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책
이원홍 /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돈이 남아서 책을 사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어릴 때는 다행히 독서광인 친구가 있어서 불편 없이 나누어 읽었지만 대학시절에는 그런 행운을 잡지 못했다. 몇 푼 안 되는 하숙비를 받으면 설레는 마음에 쫓겨 책방으로 달려가서 책부터 챙기는 신세가 되었다. 때로는 하숙비를 잘라먹기도 했고 차비가 없어 먼길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을 때도 그러했고 정부에 들어가 일본 근무를 했을 때도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 버릇 그대로다. 사실은 그때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즐겁고 충실한 시간이었기에 그것을 놓치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다만 생활비를 잘라 쓰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해 책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 주저스러워진 경우도 많았다.
책은 눈처럼 쌓인다. 세월만큼 키가 자란다. 어느새 아파트의 거실이 어지러운 서재로 변했고 안방의 장롱도 책장에 밀려나 버렸다.
서재의 책은 한 권 한 권 나와 인연을 맺은 사연이 있다. 그 가운데는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준 것도 있고, 소중한 지식을 나누어준 지낭도 있고, 인생과 세상을 가르쳐 준 스승도 있다. 울적할 때 가슴을 열어주고, 슬플 때 같이 울어주고, 앞이 캄캄할 때 불을 밝혀주는 친구들도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서재에 앉으면 항해하는 배의 조타실에라도 들어선 것 같이 앞이 보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나에게 책이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친구보다 더 의지스러운 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재를 영어로 '라이브러리(Library)', 독일어로 '비블리오테크(Bibliothek)'라 하지만 둘 다 '장서'와 '도서관'이란 뜻으로 쓰인다. 그리고 서양에서 '공부방'이나 '연구실', '서재'로 쓰이는 말은 공부한다는 동사에서 나온 라틴어의 '스투디움(Studium)'이 어원이다. 그것이 영어의 '스터디(Study)',독일어의 '슈투디움(Studium)'으로 변했다고 하니 책과 서재와 공부는 삼위일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 권은 중국어의 '수팡(書房)'보다 우리와 일본이 함께 쓰고 있는 '서재(書齋)'라는 말이 분위기를 더 살려주는 것 같다. 목욕제계(沐浴濟戒)하고 글을 읽고 쓰는 방을 말하는 것이니 엄숙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말이다. 도산서원에서 퇴계(退溪)선생의 서재를 둘러보고 그 참뜻을 실감한 적이 있다.
화려하고 쾌적한 서재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선경 같은 정원을 끼고 있는 서원의 서재도 부럽고 괴테처럼 정원을 내다보는 아담한 2층 서재도 탐스럽고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같이 책 속에 파묻힌 널찍한 다다미 서재에도 새암을 느낀다. 좀더 쾌적한 서재를 가져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가끔 느낀다. 그러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생각을 돌려 책과 담을 쌓은 우리나라 어머니, 아버지의 처지를 살펴볼 때가 있다. 책방을 만들려면 돈이 있어야 하겠지만 돈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의욕일 것이다. 나도 수복직후의 자취시절, 사과상자를 책상으로 삼았던 때가 있었다. 기왕에 "독서 새 물결 운동"이 시작되었으니 어머니에게 조그마한 책상 하나 놓아주는 운동이라도 벌렸으면 어떨까 한다. 그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머니를 따라 아이들이 가지런히 스스로 책을 펴게 되면 일석삼조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식사로 먹어야 할 햄과 소시지를 사는 것을 포기하고 고서점의 책 한 권을 구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기싱을 생각한다. 자서전적 수상록인「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기(私記)」에서 하이네가 교정한 더블스의 서정시집을 갖게된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무렵 나는 책을 살 수 있는 돈만 있으면 최상이었다. 그밖에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 있었다. 물론 대영 박물관에 가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자신의 것으로 자기의 서가에 꽂아두는 것과 전혀 다르다. 찢어진 고서일지라도 나의 책을 보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책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좀 다르다. 신간 서적의 유통도 그렇지만 고서의 유통이 매우 부실하다. 나는 일본에서, 유럽에서, 그리고 미국과 중국에서 고서점을 두루 다녔다. 전국을 조직화한 수집망과 서사의 진열,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과 독특하게 연출된 지적 분위기가 고서의 생명을 책만큼 장수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느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토요일 오후면 고서점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유통도 말이 아니지만 책값이 턱없이 비싸다. 고서의 유통은 책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지식의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업계가 힘을 모아 무언가 손을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책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그 책이 또 사람을 만든다. 인류가 글자를 사용한 것이 4천년을 넘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책이 만들어진 것은 인쇄술의 발명과 대량생산 기술의 발전 뒤에 시작된 것이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책을 후세를 위해 남기고 갔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이다. 책의 생명이 영원한 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영혼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사기(史記)를 열면 2천년을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사마천(司馬遷)을 만나고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펼치면 근 9백년을 살아오는 김부식(金富軾)을 만난다. 플라톤도 칸트도 톨스토이도 그렇게 만난다. 안창호도 신채호도 이광수도 그렇게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서재에 꽂힌 책 가운데 인류와의 대화가 길고 세월의 때가 진하게 묻은 그 한 권을 소중히 여긴다. 그것을 우리는 고전(古典)이라 부르고 있다. 나의 서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없으면 서재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한다.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생명이 긴 것은 그의 저서가 인류의 애독 서이기 때문이다. 생존 당시 그가 영국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았으며 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이 읽혔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은 틀림없이 인류의 고전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읽고 또 읽고 그래도 더 읽고 싶어 다시 읽는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전은 한번 읽고 버려지는 책이 아니다. 그냥 읽어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의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책이 있는 도서관을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이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몇 번이고 거듭 읽는 책이 많을수록 든든하고 유쾌한 샘은 마르지 않는 법이다.
셰익스피어의「헨리 4세」는 시대의 변혁을 읽을 수 있는 '운명의 책(The Book of Fate)'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다.
반란에 휘말려 나라가 어지러워져 불면증에 빠진 왕의 하소연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미리 기록해 둔 '운명의 책'이 있다면 보여달라고 하소연한다. 그것으로 시대의 변혁을 미리 알면 세상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에 워위크 백작은 인간의 생애가 시대를 가르쳐주는 역사의 책이라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운명의 책을 갖고 있다. 시대의 변혁을 모르는 것은 그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세계는 이 '운명의 책'을 읽어야 살아갈 수 있다. 헨리 4세처럼 허공에서 구걸할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서 발견하여야 할 책이다. 우리는 역사를 계승하고 문명을 전승하여야 하는 '운명의 존재'이다. 독서를 운동의 소재로 삼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나는 책을 갖고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창고 같은 서재이지만 나의 든든한 힘의 원천이라 자부하고 있다.