 된다. 또 청년문학회의 활성화에 비중을 두어 대학생과 젊은 층의 문학활동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문화재

지방문화재 도난사고가 잇달아 문화재 보관과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경북 정주군 양북면 호암리 기림사 유물전시관에서 보물 제959호인 「감지금」,「은니묘법연화경」 2권이 도난당했다. 또 같은 날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 2리 법주사 보광명전에 있던 금도금 목불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 (높이 1백 30cm) 이 차량을 이용한 절도범들에 의해 도난당했다.

기림사에서 도난당한 고려시대「감지금」, 「은니묘법연화경」은 지난 1986년 절도범들이 대적광전안의 비로자나불상 둔부를 깬 뒤 꺼내었다가 회수된 복장유물로서, 지난 1988년 11월 보물로 지정된 일괄유물 54건 71책 가운데 일부이다.

이 경전은 그 동안 20평짜리 기림유물 전시장의 유리장 안에 진열되어 왔다.

특히 이 도난사고는 대낮에 범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개인이나 사찰에 보관중인 문화재 보관관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기림사 유물 도난은 대낮인 오후 3시부터 1시간 안에 발생한 데다 전시장의 유리에 반창고를 붙인 뒤 유리를 깨고 값진 고려시대 경전만 훔쳐간 점으로 미뤄 볼 때 문화재 전문 절도범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뒤 경찰은 경전 2권의 사진 1천장을 인쇄, 전국 경찰서에 배포한 뒤 문화재 절도 전과자 리스트를 작성, 탐문수사에 나섰다.

기림사와 경주군측은 "이제까지는 전시관에다 도난경보기를 설치한 뒤 경비원이 순찰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앞으로는 전담관리 직원을 배치시키고 부족한 경보장치등도 보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보물로 지정된 국가 지정 문화재 4점을 비롯해 도 지정 문화재 등 모두 8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기림사의 경우 당초 전시관과 진열장의 시설이 너무 허술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군위 법주사의 목불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임진왜란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차량까지 동원해 대낮에 훔쳐간 것으로 보인다.

동국대 문화재 연구소장 문명대 교수는 "이들 불상은 흔치 않은 목불인 데다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녀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경남 양산의 통도사는 최근 소장 문화재를 한곳에 보관·전시하기 위해 74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 오는 1995년까지 사찰내에 불교박물관인 '성보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물은 국가 지정 보물 8점과 도 지정 유형문화재 31점, 도 지정 문화재자료 1점 등 모두 40점으로 양산군 내 지정문화재 81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지정문화재까지 합하면 모두 2천여 점에 이른다.

통도사는 이 밖에 지난해 3월부터 8억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우운대사 부도 등 경내에 흩어져있던 부도와 석비 1백6개를 사찰입구 3천여 평의 부지에 모아 '선사부도원'을 세우는 등 불교문화전통의 계승 및 발전에 나서고 있어 불보사찰로서의 위상을 높이고있다.

문학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이 최고조에 이르던 1930년대에는 친일시가 아닌 한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우리 시문학사의 결손기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이 시기의 시집을 발굴·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시전문 계간지 「시와 반시」는 겨울호에서 1937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조동진(趙東振)의 유고시집 「세림시집」을 발굴, 그의 삶과 시문학 사상의 가치를 기획특집으로 꾸몄다. 경북 영양 출신인 조동진은 조지훈의 맏형으로 세림은 그의 아호이며, 「세림시집」은 작고 이듬해인 1938년 오일도와 조지훈의 편집으로 출간되었다.

'무료(無聊)에 지치인 몸/ 오늘도 들창턱에 기대서서/ 창살 넘어/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 새장 속에 파들거리는/ 작은 새와 같은 삶이여!/ 힘 오른 팔뚝/퉁겨진 혈관 속에 청춘은 통곡한다. '(「우울」)

시인 조기현씨는 「오식(誤植)된 청춘의 자각과 저항의 몸짓」이란 조세림론에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에 걸친 시기는 텍스트와 남성적 어조의 결손으로 단절적인 문학사 서술이 불가피했으나, 「세림시집」이 그 결손을 메워 주는 자료로서 값어치가 있다"고 밝혔다.「세림시집」은 당시 상황에서 검열을 우려한 편집자들에 의해 다수의 저항적인 작품이 빠지고, 전체적으로 보아 나이만큼이나 시적으로 미숙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일제하 현실에 저항하여 남성적인 어조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담고 있다.

'한창 뻗어야 할 청춘의 때를/하루 세끼 밥에 목을 매고서/ 우울한 방안에서 이렇게 보내다니// 오……사랑하는 세월아!/ 오식된 내 머리 위에 붉은 줄을 쳐주지 않으려나' (「오식된 청춘」에서)

「시와 반시」의 특집에는 조동진의 누이동생인 조동민씨 (67세)가 두 오빠를 회고한 글 「나의 오빠, 세림과 지훈」도 실렸다.

지난 1982년 지훈 시비 제막식때 고향 주실마을을 다녀온 뒤 10년 만에 다시 찾아보고 나서 쓴 글에서 동민씨는, 천석꾼 부자이면서도 검소했던 집안 분위기와 함께 동진이 서울서 온 친구를 배웅나갔다가 이빨을 뺀 채 술을 마셔 결국 숨졌다는 등의 일화를 애틋한 심정으로 소개했다. 동진 형제는 모두 4남 1녀였으나 셋째 동운은 열 살이 못 되어 죽고, 동민이보다 일곱 살 아래인 막내 동위는 6· 25때 학도병으로 참가해 숨졌다.

한편 시인 조기현씨는 '일제의 탄압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아래 한국 현대시사에는 아직도 조명받지 못한 작고시인들이 더 남아 있다"며, "결손된 시인들의 시세계 발굴과 그에 대한 조명은 새로운 관심속에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