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

1994년도 문화예술계를 전망한다.

- 문화개방에 따른 문화예술계 문제점과 그 대처방안의 모색




일시: 1994.1.17(월) 16:00

장소: 문예진흥원 회의실

참석자

이중한/ 서울신문 논설위원회, 사회

한명희/ 서울시립대 국악과 교수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

김 현/ 디자인파크 대표

이정하/ 영화평론가

이중한 : 우르과이 라운드에 묶인 문화 개방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실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94년도 문화예술계의 포괄적인 전망에 앞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쌀개방에 묻혀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문제점들이 제대로 인식도 안되고 있습니다. 우선 문제 파악을 명확하게 해서 제대로 인식이라도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영화 분야에서 당면한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됩니다.

그 다음은 출판계, 디자인계순이 되겠지요. 또 그 다음으로 공연예술, 미술 순이 되겠는데, 우선 UR타결 후 각 분야에서 어떤일이 생길 것인가를 짚고 넘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정하 : 영화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사실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나라가 개방 선진국입니다. 작년에도 미국과 한국에서의 영화 분야 협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85년도에 영화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미 통상 협상에서 협의되었고, 88년도에는 프린터 벌 수제한 등을 폐지하기로 다시 영화 협정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개방 문제는 88년도에 끝났고, 86년도부터 시장자유화 조치로서 외국 영화가 제약 없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87년부터는 또한 직배 영화가 제약없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래서 현재와 85년도를 비교해 보자면, 85년도에 한국 영화는 약 1백여 편 제작된 데 비하여 외국 영화는 모두 27편 수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같은 경우는 외국 영화가 347편, 한국 영화가 정확하게 65편이 제작이 되었지요. 그리고 347편 중에서 직배 영화는 63편입니다. 그래서 85년 무렵에 우리나라 영화는 전체 영화 시장의 약 40% 정도를 차지했습니다만, 작년 같은 경우는 약15% 정도로 한국 영화의 비중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 영화의 시장잠식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현 영화계의 쟁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영화산업은 2차 부수 시장들, 다시 말해 비디오라든지 케이블 TV, TV 방송과 같은 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화 시장보다 지금의 비디오 시장이 6배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게다가 TV 시장 훨씬 더 크죠. 95년부터 시작될 케이블 TV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영화 시장보다 훨씬 규모가 클 것이라 짐작되고요. 이렇게 영화가 자국 시장을 지키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다른 연관 영상 분야도 역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현재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경우가 비디오 분야입니다. 현재 국내 비디오의 약 90% 정도를 외국의 비디오물들이 차지하고 있는점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작년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EU 국가들이 영화를 중심으로 한 시청각 분야를 아예 UR 협상 대상에서 배제시켜 버린 노력들을 한번 생각해보고, 또한 늦었지만 우리가 국제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내 영화 영상 분야를 위한 특별한 대책이 거듭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중한 : 영화는 이미 개방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내년부터는 재작업이 가능해진다는 점 또한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재작업이 가능하다면 양상이 또 달라지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영화는 환상적인 뉴미디어의 새 기수이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성공한 「쥬라기 공원」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헐리우드 제작사가 들어와서 「서편제」를 다시 만들어도 여전히 성공시킬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만든 것만 고집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소재 자체도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현재까지도 깊이 인식되지 않아서 걱정스럽습니다.

이정하 : 게다가 96년까지의 개방 대상 품목에는 영화 제작업뿐만 아니라 영화 배급업, 극장업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중한 : 우리가 지금까지 버텼던 것들이 극장업을 쥐고 있다는 점과 우리 소재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국산 영화 60여 편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 마지막 부분까지 무너지는 위치에서 한국 영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유선방송의 경우, 시작도 안한 상태에서 우리 것과 외국 것의 비율을 7 : 3으로 출발하기로 했다가, 유선방송이 시작되지도 않은 지금 상태에서 비율이 5 : 5로 변경되었습니다.

도정일 : 그 비율을 채울 만한 물건이 없으니까요.

이중한 : 그런데 이것이 개방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점이라는 것이 인지도 안되고 있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유선방송이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율이 7 : 3에서 5 : 5가 되었는데 막상 시작하면 수요에 의해서 결정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프로그램 내용이 뻔하다는 약점을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음악 프로그램이나 영화 채널 쪽에서 우리프로그램으로 메우기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당연히 비율은 더 큰 변동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방송이 지금 위성방송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상당히 많은 가구 수가 홍콩 스타 TV와 NHK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서 위성방송에 대응할 우리 위성방송의 프로그램은 아직 출발도 되지 않고 있지요. 또 한가지, 비디오가 전화 송신으로, 다시 말해 비디오 다이얼 폰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비디오 시장이 또다시 바뀌게 되는데, 이 비디오 다이얼 폰 단계에 가면은 영화 백년상 나온 모든 비디오 테이프와 공연예술, 오페라 등을 비디오화한 모든 테이프가 데이타베이스를 통해서 그대로 송신되기 때문에 전프로와 마주치게 됩니다.

물론 그 데이타베이스에 우리 영화도 들어갈 수 있지요. 그런데 데이타베이스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선택해서 보느냐 보지 않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들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선택되어야 하지요.

때문에 저는 앞서 이정하 씨가 말씀하신 것보다 영화의 상황과 조건이 최악의 상태로 단숨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주지 않으면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감이 재대로 설명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현 : 디자인 쪽도 유사한 점이 있는데요. 이미 부분적으로는 외국의 유명한 디자인 회사들이 몇 년 전부터 들어와 있고, 들어와 있되 조심스럽게 활동을 자제했는데, 이들의 활동이 정식으로 오픈되었을 때 제일 크게 대두될 문제는 외국 유명 브랜드의 모방 및 도용 문제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기사화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용당한 측에서 마음먹고 문제화시킬 수 있다는 쪽으로 문제가 커집니다. 다시 말해 절단이 나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와 더불어서 저희들이 또 하나 크게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 소규모 업자들이 외국 유명 브랜드를 도용 및 모방하는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요. 좀더 다른 측면인 디자인과 광고업계, 특히 텔레비전의 CF 등의 상업 필름 경우에는 일본 광고를 모방한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을 흉내낸 경우도 많은데, 대단히 심각한 문제지요. 재작년인가 미국상표를 관리하는 특허청에서 국내의 대그룹 등이 미국이나 굴지의 세계적인 기업을 모방한 부분들을 모두 조사해 갔다고 합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그들은 이런 문제를 즉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모방을 문제삼을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단순한 디자인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이 수출을 할 때 크레임을 걸 수 있을 정도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모방과 관련된 문제로 다들 긴장 하고 있습니다.

이중한 : 그래픽 디자인 영역의 문제점을 김현씨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은 공업 디자인 분야는 더 심각할 것입니다. 상품 틀 자체의 디자인 문제이니까요. 일단 그들이 들어와서 이곳 현장에서 상업적 행위를 하게 되면 에디토리얼 디자인도 사실은 다 포함되겠지요. 앞으로는 컴퓨터 속에 영상이나 문자로 들어가는 자료들의 디자인에까지 문제가 확대될 수 있을 텐데, 미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고 있는 점도 심각합니다. 또한 텔레비전 광고에 외국 모델을 쓰지 않는 것도 내년에는 불가능할 겁니다.

출판은, 95년도에 유통 전분야 개방이 첫번째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대부분 10평 미만 짜리 서점 하나로 책 유통을 하고 있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저들은 세븐일레븐 같은 매체를 통해서 책 유통이 가능하다는 점과 서점만 중심으로 하는 체인점 유통이 외국에는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들리기에는 일본에서 이미 국내 시장 조사를 해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네들의 서비스 체계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처럼 10평 미만 공간에 책을 쌓아두고 앉아서 판매하는 시스템이 아니지요. 그들의 체인은 컴퓨터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한국인을 고용하는 지사 형식만 만들어도 즉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겁니다.

97년에는 출판 제작의 모든 분야가 개방됩니다. 이것은 학습 참고서, 콘사이스, 기본적인 어학이나 공업, 자연과학 쪽의 교과서 등에는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학습 참고서를 포함한 모든 출판물을 그들이 CD로 만들어서 들어오면 사실 우리와는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콘사이스나 학습 참고서, 교과서 같은 기능적 요구의 출판을 통해서 자산을 얻어 교양 도서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교양 도서에는 안 팔리는 책도 들어가고 수요와 상관없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책들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과 연관시키면, 그렇지 않아도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 출판계가 그나마 돈을 조금 벌 수 있었던 기능적 요구의 도서를 외국 회사에다 다 넘겨주면, 우리는 자산 형성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전무하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아무런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 더욱 현실을 암담하게 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멀티 미디어 단계에서 보면 출판의 지위가 더 취약한 이중적 부담이 생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미술 시장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기존 체제로 움직이면 우리의 화랑 시장 개방되자마자 즉시 주저앉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림값이 국제적으로 비싼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선 가격 자체가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 거지요. 저들이

프랑스의 판화들만 들고 들어와도 우리 시장은 무너집니다. 우리는 판화도 수백 만원 대에 있는데, 이런 가격이 형성된 나라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실정 아닙니까. 그리고 크리스티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시장 조사를 끝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도정일 : 암울하고 무서운 전망이 계속되어서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문화계 얼마 안되는 몇몇 분들이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꾸준히 일깨워왔고 우르과이 라운드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의 위협이 우리들에게 체험되기 전부터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차원에서나 정부 차원에서 먹고 사는 일에 너무 편승한 나머지 문화 영역은 부차적인, 또는 삼차적인 문제로 등한시해 왔습니다. 그것이 영화산업 분야에서는 문제를 꼼꼼히 따져 보기도 전에 시장을 내줘 버리고, 비디오 시장 역시 완전 점령당해 버리는 등의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쌀 개방 이전에 문화시장은 사실상 개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국민 문화생활에 주는 문화적인 영향, 또는 경제적인 영향에 대한 차분한 대응 단계를 거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상당히 때가 늦은 감이있고, 오늘 이 좌담회에서 대책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여쭙고싶습니다. 영화 부분에서는 재협상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이정하 : 전혀 없습니다.

도정일 : 남은 문제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에 대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중한 : 대응이 아니라 지금부터는 어떻게 사느냐는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되겠지요.

도정일 : 우선 민간 차원에서나 정책 차원에서 문화 개방의 파장이 국민 생활에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 좀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 정책의 전문가를 민간 차원에서도 많이 확보해서 그들의 자문을 많이 구하고, 시장 개방이라든가 개방된 시장에 대응할 때 정부가 단독 결정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심도 있는 논의의 단계를 거치 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늘 이 부분이 조금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실상 문화 영역의 개방이라고 하는 것은 국민의 생활, 정서, 가치, 이데올로기 등을 넘겨주는 일인데, 개방 시대의 최대 위협은 문화 영역을 통해서 확보된 정신 자산, 다시 말해 소프트웨어를 통해 확보한 자산을 금방 외국산 하드웨어의 소비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UR시대는 국제 언어로는 영어의 시대입니다. 이제는 영어 시대가 온다고 해서 세살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라고 아우성이고, 대학에서도 영어 시대가 온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어학 시장도 우리가 내줘야 할 분야인데, 어학 시장을 내놓으면 사회자께서 염려하신 것처럼 어학 관련 서적을 출판해 온 출판업 자체만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 교육 영역으로 그동안 있어 왔던 학원 역시 일대 위협을 받게 됩니다. 대학의 영문과도 지금 잠자코 있을 때가 아닙니다. 외국 대학들이 제일 손쉽게 들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언어, 곧 영어입니다. 그들이 영어를 풀어 먹이기 시작하면, 언어를 알면, 그 언어를 안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확보할 수 있는 소비시장은 엄청나게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어학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 보통 자세 달려들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태도가 눈에 보이듯 선합니다만, 우리 교육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또한 대학 분위기도 바깥의 교육 자본이 들어와 봤자 대학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학원 수준의 작은 규모로 들어와서 영문과를 개설할 경우, 그것이 비록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상품들이 개발될 테니까요. 한국에서 2년 공부하고 자국에서 2년 공부하면 양쪽 학위를 준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면 다수의 대학들이 좋은 우리의 인재를 잃을 뿐만 아니라 어떤 대학에서는 영문과 미달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초점을 모으면, 문화 개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민간 공공 차원에서의 인식이 늦은 감은 있지만 다시 짚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후 우리는 차분히 한 분야 한 분야를 꼼꼼하게 따져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작년이었던가요. 정부 관계자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이 없더군요.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만. 어쨋거나 문제는 국민 자신의 정신적 삶을 지금까지 지배해온 문화가 전면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중한 :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설득이 안되고 있습니다.「쥬라기 공원」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마이클 크라이튼 소설을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은 6천만 달러를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공룡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데만 1천5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1백20억 원이 든 셈이지요. 우선 그것의 제작이라는 것이 우리가 쫓아갈 수 없는 차원의 규모라는 점을 말씀드려야겠지요.

그런데, 6천만 달러나 들이는 이유가 뭐냐 하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공룡 캐릭터만 가지고 팬시 장사를 시작하는데, 그 장사로 번 돈이 무려 10억 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장난감, 생활 소도구 같은 것이 문화 소재에 의해서 모두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이지요. 아직 비디오와 방송을 통한 재방송은 시작도 안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30억 달러 운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데, 아무튼 이것은 과거의 문화산업의 개념이 아니라 이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산업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보 사회는 모든 하드웨어만 가지고는 산업의 성립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쥬라기 공원」은 1천5백만 달러를 벌었고, 1백20억에 해당되는 돈은 컴퓨터 통 하나를 가지고 벌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도정일 : 일본의 대표적 문화 산업체로 닌텐도를 들 수가 있는데, 닌텐도 직원은 9백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수배에 해당하는 직원을 가지고 있는 자동차 회사보다도 닌텐도의 수익이 더 높습니다. 우리와 모든 어린이들 역시 닌텐도의 게임 놀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가질 때는 지난번처럼 사고가 생길 때 정도입니다. 또 미국의 영화 산업은 전체 매출이 미국 전체조업을 다 포함해서 두번째인 대산업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산업을 육성한답시고 세트를 만드는 등 일련의 노력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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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한 : 영화 촬영장도 만들고, 연간 지원액은 50억 원이죠.

도정일 : 사실 영화 산업에서 미국을 따라갈 만한 대자본은 없지만, 그러나 홍콩이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홍콩 영화의 우리 시장 점유율도 상당히 높지 않습니까?

이런 면을 전문가들이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중한 : 이런 문제는 더욱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문제인데, 현재로서는 어떤 투자도 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정일 : 연구 인력도 모자라는 데다가 그나마 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많고 시간과 돈은 없는 실정입니다. 쫓아다니면서 자료를 모으고 직접 보고 배워야 하는 등 상당한 연구 자금이 필요한데 연구 자금을 어디서도 충당할 수 없는 등의 산재한 문제가 많습니다. 때문에 기업체나 공익자금 담당 기관에서 이른바 문화영역에서의 생존을 위한 연구자금을 대폭 늘여야 합니다.

이중한 : 한 장에 4천 원씩 하는 원고료만 지급하니 연구가 될 수 없지요.

도정일 : 연구가 없는데 무슨 구체적인 대응책이 나오며 생존책이 나오겠습니까. 문화 현상에 대한 연구 자금의 사회적 공급이 너무 빈약합니다. 연구를 토대로 해서 우리가 새로운 대응책과 생존책을 모색할 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중한 : 한명희 선생님께 공연예술 쪽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명희 : 우리가 처음에 내세운 주제에 의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음악 역시 1세기 전에 서양음악에게 무대와 시장을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철저하게 주객이 바뀐 것이 음악 분야이고 국악은 그동안 풍전등화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좀더 확대 해석하면 우리의 전통 예능이나 전통놀이들이 그나마 외풍을 덜 받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악은 안중에도 없던 분야였기 때문에 그 점이 오히려 외풍의 바람막이가 되어서 지금의 문화개방 시대에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분야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대항할 세력도 못되어서 외세에 많이 밀려 있던 이 국악이라는 분야가 오히려 지금의 예술의 국제화 시대에서 잠재력이 있는 하나의 문화 인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말씀하신 부분과 연관시켜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분야이건 간에 UR과 연관되어 경제적인 부분이 자꾸 강조되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이 새삼스러운 시대 조류처럼 되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몇백년 동안 외세 문화를, 특히 개화기 이후에 철저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닐런지요. 앞서 여러 분야에 대한 의견이 나왔습니다만, 70년대만 하더라도 방송국에서는 프로듀서를 일본 방송국에 파견을 했고, 그들은 돌아와서 일본 방송국에서 배운 방송 포맷을 그대로 답습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스크립터들도 일본에서 히트한 프로가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우리말로 옳겨놓는 과정을 되풀이했고요. 그런가 하면 미디어 같은 것들이 이미 다 수입되어 있고 미술 기법이나 연극의 흐름, 이념 등도 모두 개방된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가 선진 문화를 알게 모르게 추종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대학의 경우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학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들의 사고 체계 자체가 이미 서구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은 한국말을 쓰고 한국 음식을 먹지만 이미 무형적, 형식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방화, 서구화된 것일 테니까요. 외국문화의 종속 개념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안목으로 볼 때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의식 구조는 이미 재편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위기 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겪어 왔다는 판단이 가능하다면, 그들의 문화가 좀더 들어오면 어떠냐는 식의 사고도 가능할 겁니다. 이미 우리는 면역이 생겼고,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장은 외부의 충격이 오면 문화의 마이너스적인 요인이 많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곧 이겨내고 원상 탄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시각으로도 현실을 고찰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피해의식에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또 다른 각도에서 문화 충격이 왔을 때 탈출구는 있다는 신념이랄까 자세랄까, 뭐 그런 것을 가지면서 방법론을 모색 해 보는 것이 더 나은 수순이 아닐런지요.

도정일 : 위기를 위기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활용차원을 생각해보자는 말씀이시죠.

한명희 : 예, 좀더 부언하자면 유입된 새로운 문화라는 것은 그 시대의 흐름을 휩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반드시 반대 개념이라든가 상대적인 것이 존재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문화가 살아남고 지탱될 수 있는 여건 내지는 전통적인 소지, 문화적인 타성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가 들어와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전통적인 맥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눈에 안 보이는 지금까지 축적된 정신적인 세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음악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서 설득력이 적습니다만,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조선조 시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때는 전부 중국음악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선조들은 중국 음악을 다 받아들여서 자기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원래의 중국 음악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만도 실례가 될 수 있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라시대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비근한 예로 현대에 초점을 맞추자면, 어떤 작곡가가 작품을 썼는데 그의 작품이 서양음악이냐 국악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시시비비가 끊이지를 않고 있는점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강석희씨 같은 분의 창작곡이 국악이냐 서양음악이냐 하는 식의 논쟁이 끝나지를 않아요. 서양 악기를 썼다고 해서 흔히들 서양음악이라고 분류하지만, 분명히 그는 우리 것에 집착하는 한국적인 정서의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명이나 경제라는 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니만큼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더라도 활용하는 자체가 왜곡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생활 도구로서의 미디어를 충분히 활용해서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작곡가가 우리 얼과 우리 정서를 피아노에 담아내는 작업을 하면 그것은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요. 피아노라는 악기 때문에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문화가 처음 접촉할 초기 단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결론에서 말씀드리려던 부분이지만, 그래서 시스템은 서양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 시스템이나 미디어 속에 우리 것을 담으려는 의지랄까 노력이랄까, 결국 그런 문화 접촉에 대한 주체성만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문화 토양은 더 비옥해지는 것이지요.

이중한 : 문화인류학적 틀에서 접근이 어떻게 바뀌어도 민족적, 전통적인 기본적 정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나 우리 것의 창조 부문에서부터 문제는 발생합니다. 창조의 역량이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작을 하는 프로덕션의 능력에 있고 자본의 능력에 있다는 점을 직시하면, 그 자본은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하는 점도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더 큰 것이지요. 출판사를 경영하려면 우리가 만들어 팔아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남겨야 출판 능력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도정일 : 그렇습니다. 문화 품목의 생산 관계가 전면적인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문화적인 주체성 및 자율 역량, 포괄적으로 우리들이 주체적인 문화 역량을 유지하는 한은 시장 개방에 그렇게 위축되거나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다 것은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능력을 얼마만큼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능력을 발휘할 만한 물질적인 조건과 생산 관계는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겠지요.

한명희 : 위기 의식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입장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위기 의식을 부각시키는 반대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자본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지만 결국 대량 자본을 투자하더라도 소프트웨어인 정신적 부분· 주체적인 문화관과 폭넓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중한 : 그것이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부분이지만 현실적 시각에서 보면 그 점이 불가능하다는 가설이 더 강한 실태입니다. 이런 과정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감수성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재기불능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만화 부분입니다. 한국적 만화를 그려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데, 일본이 의도적으로 무국적화한 만화의 틀 속에 모두들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흥부니 놀부니 하는 만화를 아무리 그려내도 아무도 보지를 않는 단계에 이미 온 것이니만큼 감수성 문제가 굉장히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본이 전세계를 석권한 컴퓨터 오락프로그램을 우리가 만든들 성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 점을 무시한 채 현실을 낙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한명희 : 국악적인 측면에서 볼 때 는 음악 쪽의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국악에 국한시키지 않고 좀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보면 문화 영역에서 앞서간 사람들보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불리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점을 손익계산의 차원에서 보지말고 이것을 인류사의 문화적 재편 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중한 :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계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하되 자기 종족의 특수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존립할 수 없지요. 그러나 지금 염려되는 점은 이 측면인가 저 측면인가 하는 부분이 아니라 전세계 문화 속에 우리 문화도 살려서 당당하게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의 능력 문제입니다. 국악을 예로 들더라도 우리가 열심히 판만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케팅도 해야 하고 국악을 알리는 프로그램도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 자신도 서양 음악 판만 사지 않고 우리 것도 50%는 사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CD 한 장 만든 것만 가지고 과연 세계라는 전체 구조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도정일 : 현대를 여러 분야에서의 무국경 시대라고 이야기하는데, 문화적인 우리의 당면 과제는 이 무국경 시대의 문화의 국경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의 대응력이 약한 것이고요. 아무리 보잘것 없는 문화라도 자취없이 소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또한 물질적인 삶의 부분에서 시장을 많이 내준다 하더라도 문화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요.

지금 다른 분야들이 다 같이 상당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영화의 경우에는 '공룡 영화'는 문자 그대로 공룡영화입니다. 미국 영화라는 공룡이 한 번 지나가면 지역 문화 사업은 초토화됩니다. 이정하씨, 영화 쪽에서는 무슨 대응책들이 있습니까?

이정하 : 대응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영화라는 공룡이 한번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듯이 한국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고, 또한 영화에 있어서의 무국경 시대는 우리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당한 입장이라 어떤 대책을 가지고 문을 열어 준 것이 아니며 무조건 문을 열어준 상태로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지요. 지금은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책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영원히 늦는다는 관점에서 영화 분야 관계자들이 정부와 대화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화 영상 분야에서 EU국가들이 미국을 대상으로 싸운 전략들을 늦었지만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풀어준 부분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대신에 국가적으로 인식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문화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을 말씀드릴 수 있겠는데 우리는 영화 외적인 경제적인 이유로 문을 열어줘 영화문화와 영화산업을 망쳐버린 경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이 영화 영상분야를 문화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두 측면에서 진흥해서 경쟁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흥책은 크게 정책적인 측면과 연관 산업 분야가 연합해서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관 산업 분야가 연합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케이블 TV, 비디오 업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영상분야의 제업종들이 힘을 합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예를 들자면 유럽의 경우는 TV 수상기에 대해서 영화진흥기금을 2∼4% 부과합니다. 또한 출시되는 비디오 테이프에도 기금을 부과합니다. 여기서 창출된 재원으로 영상 제작 분야에 지원을 합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 금액이 92년도에 무려 2천8백억 원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영화 시장보다 큰 액수이지요.

그렇게 해도 프랑스가 자신들의 영화를 지킬까 말까 하다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기껏 극장에서 일년에 1백억 정도 거둬지는 문예진흥기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영화 분야에 전액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정도만 투자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화 제작 분야에 지원이 되는 금액은 10억이 안되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영화 한 편 만들 돈도 안되는 것이 지요. 이런 조건은 점차적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가 아니고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서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획기적으로 진흥 재원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정책적으로 해주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취약한 유통 부문을 현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유통 부문을 현대화하는 데는 업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뭔가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넓게 본다면 영상 영화 분야에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늦었지만 대응책을 만들고, 그 획기적인 대응책을 실제로 실시하는 거지요. 아울러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앞서 한명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어느 정도의 조건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자신감 자체도 불가능한 꿈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중한 : 우리가 과학이나 경제 발전을 이야기할 때는 설득되는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초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화는 기초라는 개념도 없이 아무나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아까 도정일 선생님도 말씀하신 대로 문화도 기초 연구를 해야 하고 기초능력을 배양해야 완성된 새 상품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문화의 질이라는 것은 앞부분이 생략된 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제작 기술도 기초 능력이고 자본도 기초 능력인데 현재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디자인 분야 역시 똑같지 않겠습니까?

김 현 : 저는 드릴 말씀이 너무도 많지만, 몇 가지 다른 예를 들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국가적인 정책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아시겠습니다만 모든 산업중에서 디자인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디자인 쪽에서 제일 부가가치가 많은 것이 이브 생 로랑이나 피에르 가르댕 등인데, 이들은 모든 품목들이 세계의 시장을 휩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조회사는 없고 관리 회사와 법적인 대응을 하는 팀만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제품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는 값을 받으면서 감독관이 가서 자신들의 기술에 맞나 맞지 않나 체크만 해주고 전체 판매액의 5%에서 10%를 챙기고 있지요.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지요. 현재 디자인 회사를 조그맣게 운영하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 보는 우리의 현실은, 국가에서 저희 업체를 서비스업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희 디자인 쪽은 불행하게도 유흥업소 술장사와 똑같은 서비스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지요.

또 하나, 우리나라에는 디자이너를 관장하고 지원해 주는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이 있습니다. 그곳의 작년까지 예산이 12억인가 13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습니다만, 우리보다 볼륨이 훨씬 적은 대만 경우만 하더라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까지 국가에서 디자인 진흥을 하는 기금이 1천2백억 원이었답니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올해부터 영상사업과 산업디자인 쪽은 많이 고려를 하겠다는 정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또 하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자랑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88 대전엑스포의 꿈돌이 마스코트를 저희 연구팀에서 디자인했습니다. 저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 작품을 만들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소재 대상은 우리것은 아니지요. 과학 박람회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토론 끝에 현대 과학을 도깨비로 풀자 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도깨비로 한 번 디 자인해 보자고 의견이 수렴되었고, 우주 요정이라고 하는 희한하게 생긴 주인공이 나왔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요, 그 다음에 제가 겪은 안타까운 일을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전 엑스포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면서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그런 휘장 사업을 하는 그 많은 영화에 대한 제작 권리를 MBC 측에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화영화의 단순작업은 아무래도 국내에서 많이 했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미국 회사에서 작업해 왔습니다. 그들이 작업해 온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것을 세계 60여개국에 팔아서 수익성이 좋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난 후 중간 과정에서 저는 그들이 작업한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분명히 대한민국 대전에서 하는 엑스포이고 우리의 주인공이 거기에 나왔는데, 미국 회사에서 만든 만화영화에는 전체 등장인물들이 모두 서양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부분을 명시하기 위한 미팅이나 토론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작이 전부 다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왕 우리나라에서 하는 행사이니만큼 무대를 한국 쪽으로 끌어들이고 전세계 어린이가 다 등장하더라도 한복 입은 어린이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으로 처음부터 옵션을 걸든가 주문을 했으면 전세계의 방송국에 퍼져서 방영이 된 그 좋은 기회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애석함이 생기더군요. 자막 없이 보면 그것은 미국 만화 영화지 한국 만화영화가 아니더군요. 어쨌거나 앞서 말씀하신 대로 저희 디자인 쪽에서도 앞으로 UR에 맞서 슬기롭게 대처해야겠지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디자인 분야만 해도 전세계 디자인계를 휩쓰는 나라는 역시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은 나라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직까지 문화의 맥과 뿌리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는 낙관적이지요. 노력을 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봐야죠

이중한 : 포괄적인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첨부하자면 평균적인 수용자의 감수성 변화의 문제가 있는데요. 우리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어느 예술 분야 할 것 없이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감수성 자체가 훼손된 문제는 별도로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하게도 국악은 남의 것이 들어올 틈이 없는 독자적인 분야니까 별개의 부분입니다만, 다른예술 장르에서 보면 감수성이 훼손된 것이 너무 많지요. 그런데 제가 염려하는 것은 세계화 국제화라고 하는 틀 속에서 부서져버린 자기 원형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리 포기하거나, 또는 자기 비화라는 관점을 통해서 버릴려고 하는 등의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것이라는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여진 감수성 속에서 냉철한 판단 없이 자기 비하도 이루어지고 자기 포기도 이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우리 자신 것으로 다시 확인해서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 문화예술 장르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을 판매하는 출발점이 마련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다행히 「서편제」가 성공한 것은 판소리를 통해서 자기 비하를 당하지 않은 부분이 제품화 되었기 때문일 텐데요.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는 「서편제」처럼 만들 수 있는 요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명희 : 그래서 결론으로 한 말씀드리자면, 결국은 교육 문제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금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가치의 문제도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국악도 국악 자체가 좋다는 것을 자득해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외국 사람들 의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70년대만 해도 대중들이 국악과 친해지면 오히려 창피한 것으로 국악을 인식했으니까요. 그런데 외국 순회공연만 가면 이례적인 박수를 받는 등 그게 아니거든요. 그쯤 되어서야 한국 사람들은 우리의 국악에 열광하는 외국 사람들을 의아하게 생각해서 국악을 들어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정서와 상당 부분 맞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등 결국은 국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부끄럽게도 남에 의해서 얻어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을 가치의 문제, 미학의 문제와 연관시키자면 지금까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면과 삶의 근원적 문제 등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미학을 재정립하는 교육이 시급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화라는 것은 어떤 충격을 받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역류하는 것이 아니라 충격이 가해지면 조금 휘청하다가 다시 본래의 주체적인 문화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 저는 낙관적인 시각에서 오늘의 사태를 보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일상생활에서의 가치관 교정문제 등도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문화개방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과 관리들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대처도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중한 : 말을 하려고 하면 끝이 없지요. 오늘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당면한 문화 개방에 대한 문제가 더 심도 있고 더 절실하게 인식되어야 되겠다. 따라서 이 문제를 인식시키고 실제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겠다는 점이 있고요. 다음은 조금 더 본질적인 우리 것의 감수성 문제입니다. 우리 것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재확인하고 재구성해서 문화 감수성에 대한 자존심을 다시 살려내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교육을 위한 10년이나 20년이라는 시간적 공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것의 감수성을 재확인하고 재구성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더불어 생각해야겠습니다. 출발점부터 해야 되는 일도 있지만 당장 급한 것도 있는 것이지요.

도정일 : 우리 것에 대한 감수성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입니다. 그동안 이 자존이 상당히 약화되어 왔습니다. UR시대의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전세계적인 문화의 획일화입니다.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데, 너무도 비판 대상이 많고 모순투성이인 영화들이 흥행의 성공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문화수준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 UR시대에 각국의 민족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자기문화, 자기 정서, 자기의 감성, 자기의 고유한 상징 체계를 지켜야 문화 다양성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 UR 문화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양성의 바탕 자체를 허물면서 다양화하자고 말합니다.

이중한 : 특수성을 가져야 그것이 다양성 중의 하나가 되는 거지요. 한 가지 더 첨부하자면 세계적 수준의 질을 우리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적인 수준의 질을 얻으려면 다른 나라와 같은 투자도 되어야 합니다. 남들은 몇천만 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만 1, 2억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서야 어디 게임이 되겠습니까. 결국은 어느 분야든지 아이디어만이 아닌 질을 위한 투자도 이루어지는 구조가 되어야 경쟁도 가능한 것입니다.

김 현 : 위기는 곧 찬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에 정신을 잘 차리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이중한 : 물론입니다. 그 점을 믿어야죠. 오랜시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