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신춘문예 제도 개선 모색할 때




한 기 / 문학평론가, 안성산업대 교수

국제화 개방화 뒷받침하는 국내개혁 뒤따라야

새해를 시작하면서 국제화, 개방화도 중요하지만 개방화를 참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국내적인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발언들이 있었다. 실로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국제화, 개방화의 전략이 단지 우리 몸을 그대로 두고 문만 열어준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화(化)'라고 하는 말 쓰임새 그대로, 몸체를 바꾸는 형태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 제2의 개국이 라고들 비장한 각오로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이 나라 안, 민족 안에서만 맴돌며, 무역이라고 해봐야 겨우 값싼 노동력으로 저가품을 팔아먹던 시절의 그것과 같아서는, 그야말로 이 무한경쟁의, 매일매일의 무역 전쟁 시대에 생존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참으로 실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때 선진국으로 가는 문고리를 잡았다고 스스로 대견해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 때이르게 터뜨린 샴페인이 오늘날 부채가 되어 되돌아오고, 그래서 이제 국가경쟁력 이십 몇 위의, 아시아의 한 작은 용으로 주저앉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질이 그다지 높아진 것도 없이, 그동안 정치적 민주화를 조금 이룩했다는 작은 자긍에 만족하는 사이에 세계 속의 우리 위치는 곧 다시 변명할 수 없는 이류국가, 주변국가로서의 슬픈 운명에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제한된 위상을 벗고 다시 딛고 일어서려면 단지 목청만 높이고 구호를 요란하게 해서 화려한 말의 성찬을 벌일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합리화된 경쟁력, 곧 우리 자신의 내적 합리화 수준을 제고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개혁'이라고 하는 한자어 속에 이미 자기 자신부터의 탈바꿈이라는 엄연한 요청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국제화, 개방화를 위한 우리 자신의 합리적 개선이라는 목표가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새해 첫날 신문을 장식하는 신춘문예 그 화려한 맛보기

이처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제화, 개방화의 과제를 합리화, 곧 우리 자신의 합리화는 사회적, 현실적 과제로서 고쳐 생각해 볼 때, 이 사회적 합리화의 문제는 비단 정치, 경제권에만 한정될 문제 성질이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도 또한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문제임을 생각할 수 있다. 문화 역시 사회 형성의 한 부분이며, 오늘날 소비 사회, 이 무한 욕망이 줄달음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욕망을 관리하고 생성시키는 문화 기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화 역시 다른 사회 부문과 마찬가지로 관습화된 제도의 성격으로 유지, 갱신되는 것임을 또한 중요하게 고려할 수 있다. 소비, 관리사회로 나아갈수록 문화의 정책적 측면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문화란 것도 흔히 말하는 예술 작품으로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닌것이다.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서 영화관이 있고, 미술이 존재하기 위해서 미술관이 있는 것처럼, 문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그 집과 제도, 사회적 관습이 함께 존재한다. 문학이 존재하기 위한 관습화된 제도로서 어떤 것이 있을까. 문예지와 출판사, 서점, 학교등을 오늘날 문학이 문학으로서 존재하게끔 하는 대표적인 사회적 기반으로 꼽을 수 있지만, 이 중의 하나로 신문과 그 신문이 운영하는 신춘문예 제도를 손꼽지 않을 수 없겠다. 매년 연말이면 신문에 그 공모 기사가 나가고, 그리고 신년 1월 1일 아침, 영예의 수상자 얼굴이 그 새아침 신문의 지면을 밝히는 이 제도! 이 제도로 말미암아 문단 등단자들은 일생에 한번 전국적인 환호의 주인공이 되는 신비로운 환각을 맛본다. 아마 신문으로서는 새해 첫날 희망의 환시를 조성하는 가장 우리다운 방식으로서 이 휘황한 지면 꾸미기의 전통을 마약처럼 상용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이로서 새해 첫날의 신문에 배달되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신춘문예 당선자의 글과 그 소감이 실린다는 것은 문예 지망자들로서는 또한 난생 처음 마약 맛보기 같은 유혹의 꿈을 꾸어보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지금은 문학에 별 실존적 욕망을 느끼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조차도 이 행사는 한 연례화된 국민적 행사로서 거부감없는 문화적 축제 공간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 오래 되어 이제는 한 관습처럼 굳어져 온 행사가 지금 정작 문학을 위해서는 별 쓸모 있는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 화려한 축제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알찬 결실이 없이 일종의 외화내빈 행사로 굳어지고 있다면, 이 관습적으로 제도화된 문화행사에 대해서 한번쯤 반성의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문학발전에 기여도 비해 양적 비대화, 난립 현상

대저, 근대의 그 어떤 문화적 제도보다도 오랜 연륜을 지닌, 이 신춘문예의 제도가 이때껏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제 말기 「문장」지의 시대 혹은 전후 「현대문학」지가 그 활발한 위세를 드높이던 시절, 그리고 80년대 한때 온갖 제도적인 것들이 괄시의 대상으로 배척되던 시대, 그런 한때의 시절들이 아니었다면, 신춘문예 제도는 한국 현대 문단의 형성을 위해서 가장 근 공헌을 해온 것이 틀림없다. 요컨대 가장 정평있고 공신력있는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그 공헌의 요체인 것이다. 식민의 시절을 지나, 해방과 분단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이 제도만큼 지속적이고도 폭넓게 문인 배출의 제도적 장치 노릇을 해온 것도 없다. 문학사업이 사회 공적인 사업의 하나라는 것을 각인시킨 것도 바로 이 제도다. 아마 문인들로서도 이 제도 출신임을 내세우는 것이 그 자격을 말할 때 가장 떳떳하고, 또 공신력을 얻기에도 유리했던 것이 사실이겠다. 그런만큼 이 제도가 오늘날 한국 문학의 이 만한 부피를 이룩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터이다. 그렇긴 하나, 최근 년간, 그러니까 80년대 후반 이후 신문의 난립과 함께, 이 제도의 양적 비대화는 그런만큼 한 동맥 경화의 현상을 일으켜온 것이 사실이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여러 복합적인 문제 요인이 있을 터 이지만, 몇가지 배경적인 요인과 함께 우선 현실 진단의 논설을 벌여 보자면 다음과 같이 되지 않을까.

제도의 공신력 위협하는 질적저하 대비책 필요

신문계의 난립, 병립으로 인한 이유로는 그것이 그런만큼 신춘공모 또한 난립되어서 이 제도의 질적 공신력이 우선 위협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물론 신문사 측으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신문사의 전통과 권위에 따라 내부적 차별화가 이루어지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를 일이러라.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단 관행에 비추어 그러니까 최소한 제도적 차원에서의 관행에 비추어 이 차이는 공적인지성을 갖지 못하므로 결과적, 현실적으로 신진 문인들의 대량 생산만을 가져온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더 나아가 문인으로서의 자격이 법제화된 요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얼마든지 임의적인 등단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이에 따라 문인의 충원이 엄청나게 폭주하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째든 관행의 폭주 속에서 제도의 질적 공신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문제는 질적 저하 현상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몰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신춘문예의 질적 저하가 야기되고 있다면, 그 이유 속에 반드시 신문계 쪽의 이유만이 적시되어서는 안되리라. 문학계가 그만큼의 수요에 따라가주지 못하는 것을 문제삼을 필요도 있다.

양적으로 응모자의 수는 증가 추세를 보이더라도 질적인 공급 제한에는 우리 문학의 한계 요인이 잠복되어 있을지 모른다. 흔히 문학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 이 문제가 또한 신춘문예와 관련해서도 무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이유의 원천 소재가 어디있든지간에 공급과 수요 사이에 불일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질적 저하로서 연결되어 나타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다.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각 신문마다 자기 나름의 당선자

를 내겠다고 한다면, 야기될 것은 필연적으로 전체적인 질적 저하 그리고 신춘문예 자체의 공신력 실추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현실을 현행의 틀 안에서 고치고자 한다면, 각 신문사마다 그러니까 현재의 품목 나열식이 아닌, 신문사마다의 장르적 특화 방식이 유익할지 모른다. 예컨대 10여년 전부터 모 신문사가 '중편소설' 부문을 신설하여 크게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신문사마다 특유의 장르를 집중적으로 지원, 육성하는 방식이 된다면, 지금같은 부문간 난립의 현실은 훨씬 개선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르 특화의 방안은 물론 현행의 양식 중에서만 선별, 특화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식을 신설하고, 또 내부적인 세부 분화를 유도하는 방식으로도 모색 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국제화 요구에 발맞추어 '번역'의 부문을 신설한다든가, 같은 소설 양식 중에서도 이를테면 '전기' 부문 등을 특화하는 방안, 또 혹은 문학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 평론'이나 '역사 평론' 등의 분야를 신설해 보는 방안도 강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신춘문예 제도 자체가 무용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획일적인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관습화된 운영방식 벗어나 합리적 개선방안 모색해야

춘문예의 질적 저하가 야기되고 있다면, 그 문제의 본질은 그러므로 현행의 관습화된 운영 방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사회적 분화, 혹은 전문화의 정도가 진전되어감에, 신문이 문학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의 파급 이유도 깃들어 있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근대 문학초기에 신문이 문학의 성장을 위해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시절과 지금과의 여건 변화 요인이 여기에는 개재하고 있다. 가령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일반적으로 푸념처럼 한다는 말, 곧 "뽑아 놓기만 하면 뭘하나!"의 탄식을 이 경우 경청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입문의 절차를 마쳤을 뿐, 더 이상 후속적인 활동이 지원되고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키워줄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신문사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무책임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왜 뒷감당하지 못할 일을 그렇게 양산해놓기만 하였느냐, 반론할 수 있다. 어쨌든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더 이상 지면이 주어지 않는다는 불평은, 단지 개인적 불평으로서 간주될 것만이 아니고, 수용할 교사도 없이 학생만 대량으로 뽑아놓은 꼴로 문제가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문제는 결국 한국문단이 잘 숙련된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수다한 아마추어들로서 채워지기 쉽다는 점을 의미한다. 신춘문예를 통한 대량 등용이 한국 문학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논거가 결론적으로 이에서 마련된다. 물론 이로 비추어서 오늘날 신춘문예를 통한 신인의 공급이 전적으로 아마추어 문인들만을 확대 생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이런 추세, 즉 질적 저하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야기될 때, 그 결과는 곧 문단의 아마추어화로 귀착할 수 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이제는 신춘문예 제도가 기왕처럼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역할로만 시종할 것이 아니라, 신인문인들의 질적 육성 방안 쪽으로도 기능적인 전환을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금을 대폭 끌어올리고, 장르적인 특화를 이룩하는 방안을 통해서라도 기성, 신인 제한 없이 유능한 신예를 집중 지원하는 방식 쪽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픈 것이다. 사족으로 말하면 이런 점에서 일본의 〈아쿠다까와 상〉은 한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기성 문인들의 서열 순서에 따른 논공행상 식 시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엄격하게 작품으로만 따져서 유능한 신예를 정예화 한다는, 문학상의 운영 방식, 정신이 그것이다. 문학상의 과대 난립과 문호의 확대가 실상 질적 발전을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그간 우리의 문학 제도 운영 경험으로 보아 그러한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러나 올해 신춘문예의 성과가 과거의 지난 성과들에 비해서 빈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필자가 관심 있게 읽어본 것만으로는 신예 작가의 가능성을 보여준 단편소설 부문에 박은철의 「회전목마와 도서관」, 기성 시인이긴 하나 새롭게 작가로서의 출발 가능성을 보여준 김승희의 「산타페로 가는 길」,그리고 시 부문의 심보선의 「풍경」, 그리고 시인으로서 문학평론의 잠재된 역량을 보여준 정끝별의「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등의 글은 앞으로의 활발한 활동을 예감케 해 주는 인상 깊은 수작의 당선작들이었다. 이러한 신예들의 발굴만으로도 올 신춘문예는 그 나름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러나 국제화, 세계화의 피나는 문화 개방 현실을 전망하면, 단지 유능한 신인들의 발굴로서 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 우리 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문화적 제도들에 관해 역시 합리적 개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때임을 절감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