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것을 둥글게 만드는 문화의 힘
이홍섭 /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
한 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한 해가 눈을 떴다.
다채널 시대, 지구촌 한 가족 시대에 참된 지역문화가 무엇인지 물어 볼 사이도 없이 한 해가 성큼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뜻에서 1993년을 의미 있게 수놓은 문화계 뉴스들을 정리한다. 덩치의 크고 작음을 떠나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다 초점을 맞추었다.
모난 것을 등굴게 만들 줄 아는게 문화의 힘이라고 한다. 그렇게 믿으며 좌판을 들여다보았다.
「강원도사(江原道史)」편찬사업 첫발
강원도가 1995년 정도(定道) 6백 주년을 기념해 199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강원도사」 편찬사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도내 출판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외형적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도의 역사를 최초로 집대성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총 3억 5천여 만원을 들여 3년차 사업으로 추진, 1995년에 상·중·하권으로 발간할 예정이며 부록으로「조선왕조 실록」 강원도 부문을 발췌, 함께 펴낼 계획이다. 상권 '역사'편은 현대 이전까지 도의 역사를, 중권 '현대'편은 근대 이후 도의 모습을, 하권 '전통문화' 편은 도의 전통문화와 인물들을 싣게 된다.
도내 역사·문화 부문 권위자들로 구성된 '도사편찬위원회'는 그동안 많은 난상 토론을 통해 목차선정과 집필자 선정을 끝내고 1994년부터는 본격적 자료수집과 집필에 들어가기로 했다. 도사편찬위원들은 그 동안 각종 역사서가 중앙사 중심으로 서술돼 도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없었다는 문제의식하에 도의 역사 흐름을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작업을 진행시켜 왔다.
이 원칙에 따라 △연대편년 △실직국 포함 여부 △궁예·왕건에 대한 평가 등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으며, 용어·토씨 하나하나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 동안 강원도는 고구려 문화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라·백제문화권도 아닌 어정쩡한 자리를 지켜 왔다. 다른 시대의 역사도 별반 다른 게 없었다.
사람이 살았는데 역사가 없을리 없고,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을 리 없다. 「강원도사」의 발간과 그 편찬 과정이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릉 '문화의 거리' 조성
지난해 10월 9일 선포식을 시작으로 개방된 강릉 '문화의 거리'는 예술인·시인·행정당국이 힘을 합쳐 만든 멋진 '작품'이었다. 정부에서도 주요 문화사업의 하나로 '문화의 거리' 조성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율적 문화시책의 하나일 뿐이어서 '향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릉 '문화의 거리'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향기 그윽한 작품이다. 예술인들은 갈수록 비대해지는 도시 속에서 '숨통'을 갖기를 원했고, 시민들은 이들이 내뿜는 향기를 맡기를 원했다. 그 자율성과 개방적 의식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이 문화의 거리 주변에 각종 전시장과 공연장을 유치, 전국에서 으뜸가는 문화의 패션거리를 만들겠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강릉 '문화의 거리'가 가져온 것은 많다. 특히 춘천·원주 등 비슷한 규모의 도시에 사는 예술인·시인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강릉 '문화의 거리'가 주목을 받자, 춘천·원주에서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자신들도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강릉은 역시…'라는 공통적 의견들이었다. 그 충격은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춘천 국립박물관 건립 가시화
1993년 강원도 문화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국립박물관 건립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그 동안 전국에서 유일하게 국립박물관이 없었던 처지라 국립박물관 건립은 '강원도의 자존심' 문제로 비화했다. 대정부 공격 미사일에 국립박물관 건립문제도 장착됐다. 동서 고속전철 건설, 의과대학설립, 영동고속도로 확장 등과 함께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가자 결국 '건립'으로 낙찰됐다. 1994년 예산에 6억 5천만원이 조사·설계비 명목으로 포함된 것.
되느냐 안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만약 되면 어디에 짓느냐'하는 문제가 불쑥 튀어나와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춘천·강릉·원주의 삼파전으로 번질 양상이었으나, 애초 '춘천국립박물관'이란 명칭으로 출발했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국립박물관 건립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박물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국립박물관이 필요한가' '왜 유독 우리 도에만 국립박물관이 없었는가' '국립박물관이 없어 타향살이를 하는 문화재는 얼마나 되는가' 등의 질문은 박물관의 소중함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속초 물소리낭송회 1백회 돌파
'이보게 친구여/ 우리 물소리를 타고 지금 이곳에 이르렀네/ 물소리는 영혼의 피리소리' (최영길 시인의 자축시 「물소리를 타고」 일부)
지난해 6월 속초의 조그만 건물 4층에서는 물소리 시낭송 1백회를 기념하는 '시의 대축제'가 열렸다. 지방 시낭송회 중 최초로 1백회를 돌파한 이 낭송회가 지닌 의미는 참으로 소중했다.
물소리 시낭송회는 지난 1981년 이성선·최영길·이상국·고형렬 시인 등 4명이 모여 시작한 이래 무려 13년을 흘러 왔다. 그 동안 전국에서 초대된 시인만 해도 50여 명·20여 명의 진행자와 10여 명의 음악담당자들이 시의 세례를 받았다.
다른 그 어떤 장르보다 시대에 민감하고 말 많은 문학판에서 10년이란 세월은 길고도 험한 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성선 시민의 인사말 첫마디에 "드디어 1백회 기념 낭송회에 섰습니다"가 함축하는 세월의 질곡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구나 이 시대에 시낭송회란 얼마나 '고전적' 퍼포먼스인가.
이 날에 초대된 시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의 시인들로 '물소리 낭송회'는 '시의 등불'(민영 시인)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갔다.
강원도에는 이외에도 춘천 수향 시낭송회, 삼척 두타 시낭송회가 각각 80회 및 50회를 돌파했다. 이들은 힘이 빠질 때마다 장자(長子)격인 물소리 시낭송회를 생각한다. 그러면 식던 열정도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이 장자가 소중해 보이지 않겠는가.
춘천 종합문예회관 개관 및 원주 치악문예회관 완공
1993년 말 원주 치악문예회관(가칭)의 완공은 강원 문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강원도 3대도시에 전천후 문예회관이 모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2년 강릉이 가장 먼저, 1993년 춘천이 뒤를 이어 각각 문예회관의 문을 열었고 이제 곧 원주가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문화공간 확충은 지역문화, 특히 공연예술 발전에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춘천문예회관이 건립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강원도에서 발레공연이 펼쳐질 수 있었다. 다른 공연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이 쿵쿵 울리는 공연장에서 무용과 음악이 공연되기 일쑤였다.
강릉·춘천 문예회관은 개관이래 연일 각종 공연과 전시를 폭죽처럼 터뜨리고 있다. 관객수도 만만치 않다.
이들 문화공간은 그 동안 예술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심어져 있던 관념들을 타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청중과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말의 불안감도 주고 있다. 초청행사가 압도적이어서 지역예술인들이 기죽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지역문화와의 조화·균형 잡기가 숙제로 떠오른 것이다.
속초 '예음 설악페스티벌'의 큰 뜻
예음문화재단이 매년 속초에서 펼치는 설악페스티벌은 '미래의 땅'이라는 강원도의 구호와 잘 어울린다.
세계적 음악명소에의 꿈을 안고 출발한 설악페스티벌은 1992년부터 여름에서 겨울로 옮겨 올해 1월 여덟번째 음악축제를 펼쳐보이게 된다.
지난해에도 플루트의 대가인 재일교포 김창국씨, 미국에서 맹활약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씨, 핀란드의 국제적인 실내악단 '시벨리우스 현악 4중주단' 등을 초청, 공연한 바 있다.
현재 예음에서는 20년 앞을 내다보고 이 음악행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풍광 그 자체가 음악인 속초를 세계적 음악명소로 가꾸겠다는 이들의 꿈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특히 자연이 살아 숨쉬는 강원도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이들의 꿈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현재 강원도는 심각한 기로에 서있다. 낙후된 지역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연훼손도 필요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관광산업이 최우선 목표로 서 있으나 어떻게 자연을 살리며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적 측면은 심각히 고려되지 않고 있다. 스키장과 골프장, 위락시설에 대한 계획은 넘쳐흐르나 문화관광에 대한 인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예음 설악페스티벌이 그 어느때보다 소중해 보이는 것은 바로 때문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퍼져 나가 대청봉 어깨에 쌓인 흰 눈을 반짝여 주길, 한없이 무거운 눈이 아니라 한없이 가벼운 눈으로 빛나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